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가치에 관하여 2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가치 판단에 대한 두 번째 상황은 주체가 요구하는 각각의 재화나 용역이 얼마나 쓰임새가 있느냐를 물어 가치를 따지는 상황이야. 이 상황에서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실험적이 사고방식은, 주체를 고정시키고 그 주체가 요구하는 여러 가지 재화나 용역이 주체의 이익이나 편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 만족시킨다면 왜, 얼마나 만족시키는지 묻는다는 가정적 질문이야.

그렇게 묻기 위해서는 재화나 용역을 요구하는 주체를 누구로 대표할 것이냐를 특정해야지. 여기서는 인간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므로 일반적인 인간을 주어로 특정할 거야. 그런데 인간 주체가 요구하는 가치의 범위를 확정하기 위해서 요구하는 대상이 재화나 용역의 가치로만 한정될 수 있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되겠구나. 경제적인 쓰임새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총체적인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야.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나 인간이 필요한 모든 대상에는 진`선`미`성(眞善美聖)이라는 가치의 어떤 수준이 있는데, 앞에서 말한 재화나 용역 등 경제적인 가치가 어떤 경우에는 이보다 낮은 수준의 가치일 수도 있어. 따라서 인간의 총체적인 삶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모아서 이들을 쓰임새에 따라 분류한 다음에 분류항에 따른 가치의 속성을 파악하고 그 속성에 따라 어떤 가치가 인간의 생존과 성숙에 더 큰 쓰임새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 일머리 아니겠니.

요구 대상들을 쓰임새에 따라 분류하는 작업은 쉽겠지만 분류항들의 가치를 판단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로구나, 왜냐하면 일반적인 인간이라는 추상적인 주체나 특정한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주체나 어떤 주체가 만든 분류 기준이든지 그 주체의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주 만물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가 없어. 판단 기준이 언제나 판단 주체의 가치에 물들 수밖에 없다는 역설이 보여주는 것은 가치가 절대적이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지. 누군가가 가치 기준을 따지려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가 추구하는 대상들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가치들의 중요성에 따라 그것에 대한 추구활동의 우선순위를 정하려는 그의 이해추구 활동이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기준은 인간에게 기대할 수 없구나.

그렇다면 일반적인 인간이 추구하는 또는 추구해야하는 가치를 따져보자고 해놓고 인간의 가치기준은 인간의 이해관계가 반영되므로 우주 만물의 가치를 따지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모순이 먼저 해결되어야 하겠구나. 만약에 우주의 진화와 역사의 발달과 인간의 성숙 과정들에 공통된 연속성이 있다면 그 연속성에서 하나의 방향을 찾을 수 있고 그 방향에서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도 있을 거야. 내 말은 진화나 발달이나 성숙의 연속성이 결국에는 생명(운영체제-경험의 가능성-의식-자유)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방향이라면 그 연속성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우주 만물의 진화나 각 문화의 발달이나 인간 일반의 성숙의 가치를 찾을 수가 있을 거라는 얘기야. 그리고 하버지는 그 연속성의 지향점이 진선미라고 믿는단다. 왜냐하면 진선미가 우주의 진화와 역사의 발전과 개인의 성숙을 이끌었기 때문이며, 경험의 가능성과 의식과 자유를 확장시켰기 때문이며, 생명을 보다 더 풍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진선미의 가치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이 가장 많은 존재가 인간이라고 믿으며 그래서 인간을 우주 진화의 축적이라고 믿는단다.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단위 존재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차상위 단계의 주체에게 종속되는 가치가 아니라 단위 존재 그 자체가 주체가 되어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그 단위 존재에 이르기까지 축적해온 경험의 가능성이라고 하버지는 말했어. 이 차상위 단계의 가능성은 차하위 단계인 구성요소들의 경험 가능성인 작용인들이나 작동인들이나 동작인들의 상호 작용에 따른 가능성의 질적이 도약으로 생긴 거야.

그러나 아무리 질적인 도약이 있더라도 차상위 단계는 차하위 단계의 경험을 바탕으로 존재하므로 그것의 가치는 상대적인 절대성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차하위 단위 존재가 차상위 단위 존재의 생성을 위한‘쓸모’로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차상위 단위 존재가 차하위 단위 존재의‘쓸모’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의존 관계이기 때문에 상대성을 띨 수밖에 없지. 앞에서 우주의 궁극적인 존재인 최상위 단위 존재와 최하위 단위 존재를 신이나 에너지를 가정했지만 아직 인간이 이들 실재를 과학적으로 밝혀내진 못했어.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이 궁극적인 존재들을 밝혔다고 나는 믿고 있지. 아무튼 이 둘 사이에 있는 모든 존재는 생성 과정의 의존성 때문에 상대적인 절대성을 가지며 그래서 차하위 단계의 경험들에 의존하면서도 질적인 도약으로 존재하므로 가치의 위계성이 생기게 된단다.

만약에 인간이 영장류의 과정을 거친 존재라면 인간의 생리적이고 생태적인 작용이나 작동 또는 의식적인 활동이나 무의식적인 활동에는 영장류 시절의 경험의 자취가 남아 있을 거야. 그러나 인간이 영장류에서 이룬 경험의 가능성에서 질적인 도약을 이루었기 때문에 어떤 영장류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되었어. 원숭이와 인간의 경험 가능성이라는 상대적인 절대성을 가진 두 가치의 관계가 위계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 영장류의 기본적인 가능성을 보존하면서도 영장류에게 없는 가능성의 질적인 도약을 이루어 둘 사이에 가치의 큰 차이가 생겼기 때문이야. 차상위 계급이 차하위 계급의 자유와 권리를 배제하는 억압적인 관계를 사회학에서 위계적이라 하지만 가치를 추구하는 성장 과정에서는 반대로 차상위 존재가 차하위 존재의 경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존하여 더욱 넓고 깊은 세계로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단다.

경험 가능성의 단계별 또는 수준별 전개가 자연이나 인간, 사회 어디에서 나타나든지 그리고 그것이 진화든 발달이든 성숙이든 어떤 단계도 건너뛸 수가 없으며 반드시 차례대로 나타난다는 거야. 미립자, 원자, 분자, 원핵세포, 진핵세포, 균류, ········ 식물, / 어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 인간의 순서로 위계적인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내적인 의식의 확장에 따라 그 의식이 담기는 물체나 신체도 그에 상응하여 복합성이 더해간다는 간대. 발달(또는 진화나 성숙) 수준의 위계적인 전개를 직선으로 표현하든, 나선으로 표현하든, 물결로 표현하든 상위 단계는 하위 단계의 경험 가능성을 포함하면서 질적인 도약으로 전 단계를 초월한대. (이를 ‘포월적’이라 함)

켄 윌버는 위계성에 의한 복합성의 증가로 우주의 진화과정을 설명하면서 복합성의 증가는 의식의 확장과정이었다고 말해. 그는 겉으로 진화하거나 발달하거나 성숙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위 존재들의 내부에는 물결이 퍼지는 것처럼 반드시 의식이 확장된다고 말해. 여기서 의식은 의식을 의식하는 자의식과 의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이 있으며 윌버는 영장류 이상을 제외한다면 모든 단위 존재들은 무의식이 생리와 활동을 지배한다고 믿는단다.

내가 보기에도 유기체가 복잡한 내부 구성 요소들을 하나의 전체인 생명으로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신경세포가 연결되어야 하지. 척추동물은 신경중추인 척추가 형성되어야 하고, 파충류는 복합성이 더하면서 그 중추적이고 복합적인 생리기능을 위해 척추의 일부분에서 뇌간이, 그리고 포유동물은 뇌간의 일부분에서 변연계가, 그리고 영장류는 변연게의 일부분에서 신피질이 발전하면서 의식이 확장되는 것으로 보여. 거꾸로 보면, 의식의 확장에 따라 물리적으로나 생리적으로 진화하거나 발달하거나 성숙하는 것의 외부 양태가 복합성을 더해간다는 켄 윌버의 말이나, 경험의 가능성이 확장되면서 외부 양태가 그에 맞추어 진화하고 발달하고 성숙한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은 아마도 그래서 같은 얘기일 거야. 그러므로 의식의 확장이나 경험 가능성의 확장이 어떤 단계에 이르면 그 단계의 단위 존재는 스스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의식적(영장류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무의식적으로)으로 다룰 수 있게 됨으로써 영구히 그 상태의 주인이 된다는 거야.

여기서 이 두 사람에게서 일치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화나 발달이나 성숙의 수준별 위계성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위계성이 무생물의 단위 존재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이지. 무생물도 의식이 있어 주변의 한경 요소에 대하여 자신의 구성 요소로써의 가치를 판단하고 선택하여 자신을 생성해 가는 경험을 한다고 주장한단다. 물론 생물이나 무생물의 가치 판단이 인간처럼 의식을 의식하는 자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무의식에 축적된 경험의 가능성에 따른 직관적인 판단이라고 말한단다. 자율신경계로 생리작용을 운행하는 무의식도 경험이나 이성에 비추어보는 자의식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축적된 본능적 직관에 따라 작동되는 거지.‘꽃은 아름답다’는 명제를 이성적인 추리나 감각적인 경험으로는 증명할 길이 없어. 그러나 우리는 보자마자 처음 본 꽃이라도 그 아름다움을 안다.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직관 능력은 모든 존재 단위가 가지고 있는 경험 또는 인식 가능성이라는 거야.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유기체와 무기체의 경험의 가능성 또는 의식과 자유의 폭에는 위계성에 따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의식적(자의식보다는 무의식적인)인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는 것 거다.

만약에 단위 존재별 가치의 위계성을 인정한다면 2000년대 초에 인간의 가능성과 성숙에 대한 통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책 <통합 비젼>의 저자 켄 윌버의 기준을 빌어다 쓸 수도 있다. 그는 우주와 생명의 진화와 인간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성숙과 사회와 문화의 발전 비젼에서 앞뒤 단계의 관계를 위계적이라고 강조한단다. 그에 따르면 성숙하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으므로 성숙하게 하는 것, 경험을 확충시키는 것, 가능성을 실현하게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강조한단다. 그의 발달(또는 진화나 성숙)기준 속에는 인간이 발달 과정에서 겪는 경험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고, 성장 발달에 도움되는 경험이 무엇인지를 밝혔기 때문에 하버지는 켄 윌버의 위계 기준 속에 들어있는 가치판단을 빌려 쓰려 한다.

켄 윌버는 발달, 진화, 성장의 위계성에 따라 인간이 요구하는 대상의 가치가 달라지는데 그 대상들의 위계적인 가치를 색깔로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는 대개 무지개의 빛깔을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로 구분하지. 인간의 성숙 수준에 어떤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지개의 색깔들 사이에 어떤 경계선이 있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멀리서 보면 구분이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인간의 성숙도 구분이 있는 듯이 보인다는 거야. 위계성에 따른 이 빛깔들은 적외선에서 자외선까지 가시광선 안쪽에 배치되어 있어서 어떤 빛깔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 빛깔의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비슷한 사고방식에 따른 활동으로 비슷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거야.

하버지는 인간이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경험한다는 경험적인 인식론을 믿는단다. 그러나‘둥글다’와‘모나다’라는 모순된 두 성질이 한 사물 안에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동그란 삼각형이 없다는 것을 감각적인 경험으로는 증명할 수는 없으나 타고난 경험가능성의 하나인 이성으로 추리하여 알 수 있는 선험적인 인식론도 믿는단다. 이처럼 경험의 가능성으로 감각과 이성이 주어졌으며 한 편 경험의 현실성은 감각을 통한 경험의 축적으로 실현되며 동시에 경험을 바탕으로 추리하는 과정에서 이성도 더 분명해지므로써 경험의 현실성이 실현된단다.

수학이나 논리학의 판단들은 논리적인 형식으로 기호들을 조작하여 감각 경험 없이 이성(감각과 함께 경험 가능성의 한 축)만으로도 판단할 수 있지만, 자연 과학이나 인문· 사회과학적인 판단은 아무리 논리적인 정합성을 갖추었어도 감각에 근거한 경험적인 증거 없이는 그 판단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어. 그래서 경험이 경험을 낳는 인지능력 즉 경험의 현실성의 발달 단계가 소라 모양으로 상승하는 나선형 순환 구조를 이루게 된대. 경험이 경험을 낳아 확대되는 소라모양의 나선형 구조의 위계적인 발단 단계가 인지능력만이 아니라 세계관이나 가치관 또는 자아 정체성의 발달 단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대.

그런데 바로 소라 모양의 나선형 발달(또는 진화나 성숙)단계에서 어느 면을 자르든지 단면의 낮은 부분과 높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차이가 발견된대. 하나는 면의 넓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색깔이 낮은 단계에서부터 빨간색으로 시작되는 무지개 색깔의 순서로 배치된다는 거야. 면의 넓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유는 경험이 경험을 부르는 의식의 확장 또는 경험의 현실성의 확장이 전 단계 경험들의 산술적인 더하기가 아니라 질적인 도약에 따른 곱하기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낮은 단계부터 빨간색으로 시작되는 무지개 색으로 배치되는 이유는 분광된 무지개의 빛깔들이 인간에게는 가시광선들이고, 파장이 가장 긴 빨간 빛이 적외선 가까이 있는 아래쪽에 위치하고 분광된 모든 빛깔의 합인 완전한 빛은 파장이 가장 짧아 무지개의 보라색 위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야. 색깔이 없는 이 완전한 빛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원적인 가치를 넘어서는 통합적인 가치를 나타내.

발달 단계의 단면들의 색깔이 무지개 빛깔로 배치된다는 비유적인 의미는 인간이 쓰고 있는 저마다의 안경(관점 – 인식체계)의 색깔들을 뜻한다고 앞에서 말했지. 인간은 자기의 경험에 비춰 사물을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의 발달 단계의 경험으로 착색된 색안경을 쓰고 볼 수밖에 없지. 마찬가지로 인간은 현재까지의 경험이 얼마나 잘 정리(범주화와 체계화와 재구조화)되었는지에 따라 자신의 안경의 굴절이 결정돼. 인간의 안경은 굴절이 불규칙하여 사물을 크게 보거나 작게 보기도 하지만 굴절이 일정하지 않아 사물을 찌그러지게 보이기 때문에 이 굴절도 색깔과 마찬가지로 고정관념을 뜻해. 굴절이 불규칙하고 물감이 뒤섞여 색깔이 칙칙해진 안경(관점 – 인식체계)을 쓰면 앞뒤 단계의 경험들이 뒤섞여 정리되지 못한 채 엉뚱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진선미를 똑바로 경험할 수 없을 거야,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이 도달한 그 발달 단계에 맞게,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색깔을 단일하고 옅게 만들어야 하며, 또 할 수만 굴절을 일정하고 작게 만들어야 하겠지. 가장 높은 수준의 통합적인 비전에 도달하면 색깔과 굴절이 거의 사라진 맑고 밝은 안경으로 사물의 진선미를 보니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진선미)이 있는 그대로 보일 거야. 여기서 유념할 것이 있는데, 물감의 색깔들이 섞이면 점점 칙칙해져 암흑으로 변하지만 무지개 빛깔들은 섞일수록 밝아져서, 분광된 모든 색이 다 섞이면 색깔이 사라진다는 비유의 의미를 알고 가자. 낮은 단계의 경험이나 인식은 높은 단계에서 볼 때 고정관념에 불과해. 물감의 색깔이 뒤섞일수록 칙칙해지는 것은 고정관념이 고정관념을 만드는 악순환이 거듭되어 우리의 마음의 눈이 갈수록 어두워져 암흑의 혼돈에서 헤메는 것을 뜻하지. 그러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깨달음이 깨달음을 불러오는 선순환이 거듭되어 우리의 마음의 눈(안경, 관점, 인식체계)이 점차 맑고 밝아져서 사물의 진선미가 더 똑똑하게 보이는 것을 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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