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우리들이 우리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 문제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근데 너 밥은 먹었니?”


주말 오후 예기치 않은 만남에 화들짝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오늘도 공부방 열거냐’고 매달리는 1학년 아이를 보자마자 자동으로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바람 부는 비탈길 한 쪽에 치우쳐 얇고 허름한 옷차림에 신발을 질질 끌며 하릴없이 혼자 걸어오던 아이가 밥만 먹었다고 했더라도, 나는 훨씬 반가운 얼굴로 얼른 넘어가 아이를 대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학교도 안 가고 공부방도 열지 않는 일요일이니 오늘은 무조건 집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날인데, 점심도 훨씬 지난 시간에 축 쳐져 거리를 쏘다니는 아이를 보자마자 그저 안녕하기만은 어려운 마음이 이런 말이 되어 나온 것이다.

“왜 이 시간까지 밥도 안 먹고 다니는데, 밥은 먹고 놀아야지!”

이런 말 한 마디만 더 하면 눈치가 빤한 아이들은 얼른 배가 안 고파서 안 먹었다고 말을 끊어 먹는다. 물론 밥 먹는 것도 귀찮을 만큼 노는데 푹 빠진 아이들은 있기는 하다. 그런 아이들은 정말 밥이고 뭐고 다 필요 없이 심신을 다 바쳐 노느라 끼니도 넘기는 것이니 사실 전혀 걱정할 일이 못된다. 하지만 아이의 모습은 그렇게 신나게 노느라 그러는 것 같지도 않는데, 어째서 배가 안 고프다는 것인지 도저히 곧이곧대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더욱이 말끝에 슬슬 눈치를 보는 기색마저 보이니 더욱 못 믿겠다. 자기가 밥을 못 먹은 혹은 안 먹은 것이 대놓고 떳떳하게 말할 만한 일이 못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일부러 얼버무리려 하는 말 같은 눈치가 더 짙다. 그래서 만약 ‘뭐 좀 먹을래’ 하는 말이라도 떨어지면 ‘뭐요, 뭐 먹을 건데요?’하고 얼른 반색하고 달려들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사실은 말과 전혀 다를 것만 같아서 하는 소리다.

“아니, 엄만 뭐하시는데, 왜 아침밥도 못 먹었는데?”

사실 이렇게 물어보면 안 된다. 이런 물음은 아이들을 금방 도망가게 만든다. 왜냐하면 아침밥도 안 해준 보호자를 비난하는 것이 역력히 묻어나는 말투이기 때문이다. 때로 조심스럽게 물으면 순진한 아이들이 쫄래쫄래 대답을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얼른 말끝을 얼버무리며 그 자리를 피하려 든다. “엄마가 자서요” 아니면 “엄마가 없어서요” 혹은 “그냥 내가 먼저 나왔어요” 뭐 그런 대답들을 흘리며 얼른 자리를 뜰 궁리만 엿본다. 그래서 괜한 추궁의 말은 사실 아이를 위해 삼가는 편이 더 낫다.
물론 때가 되어 밥을 먹는 일은 당연하다, 누구나 당연히 알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엄마나 아버지가 있으면 당연히 아이들을 챙겨 먹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 도대체 너한테 가서는 어찌 된 것이냐‘하고 몰아세우듯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니까 아이들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당연한 일조차 어색하고 힘겨운 자기 처지를 말하는 게 더 힘들어서 그저 피하고 싶어 한다. 정작 그런 일로 추궁을 들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아이가 죄인마냥 얼른 얼버무리고 도망가고 싶어 한다.
그래도 가만 보면 할머니랑 사는 아이들은 제법 집 밥을 먹고 다니는 편이다. 조부모들의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아이들 입맛에 맞춘 찬이 다양하지 못하다 뿐이지, 김치에 국 한 가지라도 놓고 꼬박꼬박 아이들 밥을 챙겨 먹이려 애쓰시는 것은 역시 할머니들을 으뜸이다. 그 분들은 먹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에 대한 희망을 끈을 좀처럼 놓으려 하시지 않는다. 부모도 없는 아이들의 앞날은 먹고, 자라고, 배우는 것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편 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많은 아이들이 조부모의 양육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늘그막에 홀로 손자들을 키워야 하는 막막함이 절망으로 변해 아이들을 덮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희생적이고 훌륭하신 조부모님들도 계시겠지만, 쪼들리는 살림살이와 하루가 다르게 딸리는 기운이 문득 서럽고 두려우면 밥 한 그릇에 잔소리와 혼찌검이 한 무더기로 따라오기도 하는 것이다. 실은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지만 밥상머리의 그런 잔소리들은 그저 아이들의 목구멍을 가로막을 뿐이라는 것을 그 분들이 이해하기에는 그 상처가 너무도 깊다. 그래서 밥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할머니를 두고도 아이들은 이리저리 많이 방황을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돈도, 기운도너무 가진 것이 적은 조부모들은 겨우 밥만 챙겨줄 뿐이라는 말이 말 그대로의 현실인 경우가 많다.
이런 조손가정에 비하면 부자가정의 아이들은 언뜻 그 반대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홀로 아이를 키우게 된 사연은 여러 가지겠으나, 어떤 경우에도 제대로 양육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란 예상을 하기는 어렵다. 어지간히 단단히 결심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아이들이 집 밥을 먹기가 어려운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나마 매식이라도 하는 경우가 오히려 나은 편이고, 돈이 되는 대로, 입에 당기는 대로,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밥을 소홀하게 여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이들이 조금 크면 그냥 돈만 쥐어주고 ‘네가 알아서 먹어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럼 또 아이들은 먹는 것은 대충하고, 남은 돈으로 PC방 등에서 시간을 보내며 언제나 먹는 건 뒷전으로 미루기 일쑤다. 때로 아버지들이 가정이 깨어진데 대한 분노감과 함께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어려움으로 아이들보다 더 돌봄이 필요한 처지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상황이면 정말 밥 정도의 문제는 별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모자가정이라고 아이들의 밥 먹는 일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니다. 갑자기 생계를 책임지게 된 엄마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못하다. 아이들과 먹고 살려면 그야말로 밤늦게까지 온 몸이 부서져라 악착같이 일을 해야만 한다. 장시간 노동이나 심야 서비스 업종의 노동 등이 주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이렇게 혼자 살림하랴, 생계책임 질랴, 눈코 뜰 새 없는 엄마들은 아무리 아이들이 걱정스러워도 도저히 끼니때마다 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할 짬을 낼 수가 없게 된다. 장보기나 음식 장만은커녕 어질러 놓은 빈 그릇을 치우는데 꿈쩍거릴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쪽저쪽으로 허물어져가는 집구석을 혼자 몸으로 아등바등 버텨보다, 어느 순간 술이나 우울 혹은 병마에 사로잡혀 한 순간 의욕을 잃고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들이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에 바쁘다. 그러니 모처럼 휴일에 애들 밥도 못 차려주고 정신없는 누워 있는 그 어머니들은 반은 자고 반은 기절해 있는 것이 맞다고 말할 수 있는 지경이다. 그래서 그나마 제일 형편이 나을 것 같은 엄마랑만 사는 아이들도 조금 덜하긴 하지만 매한가지로 집 밥 먹기가 녹록치 않은 것이다.

“너 얼른 집에 가서 밥 먹고 나와서 놀아, 얼른 집에 들어가서 꼭 밥 먹고 와야 한다.”

그런저런 사연에 집에서 밥 먹기가 쉽지 않음을 알기에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마음을 굳히고 아이를 집으로 보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곁을 어슬렁거리는 아이의 등을 매정하게 돌려 세운다. 공부방에 데려가 속 편하게 라면 한 그릇 끓여 먹이는 것도 포기하고, 복잡한 심사에 내켜하지 않아 하는 아이를 굳이 돌려세워 집에서 밥을 먹고 오라고 함께 고집을 부려본다.

아이들의 밥을 지원해준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들이 내 머릿속에 견고한 또아리를 틀고 있다 난리를 부렸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아이들이 밥은 아무데서나 먹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어쩔 테냐, 만에 하나라도 식구들이 뭘 먹고 살건 말건 나만 어디 가서 좋은 것 먹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살게 되면 어쩔 테냐, 나중에 부모가 되어서도 자기 자식을 거두고 보살피는 일에 소홀하면 어쩔 테냐, 아이들이 너무 염치없이 그저 얻어먹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살면 어쩔 테냐 하는 말들이 머리 속을 마구 기어다니며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진짜 속마음이 무어냐고 물으면 아무 대답도 못할 복잡한 심정이 되어 아이만 돌려 세웠다.그리곤 아이한테 ‘오늘은 꼭 네 집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고 그리고 ‘꼭 엄마한테 밥 챙겨달라고 해라’ 하고 아이한테 신신당부까지 한다
하지만 그런 당부에 아이는 영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고 있다. 집에 가면 누가 반겨줄지 하나도 자신이 없는 발걸음이다. 배고프다고 하면 누구라도 얼른 상을 차려줄지 영 자신 없는 발걸음이다. 오히려 괜히 밥도 안 먹고 싸돌아 다녔다고 혼만 더 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발걸음이다. ‘차라리 태쌤을 안 만났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후회가 막심한 발걸음을 보고 있자니, 돌려보낸 게 안쓰럽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만’이 결국 이겨버린 날이다.

“애들아, 밥 먹어야지, 얼른 손 씻고 오세요.”

공부방의 밥은 그런 아이들이 모여서 함께 먹는 밥이다. 할머니가 좀 아파도, 엄마가 한참 기운 떨어져하고 먹을 것도 없다고 해도, 아버지가 며칠째 집을 들어오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한 아이들의 밥만은 걱정 없이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마련되는 것이다. 다음 순간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운차려 맞설 수 있도록 김이 나는 밥 한 그릇과 뜨듯한 국 한 그릇, 정갈한 김치와 찬 두어 가지로 차려진 밥상을 낸다. 별 것 아닌 이 밥상을 받고, 아이들이 삶의 격랑에 밀리지 않고, 구름 속에 가려진 해를 찾고, 깜깜한 어둠에서 더욱 환히 빛날 별들을 상상하라고 차려내는 밥이다. 저마다 이런저런 사연을 있는 아이들이 그냥 식구들처럼 함께 먹는 것이 공부방의 밥이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서로 나누어 먹습니다.”

국가에서는 그 밥에 ‘결식아동 급식사업’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우리는 그저 때가 되면 거르지 않고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 챙겨먹는 것으로 여긴다. 그냥 흔히 집에서 먹는 제철의 소박한 먹거리들로 마련된 아무렇지도 않은 고마운 밥일 뿐이다.
공부방의 밥 먹는 시간은 가지가지 일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이들이 좀 싫어하더라도 몸에 좋은 제철 나물 같은 것들을 놓치지 않고 준비해서 먹을 수 있도록 반드시 지청구를 해야 한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은 조금 더 넉넉히 마련할 방도도 내야 한다. 영 인기가 없는 식재료는 흔적도 못 찾게 잘게 다지든지 무슨 수를 쓰든 살짝 감추어 먹여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도 어찌 귀신같이 알아내고 얼굴을 찌푸리고 온갖 야단법석에 어리광이 한참 늘어지기도 한다. 나물이름이며 음식 이름을 일러주기도 하고, 멀쩡히 알면서도 어쩜 그런 것도 아느냐 밥 먹는 아이를 데리고 한참 밥상머리 수다가 늘어지기도 한다. 못 먹는다는 음식을 한 숟가락만이라도 먹어보라 권하고 있으면, 옆에 있던 아이가 ‘왜 나는 맛있는데, 내가 먹어줄까’ 하고 얼른 대신 받아먹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도 시켜줘야 한다. 따끈한 국물이 다 식도록 밥 보다는 이야기에 열을 내는 아이에게는 ‘먹고 나서 이야기하자’를 수십 번도 더해주어야 한다. 다른 데서는 어찌 먹누 할 정도로 온 상을 다 어지르는 아이 모습에 옆의 아이들이 불평불만이라도 낼까 싶어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김치 한 쪼가리나 야채 하나도 전혀 못 씹어 그릇만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는 일부러 더 모른 척을 한다. 제 입맛에 딱 맞는 맛난 음식에 이미 제 몫은 다 가져다 먹고 괜히 밥상머리를 얼쩡거리며 어찌 하나라도 더 먹어 볼 수 있을까 꾀를 내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대놓고 더 달라고 때를 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넉넉히 준비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 바쁘다. 반찬 더 갖다 먹어라, 밥알 흘리지 말자, 국물 남기지 말자, 가능하면 먹을 만큼 덜어다 먹고 남기면 안된다, 설거지 깨끗이 하자, 잔소리도 한 마디 더 추가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도 밥 먹다 말고 어쩌겠는가? ‘으응,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어?’ 그저 한 번 더 역성을 들어주고, 달래주고, 끄덕여주면서 몸과 마음 모두가 채워지는 우리 아이들의 밥시간이 되도록 밥을 밥으로 만든다. 이런 건 그냥 사람이 되는 길이고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복지라는 이름 속에 갇혀 얻어먹는 밥이 되지 않도록, 육신의 허기만을 채우는 밥이 되지 않도록, 빨리빨리 해치워버려야 할 골칫거리 밥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밥에 대한 고민을 한다. 인간에게는 최소한의 자존심이 필요한 것이고, 그 자존심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과 일들이 있는 것이며, 마땅히 누구에게나 그런 몫은 주어져야 하는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함께 밥을 먹는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은 혼자 못 가지는 것이고, 또한 모두의 머리위에 함께 이고 사는 이치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난 숙명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누구의 자식임을 불구하고 최소한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도리를 일컫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말마따나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예의와 기본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응답 3개

  1. […] [동시대반시대] 우리들이 우리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 문제 No Comments » 댓글을 취소하려면 여기를 누르십시오 […]

  2. 말하길

    앗, 마지막 오른쪽 사진에서 자기 밥그릇에 코푸는 녀석 뮝미? 맛난 반찬 못 뺏어먹게 하려는 그 유명한 자학 테크닉? 나도 라면에 침 뱉어 본 적 있는데…암튼, 넘 넘 감동적이고 재밌는 글이어요.

  3. -말하길

    아,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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