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밥그릇과 밥상

- 박정수(수유너머R)

밉상스런 이권(利權) 다툼할 때 관용적으로 “밥그릇 싸움한다”고 표현합니다. 또 누군가 정당한 권리 주장을 할 때 “밥그릇 보전하려고…” 라며 나무라기도 합니다. 참 나쁜 표현입니다. 밥과 이권을 뭉뚱그리면서 권세욕도 다 ‘먹고 사는’ 노릇으로 합리화하고, 정말 먹고 살기 위한 싸움을 이기적인 이권다툼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교묘함이 숨어 있는 관용구입니다. 밥과 이권은 전혀 다른 겁니다. 이권을 비유하는 ‘밥그릇’에는 밥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자본과 권력, 즉 타인의 밥을 뺏을 권리가 담겨 있지, 대지의 쌀로 지은 밥은 거기 없습니다. 쌀 사 먹는 돈과 (타인의 노동력을 구매하거나, 부동산을 사거나, 돈 빌려 주거나, 증권을 사서) 이윤을 따 먹는 자본이 겉모습은 같지만 본질은 다른 것처럼, 이권으로 밥을 사먹을 수 있다고 해서 밥의 논리와 이권의 논리를 똑같이 볼 수는 없습니다. 단언컨대, 이권에 눈 먼 자치고 제 손으로 밥상 차리는 놈 없습니다.

‘밥그릇’이 이권을 비유하게 된 건 ‘밥’ 때문이 아니라 ‘그릇’ 때문일 겁니다. 그릇은 공허합니다. 비어 있음에 결핍을 느끼고 채우고픈 욕망만 가득 찹니다. 그릇(器)은 수단이지 그 자체 목적이 아닙니다. ‘밥그릇’은 부자들에게는 돈과 권세의 수단이고 가난한 자에게는 생존의 수단일 뿐입니다. 어느 쪽이든 ‘밥그릇’은 사람들을 고립된 ‘개인’으로 찢어 놓는 수단입니다. ‘그릇’에 담긴 밥은 혼자 먹는 밥입니다. 그건 부자들에게는 욕망의 개인주의이고 가난한 자에게는 생존을 위해 ‘우겨 넣는’ 서글픈 고립입니다.

밥의 논리는 결코 ‘그릇’에 담을 수 없습니다. 밥은 구체적입니다. 대지의 향기와 하늘의 햇볕을 받고 자란 쌀로 지은 밥,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영혼의 평화를 가져오는 밥. 그 밥을 해 먹는 일은 한갓 이권의 소유와는 비교할 수 없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과정입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대지와 하늘, 자기와 타인과 관계 맺고 공통성은 확인하는 삶의 목적 자체입니다. 밥상은 사람들을 모웁니다. 밥은 여럿이 함께 먹을 때 비로소 밥다움의 본질을 실현합니다. 혼자 먹는 밥은 부자든 빈자든 밥의 본질을 상실합니다.

밥을 해 먹는 일, 밥상을 차리는 일, 그것만큼 삶의 실체를 여실히 드러내는 일도 없습니다. <위클리수유너머> 93호에서는 밥먹는 일의 지난함과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길거리 노숙인들을 위한 급식은 ‘무료’지만 ‘수치심’과 ‘본보기’의 도덕적 대가를 요구합니다. 혹여 아는 사람 볼까봐 구석에서 밥과 찬을 국그릇에 말아 ‘털어넣는’ 밥 이야기는 슬프다 못해 화가 납니다. 혼자 손 놀려 밥 먹을 수 없는 중증 장애인에게 밥은 ‘그림의 떡’입니다. 밥 먹는 일이 폐 끼치는 일이기에, 밥 먹으면 당연한 똥 싸는 일도 폐 끼치는 일이기에 거식증에 걸리고 변비에 걸리는 그들의 밥 이야기는 머리를 먹먹하게 만듭니다. 도대체 어느 엄마인지 알 수 없는 엄마표 밥상을 먹어본 적 없는 빈곤 지역 청소년들에게 공부방은 밥 먹으러 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밥 먹는 일이 어려운 건 꼭 빈곤과 부자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혼자 살 때, 혼자 밥하고 혼자 먹어야 할 때 밥 먹는 일은 고단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독신 생활하면서 꼬박 꼬박 정성들여 밥 해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거의 초인의 기적에 가깝죠. 그만큼 밥상은 함께 차리고 둘러앉아야 맛입니다.

이번 호에서 다루려는 건 그저 ‘가난한 자들의 밥’이 아닙니다. 그 가난한 자들이 공동으로 차리는 풍요로운 밥상 이야기입니다. 반찬이 많아서, ‘체리’로 디저트를 해서, 비싼 식재료를 써서 풍요로운 게 아니라 소박하지만 ‘함께’ 차리고 ‘함께’ 먹어서 풍요로운 밥상 말입니다. 무료급식소에서 눈치밥 먹던 노숙인들이 자율적으로 공동밥상을 차리면서 “와,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네. 맨날 혼자 밥 먹어서 외로웠는데 사람들과 같이 있으니 진짜 기뻐.” 라고 말할 때 그 말 속에 밥의 본질이 다 들어 있습니다. 여성자활공동체 W-ing의 밥상 이야기는 밥에 담긴 ‘엄마’ 표 ‘정’이라는 게 어떻게 여성의 ‘자립’을 가로막는 이데올로기인지 확인시켜 줍니다. W-ing의 주방 이야기는 스스로 밥상을 차림으로써 자립적인 존재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실감케 합니다. 자율적 존재가 되려면 공동체를 이뤄야 하고, 공동체가 되려면 스스로 자율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W-ing은 스스로의 밥상을 차리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W-ing의 밥은 맛있다’는 소문이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운 건지 수유너머R의 주방 매니저는 잘 알 겁니다.

1%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한미FTA 협정이 비준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99%의 밥상은 더욱 빈곤해지고 금이 갈 겁니다. 분노할 때입니다. 밥을 위하여. 밥상을 위하여.

응답 1개

  1. […] [편집자의말] 밥그릇과 밥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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