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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19 – 점거와 철거 -운동의 물리적 장소를 둘러싼 싸움

- 고병권(수유너머R)

1. 주코티공원과 리버티스퀘어

 ‘주코티공원(Zuccotti Park)’과 ‘리버티스퀘어(Liberty Square)’는 야곱과 이스라엘처럼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주코티공원’은 맨하튼 남쪽 3100평방미터의 작은 공원이다. 소유는 사적인데 이용은 공적으로 하게 되어있는 묘한 공간이다. 뉴욕시가 개발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일부 면적을 공적 용도로 만들라고 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부동산회사인 ‘브룩필드 프로퍼티(Brookfied Properties)’가 소유하고 있다. 공원이름은 이 회사의 회장 ‘존 주코티(John Zuccotti)’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점거’가 일어난 뒤 사람들은 ‘주코티공원’을 ‘리버티스퀘어’로 부른다.

11월 15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리버티스퀘어 철거(폭스뉴스)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다. 주코티공원을 지배하는 사적소유권은 사실상 행사되지 못했다(브룩필드 회사는 청소 등의 이유를 들어 점거자들을 몰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적 소유의 기능이 일정하게 제한된 반면 공적 기능은 훨씬 강화되었다. 사람들은 여기서 음식과 책, 음악과 춤을 함께 나누었다. 과거엔 공공 공원이라고 해도 그저 개인들이 쉬는 공간, 말 그대로 커피 한잔도 따로 마시는 곳이었지만, 점거 이후에는 모두가 서로에게 말과 음식을 권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즉 개인들의 무리에서 공동체로 변한 것이다.
 일종의 성체변환이 일어난 셈이다. 높은 빌딩숲 사이의 작은 쉼터에 불과했던 공원은 숙박시설과 주방과 미디어센터, 공연장, 도서관, 정치적 토론장까지 갖춘 사실상의 마을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주코티공원은 월스트리트의 구성물이었던 반면 새로 태어난 리버티스퀘어는 월스트리트에 반대하는, ‘반(反)월스트리트적 구성’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점거 행위’가 ‘주코티공원’을 ‘리버티스퀘어’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2. 명령어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이러한 성체변환은,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의 표현을 빌면, 일종의 ‘비물체적 변형(incorporeal transform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가령 판사가 누군가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순간, ‘피고’는 ‘죄수’로 순식간에 그리고 즉각적으로 바뀌어 버린다. 사람만이 아니라 공간도 그렇다. 비행기 납치범이 권총을 들고 일어서 소리치는 순간 ‘비행기’는 ‘감옥’이 되고 ‘승객들’은 ‘인질’이 되고 만다. 하지만 변화 ‘이전’의 상태나 변화 ‘이후’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들에는 ‘변화’ 자체가 담겨 있지 않다(베르크손이 ‘자유’란 행위 이전도 행위 이후도 아닌, 행위가 지닌 색깔이라고 말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피고입니다”, “이 사람은 죄수입니다” 등에는 변화, 즉 ‘피고에서 죄수로 변하는 사건’이 들어 있지 않다. 이번 점거를 빗대어 말하자면 주코티공원의 모습과 리버티스퀘어의 모습은, 전자에서 후자로의 변신이 어떤 것이었고 어떻게 가능했지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든 예로 돌아가 보자면 이 변신을 담고 있는 것은 판사의 선고이다. “피고에게 유죄를 선고한다”는 말, 즉 ‘피고’와 ‘죄수’를 잇는 판사의 선고에 그런 변형이 들어 있다. ‘피고’나 ‘죄수’를 규정짓는 물체적(corporeal) 상태가 아니라,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피고에 대한 판사의 선고는 그런 비물체적 변형(incorporeal transformation)[사건(event)]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선고 자체가 그런 변형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이기도 하다(그의 말은 단순한 ‘언표’가 아니라 ‘언표-행위’이다). 피고의 물리적 신체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선고는 중대한 변형(비물체적 변형=사건)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이 일어나면 ‘죄수’가 된 신체는 전혀 다른 규칙(코드)과 전혀 다른 공간의 규정을 받는다. 포도주와 빵을 주며 ‘이것은 내 피요 내 살이다’는 예수의 언명처럼, 그리고 그 언명이 불러일으키는 변형에 빗댈 수 있을까. 예수의 언표행위는 그것을 듣는 이를 예수처럼 변형시킨다.
 신체에 달라붙은 유령처럼 주코티공원에는 무언가가 달라붙었고 어떤 변형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리버티스퀘어가 되었다. 판사의 선고, 예수의 언명과 같은 말이 여기서도 울려퍼졌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지난 15일 경찰이 리버티스퀘어를 급습해서 점거자들을 몰아내고 다시 주코티공원으로 돌려놓았다(사진:bloomberg.com)

 물론 아무나 어느 때나 그런 말이 유령처럼 달라붙어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말이 어떤 거대한 성체변환, 어떤 비물체적 변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선포될 때의 상황과 배치에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특히 상황이 매우 고양되어 있을 때는, 위대한 성인이나 혁명가가 아니어도, 아주 어린 아이의 말조차 그런 변형을 낳는 언어가 될 수 있다(아주 건조한 환경에서는 작은 불꽃 하나가 거대한 불길로 바뀔 수 있다).
 몇몇 젊은이들이 던진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는 말 한마디는 ‘점거되어야 마땅할 장소’로서 ‘월스트리트’를 규정해버렸고, 그들의 언표행위에 이은 점거는 ‘주코티공원’을 단번에 ‘리버티스퀘어’로 바꾸어버렸다. 나무 한 그루, 벤치 하나 옮긴 것이 없지만 공원은 성체변환을 겪었다. 사실 ‘우리는 99%다’는 말도 그렇다. 통계적으로야 99%는 언제나 존재했다. 그것은 98%도, 70%도, 30%도 언제나 존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99%다’는 말은 ‘99%로서의 우리’를 창조해버렸다. 1%와 99%는 단순한 통계적 수치를 넘어서 명확히 식별되는 하나의 그룹이 되고 말았다. 여기 언론에서는 이제 ‘1%’가 지난 수십 년간 미국 전체 소득에서 차지한 비율의 추이를 계속해서 발표한다. 심지어 보수적인 공화당 인사마저 ‘자신은 99%다’는 말을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마치 맑스와 엥겔스가 아직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신체로서 구분되지 않았을 때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고 외치면서 현실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현실화시켰듯이 말이다. ‘인구’라고 하는 미규정적이고 미분화된 신체에서 하나의 신체를 구분해내는 언명, 어떤 변신이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우리는 99%다’는 슬로건(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명령어’라고 불렀다.)을 통해 일어난 것이다. 이 말은 그 안에 변형의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변형을 촉발하라는 요구이자 명령이다.

3. 점거와 철거, 그리고 재점거

그런데 지난 15일 이른 아침, 뉴욕의 블룸버그 시장은 경찰을 동원해서 리버티스퀘어를 급습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는 수정헌법1조에 의거한 ‘표현의 자유’가 있다며 크게 법을 어기지 않는 이상 점거자들은 계속해서 거기 머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15일 철거 후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공원 내 안전과 위생 문제가 걱정이 되어 전격적으로 철거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어느 코미디언은 안전과 위생이 문제였다면 주코티공원이 아니라 뉴욕을 철거해야 한다고 이 기자회견을 비꼬았다.).

점거자들을 내몰고 공원 물청소를 하는 모습. 뉴욕시는 과연 공원에서 일어난 비물체적 변형을 지울 수 있을까

 이른 아침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이 소식이 급히 퍼지면서 순식간에 수백 명(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온갖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트럭에 실었다. 도서관의 책들이 거리에 내던져졌고 주방의 물품들도 팽개쳐졌고, 텐트들이 찢긴 채 뒤엉켜 트럭에 실렸다. 미디어 센터에 있던 컴퓨터들도 일부 손실을 입었다. 항의하던 시민들 수십 명이 그 자리에서 바로 연행되었다. 그리고는 점거의 물리적 장소였던 공원에서 유령 같은 모든 흔적들을 지우려는 듯 물청소를 열심히 해댔다. 당시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이제 점거를 하고 있는 것은 경찰’이었다.
 경찰의 점거는 과거에 텅 빈 공간이었던 주코티공원이 사실은 미국의 경찰 권력에 의해 꽉 찼던 곳임을 뒤늦게 폭로하는 효과를 냈다. 다시 말해 주코티공원으로 상징되는 월스트리트라는 공간은 점거 이전에도, 자본과 국가경찰권력에 의해 점거 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게 보면 리버티스퀘어를 탄생시킨 이번 점거는 사실은 ‘재점거’였던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리버티스퀘어(혹은 다른 장소)를 어떻게 재점거(Re-Occupy)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애당초 처음의 점거 자체가 ‘재점거’이고 ‘탈환’이었다면, 재점거의 고민은 특별한 고민이라기보다 처음의 점거를 어떻게 반복할 것인지, 어떻게 새로운 형식 속에서 그것을 밀고 갈 것인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당황하고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네이션>과 <뉴스쿨>이 공동주최한 ‘토론회’(리포트 18을 참조)에서 점거 제안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패트릭(Patrick)은 ‘이번 점거의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이냐’는 사회자의 물음에 ‘리버티스퀘어 자체’라고 답했다. 사람들이 점거가 이루어지고 있는 물리적 장소로서 리버티스퀘어에 주목하면서, 이 운동을 이 공원에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 리버티스퀘어는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강조했다.
 지금은 묘한 국면이다. 이제 경찰이 리버티스퀘어를 철거함으로써 좋든 싫든 점거의 물리적 장소 문제는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보수적 폭스뉴스에서는 이제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사실상 끝났다고 선언했다. 정말 그럴까. 물론 물리적 장소는 운동에 있어 정말 중요하다. 물리적 장소가 없다면 슬로건은 유령처럼 겉돌 것이다. 성령은 신체를 찾지 못한 채 다만 ‘불온한 기운’으로서만 세상을 방황할 것이다. 그러나 패트릭을 말처럼 그것이 특정한 장소여야만 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경찰도, 보수 언론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장소만 철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시위 형태를 보면 그들의 예상이 맞아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 운동에 지도자도 없고, 단일한 요구도 없다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이들이, 운동이 단일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리버티스퀘어 철거 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시 그 장소에 모여 제너럴 어셈블리를 열고 있다

 물론 상황이 쉽지는 않다. 이제 뉴욕시는 점거를 쉽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은 ‘행동의 날(Day of Action)’에 맞춰 대규모 시위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곳 저곳에서 중소 규모의 점거들이 계속 이어질 것 같다. 학습 효과는 양쪽 모두에게 있다. 이번 점거의 유력을 알게 된 뉴욕시는 이제는 점거의 초동단계에서부터 강력 저지할 것이고, 점거의 방법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생각이 같은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중들은 여기저기서 행동에 나설 것이다.

응답 5개

  1. 현명호말하길

    아 맞다. 전 NYU 동아시아과 대학생입니다. 안그래도 금요일날 선생님하시는 세미나에 꼭 갈 생각입니다.^^ 들뢰즈 카타리의 책은 전부터도 읽고 싶었는데, 포인트를 집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페이퍼 다 쓰고 꼭 읽어봐야 겠어요!

  2. 고추장말하길

    제가 ‘결핍’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은연중에 ‘충족’, 즉 어떤 ‘완성’을 상정하기 때문입니다.(들뢰즈/가타리가 쓴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을 ‘결핍’으로 볼 것인가, ‘생산’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요 참고가 될 듯 합니다.) 저는 이번 OWS 운동이 결핍을 채우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완성’이나 ‘충족’을 재는 기존의 잣대 자체, 삶의 기본 모델 자체를 이동시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버티스퀘어에서 제가 받은 인상도, 그들이 새로운 삶의 형식을 실험해보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결핍의 충족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삶의 생산, 말 그대로 삶의 ‘이동’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본 구호 중 가장 맘에 드는 게 이겁니다. This is not a protest but a movement!
    그나저나 현명호님 뉴욕에 계시는가 봅니다. 혹시 이번 금요일 오후(1-4pm)에 시간되세요? NYU에 오시면 한 번 뵐 수도^^; (Conference Room, 7th Floor, 41 East 11th St)

  3. 현명호말하길

    “결핍”이 운동을 가지고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만 결핍 (저는 필요와 동의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어떤 방법으로 생산되었으면 그 과정을 어떻게 말로 풀어내서 설명할 것인지는 운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고 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떠한 상황에서 그 때를 맞느냐”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볼 때, 결핍과 대립되는, 혹은 결핍을 초월한, 혹은 결핍에 근거하지 않는, 노동/생산이란 개념이 잘 와닿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에 OWS 를 연결하는 문제도 그렇고요. 동시에 OWS 에서 참여하는 클래스메이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people 이 무언가를 시도하고 하는 것이 반드시 결핍에서 온 것 같지도 않고요. 근데 사실 결핍에 근거하지 않는 생산개념을 이해하기는 역시 어렵습니다ㅠㅠ

    정신없은 질문에 문맥을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추장 선생님 짱!

  4. 고추장말하길

    정말 긴 물음이네요^^ 물음이라기보다는 현명호님의 생각이 잘 개진된 주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잘 아시겠지만 답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에요. 물음에 걸맞는 긴 답변 씁니다^^
    먼저 미국 사회에 ‘결핍’이 있는가. 미국 전체로는 답하기 어렵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인들이 미국을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보는 게, 양극화 때문에 힘들어진 면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지 이제 겨우 1년이 되어가니 잘 모릅니다만, 적어도 미들클래스(여기서는 우리의 중산층이라는 뜻보다는 보통 서민 정도의 뜻인 듯 합니다)의 몰락은 분명해보입니다. 월가 점거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눈물겨운 사연을 가진 사람들 많아요. 뿐만 아니라 ‘결핍’(글쎄 이런 말을 써야하는지 모르겠지만)에 대한 정신적 충격은 다른 사회보다 더 클지도 모릅니다. 어느 상원의원은 부모세대보다 못 살게 되는 역사상의 첫 세대라고 부르더군요. 우리 부모세대들이 보통 그러잖아요, 젊은애들은 고생을 모른다고. 그런데 제가 어느 영국학생 글을 읽었는데, 이런 말을 하더군요. 부모들은 너무 편하게 살아서(대학도 거의 무상으로 다니고 취직도 잘 되고) 자신들 처지를 모른다고. 우리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라고. 그러나 사실 저는 ‘결핍’이 운동을 불러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라캉 읽은 사람들과는 생각이 다르지요. 현재 여기서 벌어지는 다양한 운동들(민중대학, 홈리스들의 스쾃, 대안마련을 위한 오픈포럼 등)을 보면, 결핍보다는 생산을, 무기력보다는 능력을 떠올립니다. 정말, 지금 굉장히 많은 위원회들이 생겨나서 다양한 분야에서 대안적 실험을 하고 있어요.
    둘째, 때가 무르익는다는 것. 여기도 역사적 논쟁의 오랜 전통이 있죠?^^ 맑스 이야기를 하셨으니 거기에 기초해서 말해볼게요.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 논법 중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는 항상 더 큰 위기를 낳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극복합니다, 하지만 더 큰 위기를 낳습니다. 자, 그럼 언제가 혁명의 때일까요? 맑스의 논법을 빌자면, 자본주의는 가장 잘 나갈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이기도 합니다. 가장 강할 때와 가장 약할 때가 함께 있다는 거지요. 그럼 그때는 혁명하기 좋은가요, 나쁜가요? 사실 어느 때라고 혁명이 보장되지도 않고 언제라고 배제되지도 않지요. 때는 항상 옵니다. 다만 그 때가 어떤 상황에서 오냐는 거지요. 우리는 ‘때’에 관여한다기보다 ‘상황’에 관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그 때를 맞느냐에 따라 혁명이 일어나기도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지나가기도 하지요. ‘나꼼수’에 대한 현명호님의 엄청나게 긍정적인 평가를 따른다면, ‘나꼼수’가 있을 때 그 ‘때’가 오는 것과 그것이 없을 ‘때’ 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답이 되셨기를…(사실 답이 없죠^^)

  5. 현명호말하길

    지젝이 말한 것 처럼, 월가점거 운동은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언어를 매개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주코티 파크에서 리버티 스퀘어로의 비물리적 변형이 일어났다고도 생각하고요. 하지만 궁금한 점은 지금 미국의 시대에 이 언어를 ‘욕망’ 할 정도의 ‘결핍’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나 아렌트 말은, 전체주의 운동이 어마어마한 침묵의 다수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극도로 원자화된 당시 독일 사회에서 개인의 불안한 심리상태에서 오는 정신적 안정의 결핍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중심에 나치의 유명한 선동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나꼼수의 김어준이 말하는 바도, ‘가카 덕분에’ 시대의 ‘거대한 결핍’이 생겨났다는 것이라는 데, 저는 나꼼수 현상은 바로 그 결핍을 충족 시켜줄 수 있는 언어를 바로 나꼼수가 제공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시대적 결핍이라는 것이 꼭 ‘가카’가 등장하기 기다려야 하는 건지, 적이 제 무덤을 파기를 기다려야 하는 건지,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붕괴하는 틀을 만들어 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막스랑 그람시가 공통적으로, 한 시대가 무르익을 때로 익으면 시대변화의 답이 저절로 나온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좀 막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부시가 퇴진하고 오마바가 집권한 것은 그 자체로 월가점렴 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걸까요? (물론 오바마가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부시보단 낫고, 그보단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는 다는 가정입니다.)

    선생님 글 정말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지난 번 답글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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