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정치지도자, 국민의 욕망이 빚어낸 자화상

- 맹찬형(연합뉴스 제네바 특파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가 세 번째 총리직을 사임하던 11월12일 저녁 로마 시내는 소란스러웠다. 하원 의사당과 총리 관저가 있는 몬테 치토리오 광장에서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바이 바이 실비오’, `마침내……’ 등의 글귀가 적힌 피켓을 들고 총리의 사임에 열광했다. 20명 남짓한 성악가와 연주자들로 구성된 소규모 악단은 광장 한 모퉁이에서 우리 귀에도 익숙한 헨델의 메시아 중 일부인 `할렐루야’를 연주했다.

저녁 8시30분쯤 마지막 내각회의를 마치고 조르지오 나폴리타노 대통령에게 사임을 공식 통보하기 위해 총리 집무실을 떠나는 베를루스코니에게 군중들은 ‘어릿광대’, `마피아’, `감옥에나 가라’ 등 온갖 야유를 퍼부었다. 총리 관저가 있는 몬테 치토리오 광장에서 대통령이 머무는 퀴리날레 궁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10~15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로마의 명소 트레비 분수가 중간에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나폴리타노 대통령 관저 앞에서도 자신을 기다리는 군중으로부터 또 한 번 야유를 들어야 했다.

1994년 정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베를루스코니는 17년의 정치경력 중 10년 동안 3차례 총리를 역임한, 이탈리아 정치 사상 최장수 총리다. 그는 고향 밀라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건설업에 뛰어들어 대규모 아파트를 많이 지어 돈을 모았다. 건설업으로 모은 돈을 발판으로 신문과 방송, 영화산업을 아우르는 종합 언론기업 메디아셋을 설립해 언론재벌이 됐고,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팀인 AC 밀란을 사들여 구단주가 됐다. 이탈리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로 만족할 수 없었던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포르자 이탈리아(가자 이탈리아!)’라는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뛰어들었고, 곧바로 총리가 됐다.

돈과 언론, 정치권력을 거머쥔 베를루스코니는 재임 기간 내내 성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 외곽의 아르코레에 있는 빌라에서는 `붕가붕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질펀한 섹스파티가 숱하게 열렸고, 연예계와 방송 진출을 희망하는 젊은 여성들이 자의반 타의반 채홍사의 손에 이끌려 파티에 참석했다. 모로코 출신 10대 나이트클럽 댄서 카리마 엘-마루그(일명 루비)에게 돈을 주고 성관계를 가진 혐의에 대해서는 현재 밀라노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탈리아에서 성매매는 범죄가 아니지만 미성년자와의 성매매는 처벌을 받는다.

루비가 나이트클럽 손님의 지갑에 손을 댔다가 체포되자 직접 경찰에 전화해서 `그 여자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조카이니, 외교 문제가 생기기 전에 풀어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 건도 권력남용으로 재판에 계류 중이다. 이밖에도 10대 속옷 모델과의 스캔들, 영국인 변호사에게 돈을 주고 법정 위증을 교사한 혐의 등 악취 가득한 추문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저명한 작가 움베르토 에코같은 지식인들은 베를루스코니를 이탈리아의 수치이자 악몽이라며 넌더리를 냈다.

하지만, 정작 베를루스코니를 권력의 정점에 끌어올리고 지탱해준 것은 바로 이탈리아 국민들이다. 채무위기가 심화되고 이탈리아 국채 금리가 위험선인 7%를 넘나들기 전까지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각종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높은 지지율을 누렸다. 바로 국민이 베를루스코니를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특히 마초 문화가 강한 이탈리아 남성들은 마음속으로 그가 가진 재력과 정치권력, 젊은 여성들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능력을 은근히 부러워했다. 베를루스코니의 권력이 허물어져가는 현장에서 야유와 환호를 보내던 군중들도 일부는 한때나마 그에게 지지를 보냈을 수도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로마의 밤거리에서 내가 본 것은 베를루스코니가 아니라, 바로 이탈리아 국민들이 마음속에 품은 욕망이었다. 그 욕망이 베를루스코니라는 `스캔들의 제왕’을 만들어냈고, 최장수 총리라는 지위를 허락했다. 정치 지도자는 곧 국민의 욕망이 빚어내는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로마의 풍경은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몇년 전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우리 유권자들의 욕망과 뉴타운을 건설하면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그때의 욕망이 부질없고 그릇된 것임은 이미 널리 확인된 것 같다. 문제는 2012년 4월과 12월에 어떤 욕망을 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끝)

응답 1개

  1. 김성희말하길

    MB는 어디에나 있군요. 저런 이가 최장수 총리였다니 대단하군요. 사람들이 욕망의 부질없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늘 이런현상은 반복되는 이유는 뭘지.. 잘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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