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가치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자, 홍아야, 그렇다면 안경의 색깔을 단일하고 옅게 만들고 그리고 굴절을 일정하고 작게 다듬어 가는 방법이 무얼까 알아보자.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과정이므로 진선미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당면한 사물이나 상황에서 진선미가 드러나도록 질문을 잘 만들어야해. 그리고 질문으로 얻은 진선미에 대한 개념이나 정보나 지식이나 공식 또는 이론을 머리에 저장할 때는 고정관념에 불과했던 개념, 정보, 지식, 공식이나 정리, 또는 이론을 수정해야지. 이 수정은 기존의 관점(인식체계)를 깨달음에 맞게 재체계화하고 재구조화하는 거지. 그래서 인식체계를 넘어 결국 운영체제(생명 또는 영혼)까지 수정하는 거야. 음식을 먹어 영양분으로 내 몸을 언제나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경험이라 불렀듯이 질문으로 깨닫고 그 깨달음을 제 자리에 저장하여 인식체계와 운영체제를 새롭게 만드는 것을 경험이라고 하자. 이렇게 경험을 축적하면 경험이 경험을 가져와 더 높은 수준의 경험을 하게 되는 동안 우리 안경(눈,관점, 인식체계)의 점점 색깔과 굴절이 사라져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진선미)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을 거야,
 
물론 태어나서부터 축적된 자기 경험으로 만들어진 자기의 안경으로만 보아야 하는 인간은 축적된 경험의 한계 때문에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 어떤 인간도 안경을 벗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순간적인 인생이라 경험의 현실성은 보잘 것 없으나 우주의 진화과정이 고스란히 축적된 인간의 경험가능성 속에는 이성과 감정과 의지 등의 경험 가능성이 들어 있단다. 그렇기에 인간의 경험 축적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부족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성적으로 추리나 상상하며, 감정적으로 이입하여(당사자로 분장하여 그의 감정을 받아들임) 공감하며, 의지적인 역지사지(易地思之-입장 바꾸어 생각하기)로 상대의 의지를 헤아려 인간과 사물의 본질(진선미)에 가깝게 우리의 경험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아브라함 매슬로우의 욕구의 위계를 색깔로 나타낼 수도 있어. 생리적 욕구 – 빨강, 안정성 욕구 – 주황, 소속감 요구 – 노랑, 자아존중 욕구 -초록, 자아실현 욕구 – 파랑, 자아 통합 욕구 – 남색, 자아 초월 욕구 -보라. 이 위계를 보면 생리적인 욕구에서 시작하여 점차 자신의 경험 가능성을 확장시키려는 욕구에 따라 욕구 대상이 달라지며 그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와 그에 따른 색깔도 달라짐을 알 수가 있지.
 
진 겝서의 세계관의 발달의 과정에서 태곳적(신생아가 꿈을 꾸는 상태) 단계, 마법적(주술이나 마술이나 요술 등 신비한 힘이 지배하는 세계) 단계, 신화적(초월적인 신이 지상에 개입하여 천지를 창조한 세계관이나, 나라를 건국했다는 국가관) 단계, 합리적(초월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이성과 경험에 따른 세계관) 단계, 다원적(문화마다 생활양식과 가치가 다름을 인정하는 세계관) 단계, 통합적(서로 다른 문화에서 공통되는 장점으로 재조직된 이상적인 세계관) 단계, 초월적(이성과 경험을 넘어서 직관적인 깨달음의 세계관) 단계도 위계에 따라 색깔로 구분될 수 있어. 세계관이 다른 것은 세계를 구성하거나 지배하는 궁극적인 실재(마음, 물질, 정보, 문화, 에너지나 힘 또는 권력, 돈, 성:性 등)로 믿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고 바로 그 궁극적인 실재 그것을 궁극적인 가치로 보고 그것을 추구하려하기 때문이야.
 
앞에서 욕구와 세계관의 발달과정을 소개했고 참고로 여러 학자들의 인지, 가치관, 자아-정체성 발달 과정을 더 소개할 게. 여기서 사용되는 용어와 그 내용들은 지금 몰라도 차츰 알게 될 거야. 네가 알 것은 첫째 어떤 발달 과정이든지 경험이나 자유, 의식의 확대 과정이라는 것과, 둘째 그 과정은 포월적이고 위계적이라는 것과, 셋째 이러한 위계적인 발달에 따라 하위 단계의 고정관념이 만든 색깔과 굴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과, 넷째 하위 단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수록 차츰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적이고 영속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키몬스와 리차드의 인지발달 단계
감각운동 단계 → 상징적 조작 단계 → 개념적 조작 단계 → 구체적 조작 단계 → 형식적 조작 단계 → 다원적 조작 단계 → 패러다임 횡단적인 사고 → 조명된 마음 → 직관적인 마음 → 오버 마인드 → 수퍼 마인드,
그레이브스, 스파이럴 다이나믹스 웨이드의 가치관 발달 단계
마법적인 가치 → 자기 중심적 가치 → 절대주의적인 가치 → 복합적인 가치 → 상대주의적인 가치 → 시스템적인 가치,
뢰빙거와 쿡, 그로이터의 자아-정체성의 발달 단계
상징적 자아 → 충동적 자아 → 자기 보호적 자아→ 순응적 자아 → 양심적 자아 → 개인적 자아→ 자율적 자아 → 구성적 자아 → 초월적 자아.
 
우리말에서 진(眞)을‘참이다’하고 선(善)을‘참되다’하고 미(美)를‘참하다’한다. ‘차다’라는 어원은 태어날 때는 없었던 우주적인 가치(진선미)가 경험에 따라 그 사물 안에 들어와 가득하다는 뜻이야. 이와 같이 우리말에 나타난 가치 인식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이든지 차있는 정도만큼 이 진선미의 가치 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야. 세계의 다른 주요 언어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진, 선, 미는 실재하는 가치란다. 진(眞)은 3인칭 대상‘그것’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로 드러나며, 진리에 비추어 자연과 사회와 인간의 참 모습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이용하여 우리의 삶에 이익을 얻거나 편리를 누릴 수도 있어. 선(善)은 2인칭 대상인 너/우리를 보다 더 잘 살리려는 노력을 뜻하며, 서로의 삶에 보탬이 되는 관계를 가지도록 도와주지. 미(美)는 보는 주체인 1인칭‘나’의 눈(미의식)이 사물의 조화를 보거나 표현하여 나를 기쁘게 한다.
 
인간이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지닌 경험의 가능성만큼 자유롭기 때문이야. 자유가 없다면 어떻게 ‘생각한다’는 의식 활동이 가능하겠으며 경험이 가능하겠니. 그런데도 어떤 뇌 신경학자들은 자유를 착각이라며 결정론을 주장하가도 해. 이를테면 임의의 숫자를 선택하는 자유조차도 어떤 숫자를 고를까하고 무의식 층의 경험을 검색하기 위해 시냅스 사이에 전기 신호가 오고가는 실험으로 자유란 이미 깔려있는 회로에 따른 결과이므로 환상이고 착각에 불과하다는 거야.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 의식이란 신경세포 사이의 전기 신호의 흐름이라는 물질들 간의 상호작용이라고 주장하며, 미시적이고 단편적인 실험의 결과로 의식조차도 물질의 상호작용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유물론적인 결정론이 오늘날 대세를 이루는 것 같아. 그래서 ‘나’라는 자의식은 뇌 속의 모듈(기계의 부품이나 시스템의 구성 단위)들의 통합이라는 우연한 선택이 만든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언어중추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거야. 그렇다면 언어중추가 있는 신피질 자체가 없으므로 ‘나’라는 말을 쓰지 않는 개는‘나’라는 말을 쓰지 않으니까 자신을 환상으로 여기고 보호하지 않는가. 또 그렇다면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차원에서 동물과는 달리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생각할 수 있다는 자유의 힘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환상이나 착각으로 들릴까. 나는 최근의 실험적인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미시적이고 단편적인 성과들이 축적되어 의식이 생성되는 전 과정을 밝히고 자유가 존재하는지 판단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래. 그러나 전 과정에서 극히 일부분이 밝혀졌다고 해서 거꾸로 전 과정을 밝혀진 단편적인 사실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드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는 없어.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좀 더 거시적인 증거로 인간의 문명을 가지고 판단해보자. 오랜 진화 과정에서 일찍이 없었던 인간의 문명은 결코 동물들이 흉내낼 수 없다는 걸 너도 알지. 만약에 동물과 인간의 생활양식이 다르다면 예컨대 아메바나 원숭이와 인간의 생활양식의 차이만큼 인간에게 폭넓은 선택지 즉 선택 가능성-경험가능성-의식-자유가 이미 주어졌다는 게 아니냐. 결코 동물들은 본능적인 프로그램을 벗어나서 인간의 자유를 흉내낼 수 있는 자유가 없었던 거다.
 
만약에 인간의 자유가 동물들 정도라면 인간의 가능성도 그 정도여서 욕구에 따라 현재 상황에 대한 반응만 가능하며 과거를 떠올리거나 미래를 추리 상상하진 못했을 게다. 동물처럼 진선미를 경험할 자유가 많지 않기 때문에 진선미를 경험할만한 사고 활동 자체가 불가능했었어. 인간의 사고 활동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자유 때문에 가능하니까. 그 대신 동물의 가족 간에 본능적인(직관적인)선행을 하거나 짝의 생김새나 빛깔이나 소리나 냄새나 크기 등 나름대로 아름다움에 끌리는 직관은 가지고 있는 정도의 자유는 있었겠지.
 
행동의 자유는 환경에 제약되지만 진선미를 경험하기 위해 생각하고 판단하여 선택한다는 의식 자유는 이상을 추구할 수 있을 정도로 훨씬 넓은 거지. 컴퓨터의 알고리즘(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잘 정의된 동작들의 유한 집합)에 따르면 정답은 하나이며 실수가 없지만 컴퓨터에는 의식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실수투성이인데도 의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이미 축적된 프로그램인 본능이 그들의 경험가능성과 자유와 의식의 범위지. 그러나 의식의 자유가 훨씬 많은 인간은 상황에 따라 본능을 거슬러서 판단하고 행동하기도 하잖아.
 
인간의 진화를 가속시킨 것은 주어진 의식의 자유만큼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고 다시 축적된 경험으로 진화를 가속시켜 더 많은 가능성(의식의 자유)을 얻는 되먹임 즉 선순환 때문이었어. 그러나 거의 모든 인간이 고정관념에 빠져서 더 나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경험의 현실성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뿐만 아니라 이 자유 즉 가능성 때문에 엉뚱한 선택으로 인간만큼 거짓을 일삼고 위선에 빠져서 추악할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리고 또 하나, 만약에‘나’라는 자의식이 뇌 속의 그 수많은 모듈들이 우연한 통합으로 만들어진 환상이라 하더라도 뇌신경학자들이 굳이‘통합’이라는 표현을 쓰려고 한다면 그 결과로써 하나의 통합된 운영체제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환상이나 착각일까. 버드나무는 꺾꽂이해도 각각 개체로 살 수 있으며, 지렁이가 잘라져도 각각 개체로 살 수 있으니까 그런 것들 속에 신경세포가 있으나 그것을 통합하는 중추신경이 분산되어 있을 것이다. 아! 좋은 예가 대나무 숲이란다. 숲이지만 뿌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대나무라고도 말할 수도 있지. 그러므로 대나무 숲에는 전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중심이 없다고도 볼 수 있어. 중심이 개별 대나무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인간은 생리와 의식의 통합 운영체제가 존재하는 신경조직으로써 오로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뇌가 있으므로 지체가 절단되면 척추의 자율신경계나 뇌의 지시를 받을 수 있는 쪽만 살 수 있고, 최종적으로 심장사가 아니라 뇌사로 사망을 선고한다. 물론 혈액 공급의 중추는 심장이나 심장도 자율신경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에 따른다. 이러한 통합성을 진화에 따른 의식의 생성의 전 과정과 구조을 조망하지 않고 미시적으로 뇌의 특정 부분에서 전기 신호를 확인한 실험만으로 자유나 의식의 가치를 설명할 수 있을까.
 
곡선도 짧게 끊으면 직선으로 보이지 않는가. 진화나 발전이나 성숙의 전 과정이 경험 가능성이나 의식이나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는 목적을 가진다는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모두가 우연의 결과지 방향이나 목적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환상이고 착각이라고 주장할까. 만약에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면 나의 범죄는 뇌에 이미 우연히 배선된 회로에 따른 결과이므로 자유의지 없는‘나’와는 상관 없으니 ‘나’가 책임질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이때 책임지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나’는 대체 내가 아니고 무엇인가. 책임지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조차도 환상이고 착각이라면 윤리적 주체가 없다는 말인가.
 
하버지는 그러한 미시적인 실험의 결과들이 축적되어 언젠가는 의식 생성의 전 과정이 밝혀지고, 인간과 만물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기 결정성이라는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있었으면 속이 후련하겠다. 개나 쥐 따위에게도 조건반사 실험을 할 때 경험이 축적되면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조차도 인간과 다르지만 수많은 반복 경험을 떠올리는 아주 낮은 수준의 자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자기의 의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자의식이 동물들에게도 있다한들 어찌 인간 수준의 가능성과 비교 되겠니. 동물의 진화과정에서 축적된 무의식(본능)으로 현재적인 상황에만 반응하는 동물의 자유와 단 한 번의 과거 경험도 떠올릴 수 있고 미래도 추리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가 같이 놓고 비교할 수 있을까.
 
아무튼 우주가 혼돈의 상태가 아니라 단위 존재들이 그 단위 생성에 필요한 질서에 따라 차례대로(위계적으로) 생성되는 것을 보면서 하버지는 모든 단위존재들은 그 단위까지 축적된자기 결정능력(경험 능력)이라는 직관적인 의식과 그에 따른 자유가 있기 때문에 생성이 가능하다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적이고 과정적이며 사건적인 물활론적 형이상학을 믿는단다. 만약 자기결정능력이 없다면 우주는 완전한 혼돈 상태일 거야. 이를테면 원자가 100여개만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어서 태양처럼 수소와 헬륨만으로 혼돈 상태일지 아니면 끝없이 많은 원자들이 생성되고 소멸하여 그 어떤 사물도 일정한 성질과 형상을 유지할 수 없는 무질서는 질서에 익숙한 우리들이 상상하기도 불가능하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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