동시대반시대

잉여세대의 감수성 – 냉소와 열정사이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숨만 쉬고 무병장수

일단 질문 하나. 메뚜기 동생은? 바로 사마귀다. 무슨 소리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은 포털 검색창에 ‘사마귀 유치원’을 넣어보라. 배꼽 잡을 준비를 하고, 수유너머 위클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까먹지 말고.

<사마귀 유치원> 진학 상담교사 일수꾼(왼쪽)과 메뚜기 동생 사마귀(오른쪽)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19세 이상 ‘어른이’들을 위한 이 유치원이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진학상담 교사 일수꾼’의 말이다. 지난 9월 25일 첫 방송부터 이른바 대박을 터뜨리더니 매번 웃음 폭탄을 날리고 있다. 그런데 그 웃음 코드가 좀 다르다. 몸이 망가지는 것도 아니고, 얼토당토않은 말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 사회를 이야기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선생님이 되어서 예쁜 집에 살고 싶다면? 쪼끔만 열심히 공부해서 교대에 가서, 임용고시를 패스한 뒤,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며 89세가 될 때까지 월급을 모으면 된다. 아이 둘을 가진다면 어떨까? 아이 한 명당 양육비용이 2억 4천이니 217세가 되면 된단다. 그러니 집을 가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무병장수.

지난 10월 16일 방송에서는 살인적인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비법이 공개되었다. 적게는 5천 많게는 2억이 드는 학비를 마련하는 방법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편의점 알바가 있다. 시급 4320원을 받으며 10시간씩 1년 동안 숨만 쉬고 일하면 1년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 … 응?

냉소, 잉여의 정체성

그게 웃을만한 일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법하다. 하긴 찬찬히 따져보면 결코 웃긴 이야기는 아니다. 철밥통이라고까지 불리는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더라도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은 꾸지 말아야한다. 대학생들이 부모의 도움 없이 대학을 졸업하려면 4년으론 턱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이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지는 못할지라도 소주잔을 기울이며 눈물을 훔쳐야 하는 냉엄한 현실 아닌가. 그런데 그걸 개그 소재로 써먹다니!

이런 버럭질에도 청년 세대는 꿈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개그에 가장 많은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자신들의 현실이 웃음거리가 되는 데도 웃고 있다며 손가락질 하지는 말자.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이야말로 일상적인 웃음거리이니.

잉여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고 있다. 나머지를 뜻하는 이 말은, 청년 세대가 스스로를 냉소적으로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잉여로, 자신이 하는 행동을 잉여짓으로 지칭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잉여’는 바우만이 지적하는 것처럼 쓰레기와 동일한 의미를 공유한다. 즉, 자신을 잉여라고 지칭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쓸모없는 인간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다.

자신을 쓰레기로 인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버려졌다는 현실 인식이다. 정상적인 삶을 꿈꾸는 것조차 사치라는. 세상 어딘가에는 엄친아가 있다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찌질한 동류들이다. 현실의 벽은 높아 도저히 닿을 수 없어 보인다. 변변한 직장에 취직하는 것조차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인데 결혼, 육아, 내 집 장만과 같은 전통적인 꿈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3포 세대, 즉 연애, 결혼, 육아를 포기한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다. 안정된 직장 이전에 연애의 낭만마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망했어요.’, ‘우린 안 될 거야 … 아마’와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의 말들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다. 어느 순간에 내뱉어진 이 말은 유령처럼 인터넷을 떠돌다 이제는 잉여세대가 입버릇처럼 내 뱉는 말이 되었다. 그것뿐인가 말끝마다 불이는 OTL이나 ㅎㄷㄷ 따위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높은 현실의 벽을 비꼬는 말이다. 얼마 전에는 ‘여러분들 안 생겨요’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본래 ‘애인 안 생겨요’라는 말에서 출발한 이 말은 막연한 희망을 품지 말라는 꽤 훌륭한(?) 교훈을 잉여세대에게 전하고 있다.

구체적인 통계 수치를 들먹이지 않아도 오늘날 한국 사회가 청년세대에게 얼마나 각박한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진단이 나왔다. 오죽하면 2010년 경향신문에서는 한국 사회를 두고 고용난민 시대라고 진단했을까. 잉여세대의 냉소는 그 현실이 이제는 개개인의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나름대로 냉철한 현실 인식의 결과인 셈이다. 따라서 TV 개그프로를 보고 깔깔대며 웃는 폭소나, 잉여인 자신에게 보내는 냉소는 사실상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나 다름없다.

유쾌, 그저 웃지요

똑같은 현실을 두고도 선배세대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적어도 노력한 대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들려주는 위로는 이렇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참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그 노력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과 열정, 그리고 성실함이다. 여기서 ‘쪼끔만’ 열심히 하라는 사마귀유치원 일수꾼의 말을 떠올리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까?

‘더 많은 노력을’이라고 말하는 세대에게는 미래는 발전한다는 확실한 희망이 있다. 70~80년대 한국 사회는 정말로 그랬다. 올해보다는 내년이, 5년 뒤, 10년 뒤엔 더 발전해 있을 거라는 것을 누구나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IMF이후 그런 성장신화는 덧없는 환상이 되고 말았다. 이젠 내년이 올해보다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불안은 일상이 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경제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일이다. 발전보다는 몰락이, 풍요보다는 기근이 더 현실적인 미래상이다.

이러다보니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목표로 삼는다는 것조차 낯설다. 꿈이나 희망 따위는 미래라는 시간이 주어진 이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하루, 현실을 사는 이들에게는 도리어 그런 말들은 텅 빈 기호나 마찬가지다. 대신 현재를 즐겁게 사는 것이 삶을 복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냉소와 유쾌함이 교차하는 잉여세대의 특징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냥요’, ‘몰라요’와 같은 말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본래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웃기지도 않은 말과 기호를 보며 낄낄거리며 웃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 그저 즐겁기 때문이다. 이유 없는 유쾌함.

열정, 그들만의 놀이

<잉여킹>, 본래 포켓몬스터의 한 케릭터였지만 어느 새 잉여들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말았다

그렇다고 잉여세대가 그저 배시시 웃기만 하는 이들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어느 한 분야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과 열정을 보여주니 말이다. ‘~질’이라 불리는 것들이 대체로 그렇다.

대표적인 예로 인기 연예인이나 인기 TV 프로그램에 대한 ‘팬질’이 있다. 팬들이 모인 다양한 인터넷 카페나 게시판은 이들의 잉여짓이 빛을 발하는 공간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인기 연예인의 삶을 세세하게 추적하고 분석하며 토론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창작 세계로 끌어들여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하기도 한다.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댓글과 퍼다나르기는 이런 활동을 대규모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인기 연예인이나 인기 TV 드라마를 검색어로 넣어보면 열정적인 팬질의 결과물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태도는 특정 문화를 소비하고 향유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정치적인 공간에서도 이런 잉여짓은 예외 없이 작동한다. 오직 재미를 위해 이들은 언제든 자신의 열정과 노력을 쏟을 준비가 되어 있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나꼼수(나는 꼼수다)’ 방송 역시 이들의 큰 도움을 받았다. 애초에는 깔깔대며 웃기만 하는 ‘이빨’들의 입담으로 채워졌던 방송이 네티즌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버전의 로고송으로 매회 새롭게 꾸며지고 있다.

선거 때마다 회자되는 트위터, 페이스북 따위의 SNS(Social Network Service)의 힘 역시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언론에 자주 SNS가 회자되다보니 트위터 등이 대단히 정치적인 말이 오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오가는 대부분의 말들은 이른바 쓰레기라고 불러도 무방할만한 신변잡기가 대부분이다. 속된 말로 그저 ‘싸지르는’ 글의 공간일 뿐이다. 낯선 이의 글을 RT하고 ‘좋아요’ 버튼을 누르며 동질감을 표하는 건 그저 재미있어서다.

냉소과 열정사이

오늘날 ‘잉여’란 말은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해낸 ‘잉여 가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력을, 즉 일시적인 실업이 아니라 영원히 고용될 수 없는 이들을 의미한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53쪽

잉여란 본래 생산 후 남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잉여란 사용되지 못하고 남은 것들을 의미한다. 불필요함. 과거의 잉여가 생산의 과잉을 의미했다면, 오늘날의 잉여는 생산으로 환산되지 못함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현재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잉여는 앞으로 언제까지 잉여일지 모른다.

항구적인 불안과 공포는 새로운 정감과 태도를 만들어 냈다. 바로 그것은 냉소와 열정의 공존이라는 모습이다. 쓰레기, 쓸모없다는 자기 인식은 상반된 두 행동을 낳는다. 한쪽에서는 쓸모 있음으로 인정받으려는 부단한 노력과 도전이, 다른 한쪽에서는 그 척도 자체를 거부하며 부정하는 태도가 있다. 후자가 바로 잉여세대의 모습이다. 냉소와 열정, 그것은 승자들의 세계에 저항하기 위한 잉여세대의 적극적인 몸부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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