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가치에 대하여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상대적인 가치와 절대적인 가치

홍아야, 이번에는 가치라는 것이 무엇이고, 가치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지, 있다면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 그 중에 정말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지 찾아보자꾸나.

먼저 가치의 정의에서 얘기의 실마리를 찾아 조금씩 풀어가 보자. 국어사전에 보니, 가치란 ‘사물이 지니는 쓸모’란다. 또 ‘쓸모’를 찾아보니 ‘가치 있는 쓰임새’란다. 그러니까 ‘쓰임새’라는 말로 실마리를 삼아 가치의 뜻을 풀어야겠구나. ‘쓰임새’라. 바람직한 ‘쓰임새’가 곧 가치라면, 어떤 생물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이라면 그 생물에게 바람직한 쓰임새 곧 가치가 있는 거네. 그래, 생명체는 외부에서 필요한 에너지 자원을 끊임없이 끌어들여야 생존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가치란 외부에서 끌어들인 대상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더 풍성하게 하는데 보탬이 되는 성질을 가리키는구나. 더 쉽게 풀면 잘 살게 하는 것이구나. 생명체는 생명 밖에 있는 그 무엇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그래서 필요한 것들이 가진 바람직한 쓰임새를 가치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생명들은 서로가 의존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치나 가치가 있는 것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구나.

홍아야, 우리가 만약에 ‘쓰임새’라는 실마리로 가치를 찾으려고 한다면 ‘쓰임새’와 관련된 구체적인 상황인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쓰이는가’에서 가장 중요한 상황의 구성 요소인 ‘누구에게’ ‘무엇이’ ‘왜’ 쓰임새가 있다고 판단하는지를 따져봐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를 알겠구나.

먼저 똑같은 사물이라도 이를 사용하여 어떤 편리나 이익을 얻어 만족하려고 그것을 요구하거나 그것에 관심가진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사물에 대한 가치가 달라질 거야. 이 가설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적인 사고방식, 또는 질문 방식을 만들어 보자. 그 방식은 주체의 요구나 관심 대상을 특정한 하나의 사물로 고정시키고 서로 다른 입장이나 상황 속에 있는 주체들에게 그 대상이 왜 그리고 얼마나 쓰임새가 있는 것인지를 물어서 만족하는 정도를 측정해본다는 가정이란다. 요구나 관심의 대상이 주체에게 어떤 이익이나 편리를 주었다면 결국은 만족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이익이나 편리라는 쓰임새에 대한 만족으로 가치를 확인하고 그 정도를 측정하는 방식이란다.

이를테면 우리가 먹는 밥에 대한 만족으로 밥의 가치 여부와 정도를 알려는 실험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배부른 주체와 허기진 주체에게 그리고 육식만 하는 주체와 채식만 하는 주체와 잡식을 하는 주체에게 주었다고 가정해보자. 또는 다이아몬드나 물을 서로 다른 주체에게 준다고 가정해본다. 또는 각각 다른 주체들의 비슷한 병이나 상처를 치료해 준다고 가정해보자. 또는 똑같은 한 인간이지만 시공간이 달라져 상황이 가변적일 때 각각 다른 상황에 놓인 주체에게 밥이나 다이아몬드 또는 물을 준다거나 치료를 해 준다고 가정해 보자. 각각 다른 주체들에게 주어진 동일한 재화(밥, 물, 다이아몬드)나 용역(치료)에서 얻는 이익이나 편리에 대한 만족도가, 또는 하나의 주체라도 상황 변화에 따라 주어진 재화나 용역에 대한 만족도가 다르게 나타날 거야.

만족도가 다르다는 것은 쓰임새 즉 효용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뜻하므로 재화나 용역의 가치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비록 교환 가치가 일정한 가격으로 매겨졌어도 그 가격으로 교환하는 것에 다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효용(쓰임새)가치가 제 각각 달라서 상대적임을 뜻하는구나.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따른 재화나 용역들의 교환 가격이 늘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것처럼 주변 환경에 따른 생명체의 삶이 유동적일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요구되는 재화나 용역의 수요와 공급도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라서 가치도 언제나 상대적이고 유동적일 수밖에 없구나.

퀴크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각 단위존재들은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차상위 단위 존재의 구성요소로 존재한단다. 자연계에서는 각 단위 존재가 생성되는데 필요한 구성요소가 단위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단위 존재들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차상위 존재가 생성되기 위한 구성요소로써만 가치를 지니므로 자연계에서도 상대적인 가치가 나타나게 마련이지. 비록 인간 사회에서는 변하지 않는 사랑의 추상적 대상이라고 믿어지는 신이나 권력, 돈, 명예나 사랑하는 특정한 사람에 대한 절대적 가치가 신념 형태로 존재하나 그것들의 가치의 절대성은 신념의 변덕만큼이나 상대적일 뿐일 거야.

그렇다면 홍아야, 우주 안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을 찾을 수는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단다. 우리의 출발점이었던 가치의 정의에서 가치를 주체의 편리나 이익을 위한 어떤 대상의 ‘쓰임새’라고 정의하니까 주체에 따라 대상의 쓰임새가 달라져서 그 대상의 가치에 상대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어떤 대상의 가치를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와의 관계를 떠나서 진화과정에서 그 대상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경험의 가능성이라고 정의한다면 모든 단위의 존재들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단다.

여기서 경험의 가능성이란 어떤 단위 존재가 자발성과 능동성과 창조성을 가지고 작용이나 작동이나 동작이나 활동으로 자신을 생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다. 이 가능성은 체계화되고 구조화된 정보와 이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나 질량으로 이루어져 있지. 하나의 존재 단위가 지닌 정보와 그 정보에 따른 에너지 또는 질량이 그것의 성질이 이룰 것이며 그 성질이 또한 작용인 또는 작동인이나 동작인, 또는 활동인이 되어 차상위 존재의 생성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우리는 차하위 존재들의 작용인들의 조합에 따른 질적인 도약으로 차상위 단위 존재가 생성되는 것을 경험이라고 부르자. 정보를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으면 경험의 가능성이 증가되고, 증가된 에너지를 이용하여 새로운 경험 즉 새로운 정보를 얻는 방식으로 단위 존재들이 진화하여 왔고 이러한 진화의 끝자락이 바로 인간이란다. 인간이 지닌 가능성을 넘어선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렴. 인간은 140여 억 년 간 우주의 경험의 진화과정을 함축한 존재란다.

물 분자는 산소와 수소 원자의 작용인에 따른 구조(정보)와 질량 때문에 물 분자는 독특한 성질인 작용인 즉 작용가능성을 가지지. 그리고 그 물 분자의 성질이 작용인이 되어 물 분자의 결합체인 물에는 독특한 물의 성질, 즉 작용·작동인, 즉 작용·작동가능성이 생기겠지. 끓기도 하고 얼기도 하며, 어떤 것을 띄우거나 가라앉히며, 스며들거나 증발하기도 하며, 생명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물의 성질인 작용·작동인 즉 물의 모든 작용과 작동 가능성은 물만이 지닌 절대적인 가치란다. 물 분자라는 단위 존재나 그 결합체인 물이 지닌 작용이나 작동이나 동작의 모든 가능성은 다른 사물에 의존하지 않고 우주를 구성하는데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며 창조적이며 변하지 않는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그 작용인이나 작동인 또는 동작인은 그 존재 단위가 지닌 절대적인 가치잖니.

그러나 어떤 단위 존재가 지닌 가치의 절대성도 궁극적으로는 상대적인 절대성이란다. 우리는 앞에서 어떤 존재 단위가 생성되는데 구성요소가 될 하위 단위의 가치 여부를 따져왔어. 그러나 어떤 차상위 단위 존재의 절대적인 가치도 차하위 의존하기 때문에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 만약에 의존적인 존재가 아닌 절대적 존재를 찾는다면 최하위 존재 단위일 거야. 화이트헤드는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최하위 단위 존재는 빅뱅시에 엄청난 질량의 대칭구조가 무너지면서 생긴 엄청난 에너지이며 그것이 만유의 질량을 만들어내는 절대적이고 창조적이며 궁극적인 존재이고 가치라고 말한단다. 그 에너지 때문에 만유는 생긴 대로 제각기 다른 작용·작동·동작인을 가지게 되어 차상위 존재 단위의 생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거야.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궁극자는 최상위의 단위 존재인 신이란다. 그러나 그도 우주의 창조적인 에너지가 최고의 경험의 가능성으로 실현된 존재란다. 그는 우주 안에서 최고의 경험의 가능성 지닌 분이고 동시에 최고의 경험의 현실성을 지니고 있으며 빅뱅에서 오늘날까지 혼돈의 에너지에 정보를 주어 질서 있는 우주로 진화시키는 실험의 주체란다. 화이트헤드는 신을 우주 진화의 결과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원인적 존재라고 규정한단다. 그러니까 우주의 진화는 우주의 신격화로, 신의 진화는 신격의 우주화로 나타난다는 거야. 우주는 물리적 극이고 신은 정신적 극이어서 우리의 육체와 정신이 서로 안팎을 이루듯이 우주 안에 신이 있고 신 안에 우주가 있다고 말한단다.

그리고 태초의 에너지와 신 이 양 극단의 궁극적인 단위 존재 사이에 포함된 모든 것들은 다른 존재에 의존해서만 존재하므로 형이상학적인 단위 존재 사이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결과적으로는 상대적인 가치를 가질 뿐이란다.

그리고 어떤 단위존재든지 생성과정이라는 경험의 축적으로 존재한단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어떤 대상들을 자신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여 자신을 새롭게 생성하는 과정을 가리킨단다. 가치 있는 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가능성을, 의식(자의식만이 아니라 집단무의식까지)을, 자유를 확장시키는 것이란다. 태어나자마자 젓을 찾아 무는 것은 진화과정에서 축적된 집단 무의식에 축적된 경험의 가능성에 따른 것이고, 태어나서 먹거리를 찾아 에너지를 얻는 경험이나, 옷을 입어서 체온을 유지하는 경험이나, 맹수의 발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경험이나, 휴식을 취해서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경험은 다시 불러낼 수 있는 의식적인 경험에 축적될 경험의 현실성이란다. 태어날 때 유전자에 축적된 본능적인 경험 가능성을 바탕으로 태어난 후에는 감각과 지각을 이용하여 계속해서 경험을 축적하면서 타고난 가능성을 실현(현실화)해나간단다.

그러나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경험은 수렵과 채집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머리에 저장하고 이를 활용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경험이나, 공동체 구성원과 공감으로 공동체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규범에 따라 서로 협력하는 경험이야. 왜냐하면 이러한 정신적인 경험들이 한 인간의 행동원리들인 성격을 형성하고 정체성을 이루기 때문이지. 이러한 경험이 경험을 낳는다는 인식론을 따라서 진화된 인간은 가장 빠르고 가장 큰 경험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되었어.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육체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의식주에 관련된 재화나 용역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선미에 대한 경험으로 정신적인 요구를 만족시켜 진선미에 대한 정신적 경험 가능성의 가치가 인간에게는 더 중요할지도 몰라. 그러고 보면 인간의 생명 활동은 존재 단위 중에서 가장 폭넓은 경험을 요구하고 가장 많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지.

개체와 집단 사이에서 가치의 주체

그런데 그 동안에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필요한 에너지나 정보를 외부에서 내부로 끌어드려 자기를 구성하는 경험적 가치를 요구하는 주체를 유기물인 생명체로만 한정해왔어. 비생명체인 무기물은 외부에서 구성요소를 끌어들여서 자신의 일부로 삼는 자발성과 능동성과 가능성이 없어서 부분들끼리의 관계는 유기체와 달리 다만 외부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만 보였기 때문이지. 그래서 유기체인 생명에 이바지하는 것만을 가치가 있다고 전제해왔단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 또는 유기체 철학에서는 모든 존재 단위의 무생물도 생명을 가진 유기체와 똑같이 스스로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구성요소를 파악하고 구성 요소로서의 가치를 판단하는 정신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단다.

물이 하나의 가능태(정보)로써만 (신에게)존재하다가 그 구성요소인 수소와 산소가 서로를 식별하며 신의 설득으로 물이라는 가능태(정보)를 공유할 때 수소가 산화되어 드디어 최초의 물 분자를 이루는 하나의 전 과정이 가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자나 분자 등이 인간과 같이 의식을 대상화할 수 있는 자의식은 없지만 그러나 직관적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혼돈에 빠지지 않고 존재 단위들의 생성과정에 질서가 생기고 우주가 질서를 유지한다는 거야.

무기물인 소립자들의 생성과정에서 자기의 구성요소에 대한 가치판단이라는 정신적인 경험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탄소의 결정체인 다이아몬드보다 생명을 지닌 제비꽃이나 땅속의 지렁이가 훨씬 귀하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무얼까. 질량으로는 다리아몬드가 더 클 수 있지만 가능성을 뜻하는 정보의 질과 양을 비교한다면 다이아몬드가 제비꽃이나 지렁이가 가진 생리적이고 생태적인 정보에 비교될 수 없지.

구조화된 정보가 에너지를 가지면 경험의 가능성이 경험의 현실성이 된단다. 생명체의 유전자에 기록된 정보들은 진화과정에서 경험했던 정보가 축적된 결과이므로 경험의 가능성이라고 하자. 정보로 존재하는 그 경험의 가능성이 육체적인 에너지 순환구조를 갖추면 경험의 현실체가 되지. 여기서 하나의 단위 존재인 종의 생명체가 지닌 경험의 가능성은 다른 종의 경험 가능성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므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거 알지? 다른 꽃이 제비꽃의 아름다움을 대신할 수 없으며 다른 무엇이 유기물을 분해하여 자연을 정화시키는 지렁이의 생리·생태적인 역할을 대신하지 못하지. 생명계를 위해서 각 종마다 생리적이고 생태적인 활동이 보여주는 창조적인 경험을 어느 무기물도 대신할 수 없으므로 유기체인 생명은 개체마다 절대적인 가치가 있고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언제나 잘 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생명체는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 속에 들어있는 가능성을 실현하여 잘 살아보려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지 않니? 유전자는 더 높은 수준의 더 많은 경험으로 자신을 구성하려고 경험을 축적하고 가능성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기나긴 진화과정을 거쳤어. 그러나 생산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못한 경험을 극대화시키려고 진화의 방향을 잘못 잡은 유전자 집단이나 개체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다가 사라지고 말았어. 그러므로 지금 생존해 있는 생물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의 가능성 때문에 현재의 자연환경에서 생존할 가치와 자격과 권리를 인정받아야 마땅하지.

그러나 여기서 경험의 가능성을 확대하려는 주체가 개체이냐 유전자 집단이냐에 따라 개체생명의 가치가 달라지는구나. 디킨스를 비롯한 많은 생물학자들은 개체는 종이라는 유전자 집단의 경험 가능성을 실험해보는 수단이며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단다. 이기적인 유전자 집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전자 자신의 경험 가능성의 실현과 확대가 목적이고 부모나 부모의 부모를 비롯한 모든 개체 부모들은 유전자를 운반하고 증식하는 과정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경험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그 결과를 축적하고 운반하는 수단이며 도구일 뿐이란다.

개미나 벌의 사회는 자유·민주·평등 사회가 아니라 불평등한 전체주의 사회지. 개체보다는 유전자 집단 전체가 우선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개체는 종속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닐 뿐이야. 마치 도마뱀이 위급할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듯이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들도 전체를 위해서 일부의 개체들이 희생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따라서 희생되는 일부 개체들의 이타성도 이기적인 유전자의 계략이라는 거지. 인간의 경우도 다를 것이 없다는 거야. 인간이 자식에게 갚을 것을 바라고 자식을 기르는 희생을 치른 것이 아니라, 어린 개체가 자라면서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 때문이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 수고는 유용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란다. 따라서 생명의 자발성과 능동성과 창조성에 따른 경험 가능성의 가치가 개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집단에게 있다는 거야.

그러나 벌이나 개미 따위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들의 생식 단위가 개체에게 있지 않고 집단 전체가 오직 여왕벌이나 여왕개미에게 위임했기 때문에 불평등한 전체주의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거야. 개체가 생식 단위여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유전시킬 수 있다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더욱 확충하여 행복해지려는 개체들의 노력이 없이 유전자는 존재할 수도 진화할 수도 없지. 개체들이 복수라고 하여 개체 하나의 가치가 전체 n/1인 것은 아니야.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개체는 저마다 다른 유전 정보에 따른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치의 비교 대상이 없어. 모든 개체 생명은 자신의 가능성을 꽃피워 행복해질 목적과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타고난 가능성을 넘어선 새로운 경험 정보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도 개체의 행복이라는 일차적인 목적을 달성한 결과라고 하버지는 강력히 주장한단다.

인간 사회에서 젊든 늙든 부모는 자식의 욕구를 채워주어야 하는 자식의 필요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자식이 부모의 효용가치를 따지는 것은 부모의 삶의 목적인 행복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식의 이기적인 관심 때문이지. 모든 개체는 그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여 행복해지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고 가장 큰 가치 추구야. 살아가는데 자잘한 모든 얘기가 의미를 가진다면 그 이야기들은 궁극적으로 개체의 경험의 가능성 실현과 그에 따른 행복이거나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행을 담았기 때문이야.

후대에게 유전자를 넘겨주어 종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더욱 확장시키는 것은 부차적인 가치와 목적이야. 번식에 대하여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 집단이 주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 후대가 유전자의 다양성 즉 더 많은 경험가능성을 위한 실험을 위해 후대의 유전의 반절이 나와 다른 유전자라고 주장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부 나와 닮기는 했지만 나와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후대를 나와 동일시할 수 없고 그래서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이지. 똑같이 사회생활을 하지만 번식 단위가 개체에게 있고 유전자가 교차되며 개인주의와 민주의의를 사회생활의 원칙으로 삼는 인간을 번식 단위가 여왕 하나에게 있는 전체주의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벌이나 개미 등과 똑같이 보고 주체가 집단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개체의 절대적인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유전자 집단이 개체들의 동의 없는 집합적인 의지를 가질 수는 없다고 주장해도 유전자가 교차되는 것이 동의 과정이라고 주장하면서 나의 주장을 유전자 집단의 명령으로 환원시키려 들 거야. 그렇다면 경험 가능성 실현과 확장의 주체가, 그리고 가치나 가치 있는 것을 요구하는 주체가 개체냐 유전자 집단이냐 하는 문제는 사실의 문제라기보다는 관점의 문제요 상대적인 가치 판단의 문제일지도 몰라.

홍아야, 이제까지는 특정한 대상을 요구하는 서로 다른 주체들에게 그 대상이 지니는 가치를 따져 보았지. 그랬더니 그 대상의 가치가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성을 확인했어. 그러나 주체와의 관계를 떠나서 대상이 지니는 대체할 수 없는 경험의 가능성만을 보고 우리는 그것을 잠정적으로 절대적인 가치라고 규정했지. 그러나 모든 단위존재가 아래 단위에 의존하여서만 존재가 가능하다는 존재 조건 때문에 그것도 상대적인 절대성임을 확인했어. 그리고 생명체에서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고 확장하려고 가치나 가치 있는 것을 요구하는 주체가 개체인지 유전자 집단인지를 따져 보았어. 하버지는 개체만이 현실적인 존재이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유전자 집단이 동의 과정 없이 집합적인 의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개체가 지닌 경험의 가능성이 실현되고 확장되는 것만이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버지는 주장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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