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식민지 면장 노릇 – 수원 장안면장 김현묵의 3·1 운동

- 권보드래

수원 장안면장 김현묵은 3·1 운동 당시 34세였다. 장안면 토박이였고, 1910~11년에 경무학교를 다닌 후 졸업해 순사가 되었다. 1년 동안 순사 노릇을 한 후에는 다시 측량학교에서 반 년 간 공부한 후 인접한 우정면에서 겨냥도[見取圖] 그리는 일을 했다. 토지조사사업의 일환이었으리라. 1915년에는 장안면사무소 서기로 취직했다. 면장이 된 것은 3년여 후. 전임 면장이 병으로 사임한 후 직위를 이어받았던 것이다. 순사, 측량기수, 그리고 면서기에 면장― 김현묵의 행적은 1910년대에 식민통치를 입신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했던 범부(凡夫)의 생애를 잘 보여주고 있다. 큰 자리는 허락하지 않았으되 식민지 경영을 위해 자잘한 직위를 확대했던 당시 총독정치 하에서, 순사(보)·측량기수·면서기는 보통학교 교원과 더불어 ‘식민지인의 유사 관직’ 4종에 속해 있었다.

‘병합’을 전후해 순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20대 청년 김현묵은 그 전엔 어떻게 살았을까. 심문조서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글쎄, 열혈 애국청년이었을지도 모르나 대체로는 평범한 생활을 그려봐도 좋을 것 같다. 1910년 8월 29일을 비극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기회로서 받아들인 게 아닌가 생각해 봄직하다. 어쨌거나 1919년 봄이 닥쳐올 때까지 김현묵은 모범적인 식민지 신민으로 살았다.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부지런히 좇아다니고, 마을 사람들을 달래고 적당히 윽박지르며, 순사에서 측량기수로, 면서기로, 다시 면장으로 성공적인 변신을 거듭하면서.

급작스런 변화가 닥친 것은 1919년 4월의 일이다. 3월 1일 서울과 몇 군데 대도시에서 점화된 시위가 수원 지역에서 본격화된 것은 4월 초. 4월 2일에 이웃 여러 마을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는 등 낌새가 자못 수상했던 끝에 3일엔 마침내 장안면에서도 사람들이 모였다. 김현묵의 진술에 따르면 면사무소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데 몇 명이 안으로 들이닥쳤다고 한다. 반들반들 닦인 면사무소 마룻바닥을 흙발로 더럽히면서 당장 밖으로 나오라고 위협했단다. 밖에는 이미 수백 군중이 운집한 상황이었다.

이때부터는 진술이 엇갈린다. 김현묵에 따르면 마을사람들이 때려죽인다고 협박하면서 만세를 부르라고 하기에 몇 번 만세 부른 일밖에 없었다고 한다. 연설을 하라고 을러대기에 마지못해 두어 마디 했고, 이웃 우정면으로 향할 때 깃발을 들라고 해서 엉겁결에 든 것이 다였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의 증언은 다르다. “만세를 부르려면 단호하게 하라, 열심히 하라, 가령 총에 맞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하라.”며 군중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우정면 가는 길에서도 곧 경찰이나 헌병이 닥칠 것인데 앞사람 시신을 밟고서라도 전진할 뜻이 있냐고 재우쳐 물었다고 한다. 이윽고, 2천여 명으로 늘어나 우정면에 도착한 사람들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일본인 순사를 돌로 쳐 죽였다.

김현묵은 이 직후의 소란 중에 대열을 이탈, 부근의 형 집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두 통의 편지를 써서 남겨둔다. 한 통은 ‘진실한 보고서’, 한 통은 ‘거짓 편지’였다는 것이 김현묵의 말이다. 두 갈래 길을 봤던 셈이다. 그리곤 수원군청에 나가 상황을 보고했다. 경찰에 가서도 똑같은 보고를 했으나 여기선 체포와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의 불길이 지나간 후 일본 헌병과 경찰이 혹독하게 보복을 자행하고 있던 중이다. 가까운 수원 향남면 제암리에서의 학살이 특히 처참했지만, 장안면에도 헌병대가 출동해 수십 명을 무차별 구타하고 체포했다. 인가 몇 채는 불살라 버렸다. 기소된 사람만도 스물일곱에 달해 당시 이 사건은 ‘김현묵 외 26인의 수원 사건’으로 불렸다.

총독부가 새로 만든 행정구역, 예전의 자생적 촌락 질서에 대비되는 면(面)의 책임자로서 김현묵이 보인 행적은 흥미롭다. 3·1 운동 와중에, 면장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엇갈렸다. 시위 군중이 면장을 앞세우려 한 것은 어디서나 공통적이었으나, 적극적으로 시위를 주도한 면장도 있고 끝내 협조를 거부한 면장도 있다. 수원 성호면의 면장은 끝까지 만세를 부르지 않고 배겨냈다고 한다. 김현묵은 중간쯤에 서 있었던 셈이다. 출세하려는 욕심이 있었기에 욕구불만도 그만큼 컸던 탓인지, 아니면 총독정치가 잠재적 협력자마저 돌려세울 정도로 폭력적이고 차별적이었던 탓인지, 막상 시위에 합류하자 김현묵의 선동은 거침없이 터져 나왔지만, 이탈한 후에는 재빨리 보신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어쩌면 김현묵은 내내 신중하게 운동의 추이를 점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체포되고 근 2년 후, 김현묵은 무죄로 풀려나온다. 1심에선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심에서 무죄로 번복된 덕이다. 27인의 피고인 중 풀려난 것은 둘뿐이었다. 15년형이 두 명, 12년형이 세 명 등으로 중형 선고가 많은 사건이었으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다. 두 길 보기가 최악의 결과는 막았다고 해야 할는지. 김현묵의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3·1 운동 당시 지방 시위의 꼭짓점에 서 있었던 구장이나 면장 일반이 1920년대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권력 말단의 하급 관리 계층이 변동의 시기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그들에게 민족이란 어떤 가치였을는지, 조금씩 풀어야 할 궁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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