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다섯 번의 죽음

- 이계삼

잠자리에 들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모르겠다. 안철수의 1,500억 기부를 가끔 떠올렸던 것이 생각난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자신이 밝힌 바 그대로, 선의로 해석하고 싶다. 내가 성서에서 얻은 가르침이란, 가진 것을 내 놓는 일에는 이름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제는 이런 이야기는 어디 대놓고 할 데도 없다. 안철수는 ‘가진 자들의 의무’를 말한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생각할 수 없는, 오직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권능의 행사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수업 시간 외에 빈 시간에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우리 학교 축제가 다가오고 있고, 나는 축제 준비 책임자이다. 준비위원 아이들이 거의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을 찾아오고, 그래서 이런저런 조언과 지시를 해야 한다. 체크해야 할 항목들이 엄청 많다. 오늘 오전, 수업이 없는 빈 시간에는 밀양시청에 가서 축제 마지막 행사인 어울마당 행사장 대관을 위해서 신청서를 쓰고 서류를 받아왔다.

나는 2학년 자연계 담임을 맡고 있다. 오늘은 포항공대와 울산과기대에서 하는 과학영재캠프에 아이들을 추천하는 일을 했다. 요즘 입학사정관제가 시행되면서 부쩍 이런 행사가 늘었다. 대학은 수학 과학에 뛰어난 아이들을 선점하고 싶을 것이고, 아이들은 스펙이 필요하니 학교에서 한 명 뽑는 이 일에도 굉장한 관심을 보인다. 그 한 명을 선정해서 학교생활기록부 보내고, 추천서 쓰고 자기소개서를 봐 주어야 한다. 추천서 쓰고, 학교장 추천서에 직인을 찍어 우편물을 보내면 또 한 시간이 간다. 교장실에 결재를 받으러 갔더니, 행정실장이 ‘다음부터는 교감 결재까지 받아서 추천 근거를 남겨 두는 게 맞다’며 한소리 거든다.

점심시간이다. 내가 연재하는 <프레시안> 서평 지면에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장기비상시대’를 쓰리라 마음먹고 바짝 읽고 있다. 석유정점을 이미 지난 이 세계에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그려놓은 책이다. 석유와 화석에너지를 중심으로 펼쳐놓은 세계 근대사이다. 굉장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내 아들, 그 아들의 아들이 살아갈 무렵에는 석유가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그리하여 기후변화와 식량문제, 자원을 둘러싼 필연적인 전쟁으로 조만간 전 세계가 급격한 소용돌이로 빠져들 거라는 묵시록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나는 학교에서 연구부 기획 업무를 맡고 있다. 거의 매일 열 건 가까운 공문들이 들이찬다. 그거 접수하고, 기안해야 할 일이 늘 있다. 수업 없는 한 시간 꼬박 일을 하면 공문 한 두 건 정도를 기안할 수 있다. 수업은 보충수업이 없어서 세 시간 했다. 8교시 빈 시간 때는 한미 FTA 국회비준 관련해서 우리 지역 국회의원을 압박하자는 취지로 민주시민단체들의 명의로 된 공문을 만들어 국회의원 사무소에 팩스를 넣었다.

이제, 퇴근이다. 저녁 5시부터는 경남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거리 서명이 예정되어 있지만, 오늘은 하루 쉬고 싶다. 이 지면에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씻고 책상 앞에 앉았다. <녹색평론> 20주년에 대한 소회를 써 볼까, <장기비상시대>의 메시지를 좀 풀어서 써 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차에 자꾸 뇌리를 잡아채는 일이 있다. 최근 들어 접했던 다섯 죽음. 그 죽음보다 이를 받아들이고 망각하는 일상의 매커니즘에 대해 쓰고 싶다.

전남 해남에서 수능시험을 치른 수험생이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해 자살했다. 수능 시험 감독관 수당 10만원을 받아 우리 ‘너른마당’ 식구들과 함께 김진숙의 승리를 자축하며 거하게 한 잔 마시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아파트 옥상에는 그 친구가 수능 시험장까지 들고 간 가방과 도시락이 남아 있었다 한다. 수능 시험 당일 새벽 6시에 대전에서 한 재수생이 투신자살했다. 아버지는 무슨 예감이 있었는지, 자식을 찾아 밤새 헤맸고, 새벽에 아버지가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추락사한 이들의 주검은 끔찍하다. 나는 군대 시절, 헌병부대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사고 보고서에 첨부된 추락사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차마 형용할 수 없다. 그 주검을 발견한 아버지의 마음이란…. 나무관세음 보살. 그는 유서에서 ‘미안하다’고 썼다 한다.

수능을 치른 수원의 한 고등학교 3학년 아이가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듣고 자살했다. 동생에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고, 자신이 쓰던 전자제품들을 물려주었다 한다.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이 모두에게 감격의 눈물을 안겨주던 그 바로 전날, 쌍용자동차에서는 열 아홉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쌍용차 퇴직 노동자인 남편이 일하러 나간 사이 부인이 집에서 숨을 거두었고, 두 아이는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엄마의 주검 옆에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창원 상남동에 있는 동양 최대라는 유흥가에서 한 노래방 도우미가 취객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 네 살 때 입양되었고, 사춘기 때 가출을 했고 그때부터 시설의 보호를 받다가 자립한 스물 여덟 살 처녀였다. 언론 보도를 찾아 보니, 그 때 그이는 생리중이었고, 그러나 빚을 갚기 위해 2차를 나가야 했고, 취기와 성욕으로 짐승이 되어버린 성구매자가 그를 목 졸라 죽였다.

그들은 모두 누구일까. 나의 ‘나’인가. 나의 ‘너’인가. 그냥 ‘그’인가. 지금 이 시간, 같은 시간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 일들은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늘 있어왔던 일이니, 그저 ‘이놈의 세상’ 하면서 눈에 힘 한번 꾸욱 주고서는 다시 나 자신에게로 잦아들면 되는 일일까.

이 글을 이렇게 구구하게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양심을 건사하기 위해? 서푼어치의 양심 따위가 뭐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런 글은 읽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일들,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쌍용차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수능만 치르고 나면 꼭 몇 명씩은 자살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술이라도 한 잔 마신 남정네들이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여성을 사는 이 환락의 불야성이 밤마다 이어지는 것을, 거기에 묶여 있는 성매매 여성이 엄청나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알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 아는 것일까? 포털 사이트 표제에 오른 기사 제목만 읽어도 그 사건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업무에 파묻혀 있을 때, 내 상념 속에 잦아들어 있을 때, 하나 둘 끔찍한 고독을 안고 혹은 능멸을 겪으며 나의 동시대에서 떠나간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나는 이만큼이라도 뭔가 하고 있으니 내 책임은 면죄된다고 봐도 되는 것인가? 그래서 그저 침묵하는 하느님을, ‘금관의 예수’를 비난해야 하나?

힘없는 문장은 욕되다. 이미 세상은 망해버린 것인가.

십여일 간 열에 시달리다가 겨우 일어났다. 이젠 남의 눈에 띄일까봐 누워 있는 것도 부담이 되어 될 수 있으면 앉아서 견디지만, 눕지 않고는 못 배겨 어쩔 수 없이 누워 있었다. 죽 한 냄비를 끓여 이틀씩 먹었다. 며칠 전 이곳 시내 고등학교 학생 교련 시범식이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그들이 받아 온 훈련을 관계 기관장들 앞에서 해 보이는 것인데 다음 날, 여고생 하나가 숨을 거두었단다. 뒤늦게 알았는데 그 여고생은 선천성 심장판막증이라는 지병을 앓고 있었단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과연 용서받을 수 있는 인간인지 두렵다. 난 정말 어찌했으면 좋을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기만 하다가 죽는가 싶다. 억울하게 죽어 가는 가엾은 목숨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제 혼자 살려고 오늘 아침에도 꾸역꾸역 숟가락을 입에 쑤셔 넣었다. 용서받지 못할 이 위선자!!

권정생 선생님이 이현주 목사님께 생전에 남긴 서신의 일부이다. 묘하게도 이 글이 나에겐 위로가 된다. 부끄럽지만.

그러므로 투쟁은 덜 괴롭기 위해, 나 자신의 실존을 건사하기 위해, 그리고 같은 괴로움으로 뒤척이는 친구를 만나 서로 위로받기 위해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을 모으고, 이 다섯 넋들을 위해 잠시간 기도를 바친다. 이 기도가 날마다 이어질 수 있기를, 기도의 끈을 놓치지 않기를 또한 기도한다. 어두운 시대이다. 삼가 다섯 넋들의 명복을 빈다. 저 세상에서는 부디 평안하기를….

응답 3개

  1. 찰나말하길

    뜨겁게 읽었습니다.. 환기토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비포선셋말하길

    고3 아이들 죽음 소식, 쌍차소식 듣고 하루종일 뒤숭숭했어요. 고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고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고..근데 그러는 게 제 양심을 건사하려는 일 같지는 않고 사람들이 다 알아야한다는 것도 아니고.. 아픈 죽음 없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고민스러운데 뭘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요.. 이 글 읽는 것으로 조금 위로가 되네요. 삼가 다섯 넋들의 명복을 빕니다.

  3. 말하길

    앞 대문에 다른 원고의 일부가 나옵니다. 수정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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