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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오싹한 아이들, 당신의 책임은?

- AA

<백야행>은 추리소설의 대가로 유명한 일본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원작소설을 드라마화한 작품이다. 2006년 방영되었으며 국내에서는 2009년에 영화화되었고 일본에서도 2010년 다시 영화로 만들어졌다. 원작은 지독하리만치 건조한 ‘추리소설’이었으나 드라마는 사건 그 자체보다 소설에서 생략된 채 문장 너머에 아스라이 느껴지던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완성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이는 드라마의 제작진이 이미 이전부터 그 능력을 발휘했던 부분이다. 이전 소개했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서 말이다. 주연배우를 포함하여 각색가, 연출가, 프로듀서, 심지어 주제가를 부른 가수까지도 <세상의 중심…>와 같아 드라마는 방영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자세히 소개하기에 앞서 미리 조심스러운 경고를 하자면, 드라마도 원작소설도 보고 나면 ‘하아…’하는 한숨과 함께 당분간의 일상을 우울하게 만들 위험이 있음을 밝혀둔다.

1991년 겨울, 키리하라 료지와 니시모토 유키호는 서로를 위해 각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다. 그리고 세간의 이목상 피해자의 아들과 가해자의 딸인 자신들이 친하게 지내면 범죄가 발각될 수 있으므로 세상이 사건을 잊을 때까지 완전한 타인으로 지내기로 약속한다. 이 모든 것을 저지른 두 아이들은 고작 초등학교 3학년, 우리나이로 10살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98년. 과거의 사건이 파헤쳐질 위험에 처했을 때 둘은 다시 만나게 되고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시효를 1년 앞둔 2005년 겨울, 14년 전의 사건 이후 줄곧 그들을 쫓던 형사 사사가키가 읊은 둘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존속살해, 부녀자 폭행, 사체 손괴, 허위공문서 제출, 신분증 위조, 현금카드 위조, 살인 방조, 소프트웨어 위조, 또 부녀자 폭행, 또 살인, 위조 공문서 행사죄, 영업비밀 부정 취득죄, 스토커 규제법 위반, 독극물 취급법 위반, 또 살인, 그리고 살인 미수.

줄거리만 보면 오싹한 아이들이다. 고작 10살짜리들이 존속살인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14년 동안 그 죄를 덮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죄를 저지르다니, 패륜아도 이런 패륜아가 없다. 더군다나 한 명도 아니고 쌍으로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칼에 두 아이에게 낙인을 찍게 만들지 않는다. 어째서 이 아이들이 끊임없이 잘못된 선택을 해왔는지, 그리고 그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고 겪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린 유키호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극심한 가난 속에 유키호가 가진 유일한 것은 엄마였다. 하지만 그 엄마는 주정뱅이인 것도 모자라 부모라는 이유로 어린 자신에게 ‘자식의 쓸모’를 다 하라며 매춘을 시키는 포주였다. 아버지뻘 되는 어른들의 손에 유린당하여도 속수무책이다. 고작 10살짜리가 엄마를 피해 집을 나가봤자 갈 곳은 없다. 결국은 집으로, 자신을 파는 엄마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료지 역시 웃을 일이 없는 아이였다. 료지의 엄마는 아버지 가게의 점원 마츠우라와 불륜 관계였다. 료지는 매일 엄마와 마츠우라가 시시덕거리는 창고 앞을 지키고 앉아 있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료지는 얼른 창고의 문을 두드려서 아버지의 귀가를 알렸다. 누가 가르치지도, 시키지도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습득한 어린 아이의 생존방식이었다. 두 아이 모두 친구나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안고 있었기에 좀처럼 웃지도 않았고, 늘 혼자였다. 가족에게 사랑받아야할 나이에 외로움을 느끼던 두 아이들은 동질감을 느끼고 가까워지며 서로가 있어 웃게 된다. 하지만 유키호가 늘 그랬듯 엄마에게 매춘을 강요받아 끌려가고, 다름 아닌 료지의 아버지에게 유린을 당하던 날, 료지가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료지는 엉겁결에 아버지를 찔러 죽이고 만다. 유키호는 자신을 구한 료지가 살인범인 것이 발각되지 않도록 자신의 엄마를 용의자로 만든 후 자살로 꾸며 살해한다. 살인, 강간 등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두 아이가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시효가 끝나면 서로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던 그 시절처럼 진짜 태양 아래에서 당당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 아이가 저질렀다고 믿기 힘든 무서운 죄를 짓고도 바랐던 소망은 처량하리만큼 아이다워서 그 명징한 간극으로 주인공들에 대한 감정적 거부감이 일부 상쇄되기도 한다. 첫 회에서 10살짜리 아이들이 작별하는 씬, 그리고 2회에서 7년이 지난 뒤 재회하는 씬 등 초반부에 미리 감정의 클라이막스를 터뜨린 후 전개하는 영리한 구성도 시청자로 하여금 계속하여 주인공에게 동정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다. 원작소설의 주였던 추리 대신 드라마는 감정을 주로 표현하여 원작소설의 팬들은 드라마가 너무 감정적으로만 흘렀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TV드라마로서의 스탠스를 잘 잡았다고 할 수 있다.

14년 동안 똑같은 범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며 죄목을 늘였지만 바랐던 것이 그저 한낮의 거리를 함께 걷는 것이었던 것처럼 둘은 14년 전 그 날에서 조금도 자라지 못한다.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 그대로 성장을 멈춘 주인공들을 보며 부모, 어른, 가정, 그리고 사회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두 아이들의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죄를 지었을 경우 용서를 구하는 방법, 사람을 믿고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상이 있었다면. 태양으로 상징되는 각자의 부모를 스스로의 손으로 죽인 뒤 둘은 서로에게 가짜 태양이 되어 서로의 밤길을 밝혔다고 믿는다. 존속살인의 범죄를 누구와 공유할 수도, 그 상황을 이해해달라고 할 수 없었던 어린 아이들은 서로 밖에는 기댈 곳이 없었다. 둘만이 공유한 비밀이 늘어날수록, 둘의 인연이 깊어질수록 세상과는 점점 단절되어 갔다. 한낮의 진짜 태양은 가지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자 피하고 싶은 버거운 진실이었기에 그저 가짜 태양이 뜬, 백야의 어둠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선택의 순간에 결국 늘 ‘죄를 짓는 쪽’을 택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비춰줄 대체적 태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밀을 지키면서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도와달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렇게 하는 게 맞느냐고 말이다.

 14년 전에 죽은 료지의 아버지와 유키호의 엄마를 제외한 주변의 어른들은 진실을 알고 나서 자신을 책망한다. 료지의 엄마는 아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모른 척 했기 때문에 아들이 내내 아버지를 죽인 그 좁은 곳에 갇혀 있었다며 끝내 자살한다. 유키호의 양어머니는 좀 더 다그쳐서라도 마음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며 자신의 목숨을 두 사람에게 맡긴다. 14년 전 풋내 나는 커플이었던 둘의 모습을 본 도서관 사서 타니구치는 자신이 아이들의 신호를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라 눈물을 흘린다. 둘의 범행을 밝히려 모든 것을 걸었던 형사 사사가키는 말한다. 사람을 죽일 용기가 있으면 자수할 용기도 있는 것이고 사람을 속일 머리가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을 생각할 머리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애초부터 둘은 다 알고도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동정의 여지가 없다. 다만 책임이 있다면 14년 전, 그 아이들을 잡지 못한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은 결국 같은 것을 바란다. 두 사람이 그만 백야에서 벗어나 죗값을 치르고 편안해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 그들의 구조 신호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내 자신들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기에 주위 사람들의 구출 신호를 거부한 것은 결국 두 사람 자신이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애초 그들이 그 작은 세상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게 된 계기가 없었다면… 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 결국 대상 부모, 가정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은 비겁한 일임을 알게 된다. 이 드라마를 보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다. 그 부모가 그렇게 된 이유, 또 그 부모의 부모가 그렇게 된 이유까지 올라가면 결국 사회와 시스템의 근본적 문제가 있고 이는 곧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 즉 드라마를 보고 있는 시청자 개인, 개인에게도 주인공들을 파멸로 이끈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료지는 유키호를 위해 사사가키를 죽이고, 가장 확실한 증인인 자신도 죽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부디 아이들에게 진정한 벌은 마음과 기억 속에 남는 것이라고 전해주세요.

자신이 삼킨 죄는 영혼을 잠식해가고 이윽고 몸과 생명조차 먹어치울 거라고.

부디, 그렇게 되기 전에 부모님들에게 전해주세요.”

드라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설이 한 편 있다.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다. 형사 사사가키가 둘 사이에 비밀이 있음을 눈치 채는 것도 바로 이 소설의 문고판이 두 아이의 책상에 나란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아이들은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을 따라할 대상으로 삼는다. 유키호는 타라를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남는 스칼렛을 동경했고 료지는 그런 스칼렛에게 부를 안기고 그녀에게 이용당하는 레트가 되고자 했다. 그리고 둘은 소설 속 주인공의 행보를 비슷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유키호에게 있어 료지가 뒤늦게 깨달은 사랑인 레트였는지 아니면 지키고 싶은 타라 그 자체였는지는 각각 다른 TV판과 DVD판의 엔딩으로 묘하게 결론이 엇갈릴 수도 있겠다.

덧붙여,

최근 국내 뉴스 중에 이 드라마와 겹치는 사건이 있었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우리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을 만나면 헤어질 때 꼭 하는 말이 있다.

“공부 열심히 해, 엄마 말 잘 들으렴.”

과연 대한민국에서 이 두 문장 외의 다른 말로 아이에게 인사를 건넨 어른이 몇이나 있을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인사가 된 이 두 문장. 당신도 많은 어른들에게 들으며 자랐을 것이고, 어른이 된 당신이 바로 어제 만난 아이들에게 했을 말이다. 저 문장들 속에 아이들에 대한 응원과 배려 대신 통제의 폭력이 숨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민한 반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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