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 여행스케치의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에 투영해 본 대학생의 모습

- 이하나(안양과학대 강사)

이번 학기 중간고사는 모의 면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학원에서나 가르칠 법한 내용을 이제는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학교는 학문의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이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다. ‘교양 수업’이고, ‘말하기 수업’이라고 하기에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오랜 밤을 고민했다. 다른 강사들과 상의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내가 맡은 수업은 정말로 실용적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대학생이라면, 그것도 4년제 대학이 아닌 전문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 글은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오롯이 실용적으로 마주하며 주고받은 이야기의 짤막한 정리라 하고 싶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우리 대학생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며칠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는데 전과 다르지 않게 몇 건의 자살 소식이 들린다. 이것은 아직도 대학입시가 우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끝이란 말인가? 부모님, 선생님, 사회 이 모두는 고3에게 집중하지만, 그 누구도 대학생에게는 집중하지 않는다. 그럼 대학생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가끔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오는 대학의 제자들이 있다. 사회에 나가기 전 자신들을 무장하게 만들려는 나의 마음을 읽은 몇몇 아이들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할 곳을 찾을 때나, 해결해야 할 일을 상의하고자 하는 상황에서의 연락이 가끔 많다.

유아교육과에 다니는 Y양은 시험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찜질방 매점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책을 좀 보려고 하면 손님이 자꾸 찾아와서 도대체 집중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냥 책을 치우라고 말했다.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닌 Y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험기간에 공부를 하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하고 공부를 하라고 말할 수 있는 선생은 참으로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마는 현실이다. 만약 내가 시험기간이니 아르바이트는 뒤로하고 공부를 하라고 조언했다면, Y양은 나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학생이 시험기간에 공부하지 않는 것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니 말이다.

원하는 대로만 살수는 없지만

무엇을 위해서 힘든 삶을 견뎌야 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읽고 나를 비롯한 우리 주변 많은 사람들의 열정이 어떻게 노동이 되고 있는지를 살폈다. 가장 무서운 말은 역시 “너희는 너희가 원하는 일을 하잖아!”라는 말이다.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힘들어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명제가 오랜 시간 우리를 짓눌렀다. 대학생도 마찬가지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학에만 들어가면 무엇이든지 다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랬고, 지금의 대학생들도 같았다. 심지어는 지금의 고등학생들에게도 이런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후,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고,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이내 힘이 빠지고 만다. 우리는 대체로, 심하게는 거의 모두,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 수 없다.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그 날’을 위해서 욕망을 거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잠을 자는 것, 밥을 먹는 것, 친구를 만나는 것, 노는 것, 쉬는 것 등등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 원래부터 자유란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절제하고 있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그 날’이 조금이라도 빨리 올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생각하는 그 날의 도래를 위해 작게나마 도모하고 있던 일이 잘못되는 날에는 욕구를 더 절제하지 못한 자신을 심하게 탓하며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 나도 그렇고, 대학생들도 그렇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날’은 과연 ‘어떤 날’이냐는 것이다. ‘그 날’이 왔을 때 온 마음으로 행복을 느끼려면, ‘그 날’이 ‘어떤 날’인지 알아야 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그 날’이 ‘어떤 날’이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 날’의 정체를 찾아야 할 것이다.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두려운 일이야

중간고사였던 모의면접의 마지막 질문은 ‘내게 천만 원이 생긴다면?’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실로 놀라웠다. 약300명 중 거의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 질문을 받고 30초 안에 눈물을 흘렸다. 처음 이 질문을 선택했을 때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답변하는 대학생들의 천 가지 얼굴을 보면서 우리 대학생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라는 가사처럼 알 수 없는 천만 원이 생긴다는 건 빚을 갚을 수 있는 설렘이 있는 일이었다. 대체로 학생들은 학자금 대출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학교에 다녀야 하는 미래의 날들의 대출받아야 할 학자금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심지어 부모님의 빚을 대신 갚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수업시간에 졸던 아이도, 떠들던 아이도 이 질문에서는 진지한 눈물을 보였다.

대학생은 미성년자는 아니지만, 아직 진정한 사회인도 아니다. 이들에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 아니라 그저 두렵기만 한 일일 것이다. 대학생들은 아직 ‘천만 원’이 세상에서 어떤 가치를 갖는지도, 얼마나 노력해야 그 돈을 모을 수 있는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미래가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이들에게 천만 원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란 빚을 갚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학생들에게 그 누가 섣불리 미래의 희망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산다는 건 다 그런 것,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들에게 희망을 갖고 노력하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의 노력을 할 수도 없는 대학생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더 하라는 것, 희망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교과서적이고 역설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마냥 나와 다른 공간의 것으로 할 수 없다. 내가 말하는 희망은 막연한 꿈과는 다른 노력의 대가로 받아드는 보다 구체적인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희망을 구체화하여 언급하는 것은 대학생들에게는 어둠속의 등대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지금 동굴 속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거세된 욕망과 절제하는 삶이 바라는 ‘그 날’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노력이 ‘그 날’에 가장 근접한 곳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것이라는 믿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에게 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노력 너머의 행운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저 퍽퍽한 이 사회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이 적어도 노력한 만큼은 삶을 누리고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사회인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산다는 건 다 그런 것,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응답 1개

  1. pureu말하길

    비도 오는데
    마음이 더 무겁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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