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경제위기와 ‘기본소득’

- 이진경

어떤 일을 ‘책임을 묻기 위해’ 따지는 것은 삶을 긍정하려는 사람들로선 결코 기분좋게 선택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대개 무언가 잘못된 일에 대해, 혹은 부당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는 명령어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정되어야 할 어떤 것을 부정하기 위해 부정의 이유를 찾는 질문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반복하여 지적했듯이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다. 또한 이는 미래보다는 과거에 현재를 회부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과거로 되돌려보내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있으며, 그 현재를 떠나서조차 과거에 대한 책임의 부담으로 인해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날개를 펼 수 없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을 긍정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강제하는 어떤 ‘운명’에서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선 그들이 항상 묻는 방식으로 책임을 묻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령 자본주의는 “굶어 죽고 싶지 않으면 노동을 하라구!”라는 부정적 형식의 명령문을 매일 우리에게 던진다.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라는 철학자들의 순진한 명제를 “노동하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야”라는 이중부정의 대우명제로 바꾸곤, 그 인간 아닌 자들, 노동하지 못하는 자들의 비참한 삶을 가시화하여 노동의 강박증을 만들어낸다.죽음으로 이어진 거대한 부정의 평면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다시 한번 그 처참한 무산의 현실을 부정하도록 강제하는 이중부정의 체제다. 그러나 이는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사람들을 토지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삶을 받쳐주던 공동체를 대대적으로 해체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실업이나 부랑, 노숙자들의 거대한 흐름, 그들의 생존에 대한 책임이, 그렇게 하지 않고선 시작될 수 없었던 자본주의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여기에 더해, 지금 죽어가고 있는 신자유주의란 이름의 자본주의는 ‘유연성’이란 이름 아래 노동마저 축소하거나 비정규화하여, 정상적인 노동의 기회를 일종의 ‘행운’인 양 뒤집어 놓는다. 생존은 이제 경쟁력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제한된 결과가 되고, 자기 삶의 구성을 대신하는 ‘자기개발’이 자기 긍정을 대신하는 도착된 긍정의 세계가 작동하고 있다.자본의 요구를 자신의 욕망으로 오인하는 욕망의 배치가 이제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기업’으로 간주하는 새로운 경쟁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끔찍한 과잉-시장화된 세계에서 생존의 책임은 모두 자기 개인에게 돌려진다. 죽음이란 자신의 무능의 결과인 것이고, 무능한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시장의 논리가 그들 말대로 엄격하게 관철되어야 할 기업들에 대해선, 지난 2008년 이후의 경제위기 때 잘 보여준 것처럼, 이른바 ‘공적 자금’이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세금을 쏟아 부어 억지로 생존을 연장한다. 미국은 수천조의 돈을 투입해 월가를 살려냈고, 월가의 금융자본가들은 그 돈으로 새로이 이윤을 배당하고 부도에 책임을 져야할 무능한 경영자에게 거액의 퇴직금마저 선물하는 화려한 잔치를 벌였다. 책임을 물었어야 할 넘들에게, 사람들의 돈을 털어 잔치를 해 준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말하는 이른바 ‘도덕적 해이’란 비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경제위기의 출구를 찾는데 써야 할 돈이, 경제위기를 야기한 주범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간 것이고, 결국 출구를 찾지 못한 위기는 올해 유럽으로 되돌아왔다. 한국이 여기서 자유로울 거라고 믿는다면 너무 세상을 모르는 것이다.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 아래 자본가들의 주머니에 쏟아 부은 이 돈을, 아예 실업으로 인해, 혹은 그나마 노동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을 위해 투입했다면 어땠을까? ‘기본소득’이란 형태로 개인들에게 직접 나누어주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고, 그런 소비의 증가는 침체된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것으며 새로운 생산과 고용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소비를 증가시킬 것이고… 물론 케인즈가 생각했던 이런 일이 그대로 벌어졌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연히 돈만 풀어 물가만 오르고 경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돈이 경제를 회전시키기는커녕, 월가의 금융자본가들 주머니로 들어가 버리고 끝나는 터무니없는 결과보다는 수천 배 나았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경제학적으로 이론화되어 있는 이런 일을 왜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 이는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현금의 자본주의 아래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출구 아닐까? 이미 자본주의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노동자들조차 정상적으로 고용할 능력조차 상실했다. 한국은 비정규노동자의 비율이 이미 노동자 전체의 반은 넘으며, 실업률은 “취업의사가 있으며, 지난 일주일간 구직활동을 했는가?”라는 턱없는 질문을 약간 수정하는 것만으로도 20%를 넘는 숫자로 증가한다. 정규노동자로 살아갈 가능성이 40%에 지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정규노동자로의 취업을 꿈꾸며 살아야 할까? 차라리 노동하지 않고, 혹은 비정규노동자인 채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부실기업들 살리는데 쓸 돈을 이들이 노동할 수 없어도, 혹은 비정규직이어도 살 수 있는 ‘기본’소득으로 나누어주는 것이야말로, 경제위기만이 아니라 노동하라고 무산자로 만들어놓곤 노동할 기회마저 주지 않는 지금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출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존에 필요한 ‘기본소득’을 제공하고, 그 이상 필요한 것은 각자 사정과 능력, 관심에 따라 추가적으로 벌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이처럼 생존의 ‘기본’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은 지난 경제위기 때 미국이 쏟아부은 것의 수십 분의 일이면 된다. 그것은 월가의 경우처럼 쏟아 붓고 끝나는 게 아니라,소비에서 생산, 투자와 고용, 그리고 다시 소비로 이어지는 경제적 순환을 야기한다. 기업을 살려서 거기 고용된 사람들을 살리는 식의 정형화된 사고방식은, 2008년 위기가 보여주었듯이, 이미 고용된 자들, 정규직을 갖고 있는 자들, 더구나 금융투기로 살아가며 경제를 망친 주범들만을 살리는 길 아닐까? 정작 그들이 야기한 파국으로 인해 살도록 해주어야 할 사람들은 그나마 하고 있던 파견노동 등 비정규노동마저 잃어버려 실업과 노숙의 길로 떠밀려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넘들’로 인해 일자리를 잃게 될 애꿎은 노동자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이런 방식으로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해주며 다른 길을 찾도록 해줄 수 있는 거 아닐까?

여기다 대고 ‘재원’타령을 하는 정형화된 비난의 논리가 있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째서 망한 기업을 살리기 위해 수천조원의 거대한 세금을 쓰는 것에 대해선 ‘재원’타령을 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재원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재산을 쓰는 방식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더구나 요즘은 부자들이 경제위기를 위해 세금을 더 내겠다고 나서는 시대 아닌가?(물론 그건 머나먼 미국 얘기지만. 왜 한국의 우파들은 미국에 대해 그토록 추종하면서 이런 건 따라하지 않는 것일까?) 경제적 난국에 재정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 부자들이나 기업의 세금을 깎아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의미의 ‘포퓰리즘’ 아닐까?

그러나 좀 더 역설적인 난관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가 노동과 상관없이 돈을 받는다는 사태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가…’라며 주저하는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자본의 정언명령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이를 무산자로 만든 자본주의의 기원적 책임은 접어둔다고 해도, 노동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허언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도 먹고 살 수 있게 할 수 있까를 고민해야 한다.

‘기본소득’이란 요구에 대해 주저하는 데는, “그렇게 되면 누가 대체 노동해서 먹고 살려 하겠어?”라는 비난 어린 질문도 또 한 몫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모든 욕구가 아니라 단지 ‘기본적인’ 수준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소득에 만족하고 살 거라고 정말 믿는 건지 물어야 한다. 우리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좀 더 벌기 위해 일거리를 찾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이 생존의 ‘기본’ 수준에 만족해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 설마… 심지어 나처럼 돈 버는데 인생을 바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생존의 ‘기본 수준’을 보장해 줄 뿐인 소득에 만족하여 살긴 어려운 게 지금 세상 아닌가?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게 돈이 되든 안 되든 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 아닌가? 돈이 안 되어도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 따라서 지금은 경제적으로도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다만 기본소득이 일자리를 찾아, 정규직을 찾아 아등바등 대는 강도를 낮추어 주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족한 일자리–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적 요소다–를 많은 사람이 나누어 갖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노동시간이 줄고, 일은 많은 사람이 나누어 갖게 되는 사회, 그래서 노동 아닌 활동, 돈을 벌기 위한 것과 달리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할 여유가 비로소 생기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노동하기 힘들어진 지금 사회에서 우리가 역으로 찾아내야 할 긍정적 세계가 아닐까? 기본소득이 그것을 보증해줄 거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 세계로 가기 위한 하나의 출구가 되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응답 2개

  1. […] [수유칼럼] 경제위기와 ‘기본소득’ No Comments » 댓글을 취소하려면 여기를 누르십시오 […]

  2. 말하길

    아 정말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군요. 하긴, 기초생활수급과 노령기초연금, 장애인수당 등은 기본임금의 현실적 형태죠. 실업급여도 어찌보면 그렇고. 실업급여 의외로 안 챙겨 간대요. 복잡하고 까다로운 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 안하는데 어찌 임금받나 하는 노동윤리 때문이기도 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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