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어떤 밥상을 만들 것인가

- 박카스(수유너머R)

* 주방장을 맡으며

오래 전에 나는 밥상머리에서 줄곧 어지러움을 느꼈다.
‘밥 먹자.’ 소리가 들리고 밥상에서는 내가 이미 아는 이야기들이 또 시작되었다.
그렇지. 아버지 동창 ***의 이야기, 이미 알고 있지. 난.
그렇지. 그 동창이 왜 요새 동창회에 못 나오는지도 알고 있지. 난.
그렇지. 아버지의 군시절 추억담. 베스트 5. 이미 알고 있지. 난.
그렇지. 아버지의 관심사. 이미 알고 있지. 난.
그렇지. 그래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 들을 내용도 알고 있지. 난.
몇 백번은 더 들었으니까.

나이를 조금 먹고, 책을 통해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들을 왜 자꾸만 하게 되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을때, 나는 드디어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의 말을 돌려 외할머니에게 말을 걸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20년만에 처음 밥상에서 외할머니의 연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밥상머리에서 들었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나에게 꽤나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한 2년전쯤 누군가 ‘너 왜 안하던 공부를 한다고 그러냐?’ 라고 물었을 때 이유야 무수히 많았지만, 언젠가 마음 속으로 ‘밥상머리.. 밥상머리.. 밥상.. 밥상..’ 중얼거렸던 기억도 생각났다. 공부를 하면 밥상머리에서 하게 되는 이야기, 밥상머리에서 생겨나는 느낌, 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수유너머R이 해방촌에서 삼선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을때, 주방이 생겼고 나에게는 자꾸만 그때 했던 그 말, 생각들이 튀어나와 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또 한편으로, 사실 나는 말렸다. 20대 젊은 나이에 누가 선뜻 주방장이 되어서 여러 명이 먹는 밥의 장을 보고, 정리를 하고, 매 시간 신경쓰는 일을 손들어 하고 싶어할까. 다만 수유너머R이 이사를 하며 모두의 동의로 주방이 생겼고 멤버들 가운데 나는 조금 주방을 통해 뭔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당분간 이렇게 살기는 더 살아야겠고 무엇보다 혼자 몇날 며칠을 밥을 먹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또 주방을 가꾸지 않았을때는 어떻게 되는지 나는 보았고 내가 봤던 것들을 다시 보고 다시 그것들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지금 삼선동으로 이사오기 전 해방촌 수유너머R에도 조그만 주방이 있었다. 3평 남짓한 작업실로 쓰던 쪽방을 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회원들을 비롯해 주방을 꾸리고 싶었던 몇몇 회원들이 함께 이사가기 전까지 주방으로 만들어 근근이 밥을 해먹으며 지냈다. 이사 오기 전 주방에서는 규율도 없었고 당번도 없었고 먹고 싶은 사람이 주방으로 와서 스스로 밥을 차려 먹었다. 식재료는 집에서 아름아름 반찬을 가져오거나 그때그때 밥을 해 먹고 싶은 사람이 식재료를 사서 채워넣는 식이었다. 주방장, 당번이 없으니 식사 준비를 하는 일, 냉장고 정리하는 일, 식재료 관리하는 일, 찬장 정리, 남은 반찬관리와 같은 힘과 시간이 드는 일을 함께 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 역시 개수대도 없을 뿐더러 습해서 벌레도 잘 꼬이는 열악한 공간에서 오로지 간단한 식사만으로 생활하며 지냈다. 그렇게 공간을 방치한 덕에 주방을 찾는 사람은 당연히 줄고, 식재료는 다 못 먹고 버려야하는 경우도 생겼다. 냉장고에서 조리된 음식은 오래되어 못 먹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되자 공간으로 향하는 발길은 점점 더 줄었고, 청소는 더욱 안 되고 식재료를 사거나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는 일이 불가능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다시 지내고 싶진 않았다.

* 수유너머R 주방을 열고..

주방을 열고 두 달이 지난 요즘 나에게 찾아오는 소리들은 말 그대로 다채롭다. 공간을 함께 쓰는 별꼴 카페 식구들의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에서, 별꼴카페에 놀러온 분들의 이야기, 친하게 지내면서도 선뜻 함께 할 꺼리가 없던 친구들이 알식사시간에 찾아와 밥을 먹으며 나누게 되는 이야기, 대학로에서 가끔 밥을 먹으러 놀러오시는 이음책방 지기님의 책방활동이야기, 강의와 세미나를 통해 만나게 되는 학인들의 이야기도 듣는다. 생전 처음 듣는 암벽등반에 관한 이야기, 생전 처음 만난 물리학도의 물리학 공부에 관한 이야기. 대학원, 박사 수료자의 삶의 고단함이 묻어난 대한 이야기에서, 노들야학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 학생분들, 함께 모여사는 장애인들의 이야기까지. 언어로 손짓으로, 몸짓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가 귓가에 들려온다. 이들은 모여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 신념 등보다는 그저 어제 본 일에 대한 자기 생각, 살면서 겪는 사소하다면 사소하다 말할 수 있는 불편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그러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와 생각들이 섞인다.

철학공부가, 시가, 문학이, 카페공간이 매개가 되어 처음 만나는 이들이 함께 모여앉아 밥을 먹는다. 그리고 함께 관심사와, 좋고 싫음, 어떻게 먹고 사는 지, 말과 제스처를 나눈다. 처음엔 어색하긴 해도 차차 말을 섞으면서부터는 연출자가 없이도 벌어지는 한편의 즉흥연극이 펼쳐진다. 그렇게 함께 나누는 수다의 장면은 한 명의 연출자의 머리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수다장으로 자기의 삶을 꺼내놓는 리얼연극무대의 장이 된다. 함께 하는 밥상을 차리면서, 장을 보며 기다리게 된다. 함께하는 밥상을 열면서 내게 찾아오는 듣지못했던 이야기들, 내게 들이닥칠 사람들, 사건이, 그리고 또 새롭게 만들어질 무엇이 기다려진다.

누구나 밥을 먹고 사는 이상 밥상을 만든다. 아니면 차려진 밥상을 사서 즐기거나 관계에 의해 노동을 착취해서 만들어내기도 한다. 혹은 선물로 찾아온 밥상을 먹기도 한다. 그때, 그때 마다 밥상은 다르다. 심지어 똑같은 공간에서 밥상을 만들 때조차도 그렇다. 그러나 주방에서 지내며 나에게 들어온 생각 하나는 내가 앞으로 힘으로 삼게되는 것(이야기나 느낌)은 어떻게 밥상을 만들어 먹느냐와 긴밀히 관계 맺어있다는 것이다.

* 함께 만들어가는 주방

연구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밥을 하는 주방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밥을 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이다. 밥을 같이 먹는 것은 좋다. 수다를 떨며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고, 함께 연구하는 이들의 밥상을 만드는 것은 특정인에게 밥상을 바치는 것과는 달리 함께 나누는 기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하지만 어려운 것은 그 좋은 것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힘이 들기 때문이다. 30인분~40인분 밥을 혼자 하고 나면, 바로 밥을 먹기 힘들때도 있다. 힘이 빠져 밥이 안 먹힐때도 있다. 그 상태에서 수다를 떠는 건 더 힘들다. (물론 이야기를 해야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지만) 주에 몇 번씩 장 보는 것, 틈틈이 조리기구들을 준비해놓는 것, 냉장고 관리 등. 또 주방 당번이 비어서 하루 내내 주방에 붙어 있어야 할 때, 주방에 붙어있는 시간, 들인 힘 때문에 계획했던 것들이나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못하게 될 때, 잡혀있던 약속을 취소하고 밥을 해야하는 경우가 생기면 밥 같이 먹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런 힘이 들어가는 것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좋은 주방을 함께 잘 만들어갈 수 있을까? 어느 규모로, 동료들과 어떻게, 수유너머R을 찾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주방을 잘 만들어갈 수 있을까? 말 그대로 밥상차리는 일이 과도한 노동이 되고 그것을 ‘당연히 혹은 해야하니까’ 라는 말로 나 스스로와도, 주방을 찾는 사람들과 관계 맺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주방을 찾는 사람도 줄고, 찬거리도 줄고, 식재료도 줄고, 관리 불가능한 주방이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밥상차리는 일이 노동이 아니라 서로의 능력을 키우는 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궁리해본다. 공부에 있어서도, 관계(환대)에 있어서도,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에서도. 그래서 즐겁게 그 장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 관계나 공부, 함께-함의 능력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긴장과 부담이 자리해 어쩔 수 없는 노동이라 느껴지는 주방이 아니라 공부를 나누고 생활을 나누기 위한 노동을 하는 곳. 함께 하는 능력, 공부의 기술들을, 요리와 수다능력, 자립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함께 밥을 먹는 것도, 함께 밥을 준비하는 것도 즐거울 수 있는 그런 주방공간이 되기를 꿈꿔본다.

응답 1개

  1. 사루비아말하길

    내가 차린 밥상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줄 때에 정말 기쁘고 뿌듯한데, 그 기쁨만으로는 몸의 고단함을 이겨내지 못할 땐 참 난감해요. 더구나 반복된 일로 고단함이 축적되면 이게 과연 나한테 좋은 건가 싶기도 하고 -_-;;;; 이러한 극기가 능력이 확장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능력이 축소되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요즘 나는 카페를 하면서 이런 걸 많이 느낀다우 ㅠㅠㅠ 어떻게 해서든지 작은 기쁨을 잡아내어 그것을 최대한 늘리는 기술을 사용하겠다고 매번 자기 세뇌를 하면서 살고 있어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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