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옷과 시간의 패션쇼

- 홍진

“옷 좀 갈아 입어.”

날씨가 좀 추워졌다. 며칠 째 입어 소매가 꼬질꼬질한 하얀 후드티를 또 주워 입다가 짝꿍에게 혼났다. 히잉. 아이처럼 입던 옷을 벗고 그럼 뭘 입어야 하나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이상한 망상이 머리에서 뻗쳐 나온다. 세 가지 패션 전략을 가진 세 명의 인민 모델이 나의 망상에 짝을 맞춰 팔짱을 끼고 워킹을 시작한다. 포즈를 잡는다. 찰칵! 찰칵! 찰칵! 스따-일!

첫 번째 모델은 상의는 티셔츠, 하의는 봉제선이 뚜렷한 검정색 팬티스타킹만 훌렁 입고 스쳐 지나간 어느 초여름의 언니였다. 한때 유행하던 검은 레깅스(부드러운 쫄바지?)의 초저렴 궁상 버전이다. 스타일을 추구하는 언니들이 취하는 가장 보편적인 전략은 유행을 따르는 것인데, 미학적인 관점을 접고서라도, 거기엔 돈이 든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여기서 화통한 중국 언니들은, 돈을 쓰는 대신 원래 갖고 있던 팬티스타킹으로 레깅스를 대체한다. 처음에 상당히 어색하고 애매한 중국의 길거리 패션을 접했을 때는 ‘같은 값으로도 좀 예쁘게 입고 다니면 안 되나?,’ ‘저건 아무리 봐도 내복이잖아.’ 라는 안타까움을 가장한 거만한 마음이 있었는데, 중국 서민들이 옷에 쓰는 돈을 대충 알게 된 후 부터는 두고두고 그 생각이 부끄러워져 버렸다. 패션은 그저 상대적인 거다. 그 증거로 몇 년 후 한국에서 조우한 멋쟁이 처제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형부. 지금 그… 그 옷 당장 태워버려.’ 라고 신음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속옷도 적당히 옷으로 쳐주는 중국의 훈훈한 사회적 배경 또한 팬티스타킹 언니의 뒤를 봐주고 있다. 겨울에 체육관에 가면 겉옷을 벗고 얇은 살색 내복차림으로 배드민턴을 치는 아저씨들을 종종 상대하는데, 그게 땀에 흠뻑 젖으면 꽤 민망한터라 자꾸 흘깃거리다가, 일본 만화의 한 장면처럼 상대방에게 점수를 내준 기억이 있다. 슬리퍼를 신고 입식 생활을 하는 중국에서는 집안에서 입는 옷과 밖에서 입는 옷의 구분이 별로 없다. 몇 년 전, 먹고 사는 문제가 적당히 해결된 순진한 자칭 부자(사실은 부자 아님)들은 잠옷을 따로 사 입는 것을 과시의 수단으로 삼아, 굳이 잠옷 바람으로 등산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의 미지근한 중앙난방 시스템은 보일러가 펄펄 끓는 한국과 달라, 겨울에도 팬티차림으로 바닥을 굴러다닐 일도 없다. 집안과 바깥, 가족과 남의 시선, 속옷과 겉옷의 문화적 차별을 넘자! 스키장에서도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훌렁훌렁 내복차림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는데, 집 앞 슈퍼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그냥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보기 흉하지 않냐고? 엄청 야한 딥키스나 지하철에서 맛있는 음식 먹기처럼 박탈감을 조성하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최신 유행 아이템인 레깅스 바지, 여벌의 겨울 운동복, 스키장의 탈의실까지 아껴 버리는 비상업주의 패션 전략이다. 찰칵! 찰칵!

두 번째 모델을 소개한다.

“흑룡강성에 사는 최미자씨(57세)는 타지에 사는 딸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먼 길을 떠납니다. 혼자 남을 남편을 위해 며칠 동안 내내 빚은 만두 천개를 문 밖 광주리에 수북이 쌓아두었습니다.”

전후 사정만 있을 뿐, 옷에 대한 묘사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패션의 끝! 눈을 감으면 꽁꽁 언 만두 더미를 뒤로 하고 눈길을 걷기 시작하는 언니가 입었음직한, 세로로 투박하게 누빈 인민군 코트와 색 바랜 감색 목도리가 떠오른다. 길에서 인민군 코트를 보기라도 하면 흑룡강성의 그 언니 이야기가 생각난다. 언니는 남편을 걱정하며 떠났을까? 아니면 왠지 뭔가 후련했을까? 만두 천개를 먹으면 얼마나 질릴까?

옷은 몸이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문명의 겉껍질이다. 그런데 살거죽과 딱 붙어서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다 보니 그 경계선이 종종 애매해진다. 방심한 틈을 타 가슴과 턱뼈 등이 패션에 함락되고, 쪼꼬렛 복근과 S라인은 속옷 밑에 하나 더 껴입어야 하는 필수적인 옷이 되었다. 복근 하나 없는 내 두둑한 뱃살은, ‘그래 나는 노팬티다!’라는 가난한 노래의 최신 버전이다. 신체 안쪽으로 경계선이 무너져 버린 ‘패션 같은 인간’상을 되돌려, 다시 몸과 맞닿은 옷을 ‘인간적인 패션’으로 만드는 것은 주로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다. 고단한 생활에서 거듭 입어 헤진 옷엔 켜켜이 사연이 생기고 그렇게 드라마가 된다. 몇 년 전 중국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얼짱거지’ 청궈룽은 한 의류업체에 광고모델로 발탁되었다. 남루한 옷차림을 벗기고 멀끔하게 만든 그의 모습은 상업주의가 표백해버린 드라마, 결국 이전과 똑같은 식상한 광고일 뿐이었다. (옆에 저 다리는 뭘까?)

상업적인 유행도 따르지 못하고, 패션센스도 떨어지는 나에게 남은 패션은 단지 인간적인 의미부여 뿐이다. 그래 이 티셔츠는 친구가 보내준 콜트콜택 투쟁 티셔츠. 이 옷은 몇 번째 여자 친구와 갔던 영화제 기념품 등등. 푼돈들의 로맨스 조가 즐겨 쓰는 선글라스는 아버지가 젊었을 때 쓰던 라이방, 혹은 헤어진 애인이 예전에 골라 줬던 남방이 품어온 시간과 이야기가 패션을 완성한다. 찰칵! 찰칵!

세 번째 인민 모델로 내가 뽑혔다. 처음에 별거 없으면서 괜히 세 명이라고 해서 그렇다. 언젠가의 술집. 뭉근한 기타소리에 실려 흘러간 그저 그런 시시껄렁한 대화가 떠오른다.

“에릭 클랩튼이 해외 공연 다닐 때 꼭 들리는 곳이 어딘지 알아?”

“글쎄, 그 나라의 기타 파는 곳을 구경? 멋진 음악이 나오는 술집?”

“옷가게야. 인생을 아는 놈이지.”

옷은 매일의 문명사회와 만나는 첫 번째 대화다. 나는 문학작품을 읽을 때 ‘감색 스웨터에 파란 목도리’가 주는 색감의 느낌을 곱씹어 즐기고 소비하지만, 막상 내 몸뚱아리에 걸치고 있는 옷에는 적극적인 표현과 자기 방어를 잃은 지 오래 된 평범하고 수줍은 인간이다. 자본주의가 독점적으로 만들어낸 패션에 대한 이미지가 내 발언권과 나르시시즘을 빼앗아 갔다. 같은 처지에 있는 인간이 의외로 꽤 많지 않을까?

이에 대한 탈환 작전은 역시 저렴한 아이템으로 나의 내면과 의지를 표현해 보는 것이다. 요통으로 고생하던 한 기타리스트 친구는 매번 할머니의 색이 고운 분홍색 가디건이나 보라색 땡땡이 몸빼 바지 등을 빌려 입고 나오곤 했는데, 그것 참 그럴듯한 예술가처럼 보였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부러워했지만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이 섣불리 시도하다가는 망신을 당할 수도 있어 따라 하는 것은 참아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필리핀의 시골 해변에 도착한 나는 히피들이 입을 것 같은 헐렁한 천쪼가리 바지를 사입고 좋아했다. 나도 약소하나마 빼셔니스트가 되었구나! 마찬가지로 헐렁한 바지를 입은 프랑스 히피 할아버지와 죽이 맞아 술을 마시거나 바카몬을 두며 친해졌는데, 어느 날 해변에서 할아버지가 훌훌 벗고 자유롭게 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순간, 할아버지의 날렵한 궁뎅이를 솜씨 좋게 가린, 때가 꼬질꼬질한 천조각이 말없이 히피를 인증했다. 헐렁바지 안에 공산품 빤쓰를 입은 가짜 히피인 나는 즉시 패닉 상태에 빠졌었다. 하지만 계속 시도하리라.

이래저래 패션의 시대다. 홍수다. 나쁜 사람들이 빼앗아 간 패션의 즐거움을 다시 찾기 위해, 부정하고 싶은 거울 속 내 몸뚱아리를 소중한 척 응시한다. 상업적이진 않지만 인간적인 패션을 위해 잊지 않고 조금 더 노력해 볼 생각이다. 옷과 시간이 내 존재의 패션쇼가 된다. 소매가 꼬질꼬질한 하얀 후드티는 한번만 더 입고 빨기로 했다. 찰칵! 찰칵! 스따-일.

응답 1개

  1. 말하길

    푸하하. 재밌어요. 서울서 봤던 홍진의 기상천외한 몸빼 스타일이 떠오르네요. 왠지 중국 사람들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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