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와 떠난 여행

15화-꼬마에게 쓴 편지

- 배문희

모모! 모모! 어서 일어나. 아침이라구우. 햇살의 우렁찬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봤다. 먼저 잔꽃무늬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여관의 낯선 벽지를 보고서야 내가 길 위에 있음이 실감났다. 어제 길을 잃고 헤매다 해질 무렵에 가까스로 찾은 여관이었다.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았다. 손바닥만한 창에는 김이 어려 있었다. ‘새벽, 별, 노을, 길, 무지개…’ 좋아하는 단어들을 손가락으로 차례차례 써 보았다. 어려 있던 김이 녹으면서 물방울에 매달려 있던 햇살이 촛농처럼 뚝뚝 떨어졌다. 창문이 맑아지자 풀여치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풀여치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가방을 매고 밖으로 나오니 아침 바람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페달을 더욱 힘껏 밟았다. 한참을 달리다 ‘예당호수’라는 이정표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여행을 할 때 기분 좋은 순간은 이정표 위에 뭔가 신비로운 글자가 쓰여 있을 때이다. 때로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그 글자를 해독하기 위해 여행자는 부지런히 바퀴를 굴리는 것이다.

길 위에서 나는 계속 두리번거렸다. 어디에 호수가 있지?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린 이정표를 찾아 나는 계속 헛발질을 했다. 너무 그리워한 탓일까. 아무리 찾아도 호수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 아이에게 물었다. "요 앞에가 호순데요." 아이는 무슨 어른이 그런 것도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꼬마의 말대로 조금만 더 가니 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큰 호수가 나왔다. 호수는 순하디 순한 초식동물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롱한 빛깔과 그 속에 젖은 뿌리를 담그고 선 나무들이 보일 때 호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함으로 제 그림자마저 몰아내고 있었다.

예당호수 길. 이 길은 지금까지 달린 길 중 가장 평화로운 길이었다. 국도에선 질주하는 차들에 시달리느라, 지방도로에선 좁은 갓길에서 전전긍긍하느라, 오솔길에선 갓길 마저 없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는데 이곳은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풀여치는 호수길을 달리며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모모. 이 길은 꼭 우릴 위해 만들어진 길 같다."

"그러게. 미리 머리 좀 식혀라. 좀 있으면 무시무시한 정글 속으로 들어가게 될 테니 말야."

"걱정 마. 거대한 덤프트럭 공룡이 나타나도 이 풀여치님이 당당히 이겨내는 모습을 보라구."

"뭘로 이긴다는 건가. 설마 그 더듬이로?"

"어? 모모야. 뭐라구?"

"됐다. 빨리 가기나 하자."

우리는 호수를 뒤로 하고 616번 지방도로로 접어 들었다. 안락한 전용도로를 벗어나 다시 정글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시골 지방도로는 갓길이 거의 없어서 차가 지나가도 비킬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차들이 우리의 사정을 봐주는 법은 결코 없었다. 속도를 줄이긴  커녕 한적한 도로 위를 폭주하는가 하면 지저분한 방귀를 얼굴에 뿜어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풀여치는 탁월한 기술을 발휘하곤 했다. 용케 차선과 논두렁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바짝 붙어선 씽씽 잘 달렸다. 정말 대단한 자전거였다.

대단한 건 풀여치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그랬다. 여행을 하는 매순간마다 몸이 저절로 길들여졌다. 처음엔 화장실에 가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길 위에서 화장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화장실을 발견한 후에라야 몸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욱신거리고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던 팔, 다리, 엉덩이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웬만한 충격은 끄떡없을 만큼 단단해졌다. 정말 대단한 인체의 신비였다. 처음으로 내 몸과 내 몸을 이루는 수많은 세포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길은 예산을 지나 청양으로 이어졌다. 어느덧 하늘이 높아지고 햇살이 따사로이 내려 쬐었다. 야트막한 산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고 그 아래에는 푸른 밭이 펼쳐져 있었다. 맑고 청량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고장이었다. ‘고추의 고장 청양’이라는 푯말을 보고서야 알았다. 삼겹살을 먹을 때 함께 싸 먹는 청양고추가 바로 여기 고추란 것을. 그래서 그런지 바람에서 매운 고추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 바람을 삼겹살에 포옥 싸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오후 3시. 그림처럼 예쁜 초등학교 앞에 닿았다. 한들초등학교. 아이들이 코스모스 같은 손을 한들한들 흔들고 있을 것 같은 이름이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초등학교 현관 앞 계단에 앉아 김밥을 먹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 점심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저편 복도에서 경은이, 은유, 경남이, 경예, 주연이가 신발주머니를 달랑거리며 걸어올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어린 시절 내 동무를 꼭 닮은 꼬마가 하얀 햇볕이 깔린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얼굴은 까무잡잡했지만 눈빛이 똘망똘망한 꼬마였다. 반가운 마음에 꼬마를 불렀다.

"꼬마야. 안녕."

꼬마는 살짝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꾀죄죄한 행색의 어른이 꾀죄죄한 자전거와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으니.

"너 몇 학년이니?"

"삼학년 삼반이요."

"삼학년 삼반? 나도 옛날에 삼학년 삼반이었는데. 반갑다."

"이 자전거, 누나 거예요?"

꼬마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전거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풀여치는 멋지게 보이고 싶었는지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더러워요? 내 자전건 이것보다 훨씬 깨끗하고 이쁜데."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너도 자전거를 좋아하는구나. 나둔데."

"근데 이거 타고 어디 가요?"

"지도를 보면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가지."

내 말에 꼬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지금까지 달려온 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꼬마의 눈빛이 부러움과 호기심으로 부풀어 오르다 이내 어두워졌다.

"에휴, 좋겠다. 난 너무 바빠서 자전거 탈 시간도 없는데.“

"초등학교 삼학년이 바빠봤자 얼마나 바쁘다구.“

"요즘 어린이들이 얼마나 바쁜데요. 학교에서 숙제를 너무 많이 내줘요. 학원도 가야하구요."

"무슨 학원에 다니는데?"

"세 군데 다녀요. 영어 학원, 속셈 학원, 피아노 학원이요."

‘무슨 학원에 그렇게나 많이 다니니?"

"에휴. 그러게 말예요. 근데 저보다 더 많이 다니는 애들도 있어요."

"힘들면 학원에 안 다니면 되잖아."

"학원에 안 가면 친구들이랑 못 놀잖아요.“

"그럼 집에서 가족들이랑 놀지 그래?"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어요. 엄마 아빠는 일 끝나고 밤늦게 들어오시고요. 힘들긴 해도 차라리 학원에 가는 게 나아요. 친구들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니까요.“

“학원 가면 친구들이랑 놀 시간은 있니?”

“쉬는 시간 있잖아요. 쉬는 시간 10분 동안 친구들이랑 뛰어다니면서 놀아요. 근데 학원에선 쉬는 시간에 뛰지 말라고 혼내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수학문제 하나 더 풀고 영어단어 하나 더 외는 것이 아니라 맘껏 뛰어노는 것일 텐데. 무지개를 잡으러 들판으로 달려가고 구름을 만지러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일 텐데.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벌써부터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이름은 강한희. 친한 친구 이름은 강승하, 서기찬, 좋아하는 아이 이름은 구슬비. 취미는 책 읽기. 친구들은 게임을 좋아하지만 자기는 게임보다 책 읽는 것이 훨씬 좋다고. 지금 고민은 앞니가 빠졌는데 다시 안 날까봐. 그러면서 씩 웃는데 앞니 빠진 얼굴이 참 귀여웠다.

나는 꼬마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어린이에게 책을 선물하는 어른이라… 생각만 해도 근사하지 않은가.

"그런데… 너네 집 주소 좀 가르쳐 줄래?“

내 말이 끝나자 갑자기 꼬마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더니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안돼욧! 엄마가 그런 거 물어보는 어른은 나쁜 어른이라고 했어요. 전 이만 가볼게요.”

나는 아차 싶었다. 꼬마는 바닥에 내려놨던 책가방을 매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아 뛰어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엔 어린이에게 책을 선물하는 어른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세상은 어디까지 험악해질 것인가. 나는 꼬마의 뒷모습에다 대고 편지를 썼다.

꼬마야. 안녕.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정말 반가웠어. 너의 해맑은 눈빛과 웃음, 잊을 수 없을 거야. 네가 다 자란 후엔 이 세상이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더는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아이들은 꿈을 그리며 뛰어놀고 어른들도 생활의 염려에서 벗어나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이 세상 어딘가에 그런 마을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언젠가 그런 마을을 찾아가보자. 함께.

응답 2개

  1. 말하길

    그림 참 예뻐요. 걸어 두고 싶을 정도로

  2. 고추장말하길

    오랫만에 풀여치 읽습니다. 밀린 글 읽었는데… 정말 얼굴에 미소 생기는 걸 막을 도리가 없네요. “도대체 이 세상은 어디까지 험악해질 것인가.” 심각한 말이기는 한데, 어째 웃음이 나오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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