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어떻게 해야 분노를 간직할 수 있는가.

- 윤여일(수유너머R)

0.

결국 한미FTA가 비준되고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FTA비준안과 이행법안에 관한 서명을 마쳤습니다.

분노가 치밉니다.

1.

이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번번이 악에 받쳐 올랐습니다. 저만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매일 분노를 삭이고 있으면 힘이 부치고 이 시간이 길어지면 속이 상합니다.

희생이 생기고 쌓일 때마다 잊지 않으려고 그 목록을 기록해두며 긴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목록은 기억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해버린지 오래입니다. 이제 분노는 혐오에 가까운 감정으로 점차 변질되려 하고 있습니다.

2.

이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오늘은 어제와 또 다른 희생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매일 숱한 희생과 갈등들이 쏟아집니다. 그것은 바닥없는 심연이며, 거기에 계속 노출되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소모입니다. 그 결과 신물 날만큼 보고 있노라면 서서히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매스미디어의 경쟁적 보도 앞에서 어제의 사건은 오늘 짤막한 일화로 격이 낮아져 새로 등장한 소재에 자리를 내줍니다. 어제 보았던 것은 오늘 보는 것에 씻겨나갑니다.

그렇게 연일 사건의 다발이 투하되니 각각의 사건에 상념하고 있을 정신적 여유는 없습니다. 만약 분노가 쌓여 응어리를 이룬다면 바깥으로 토해내기라도 하련만, 분노는 온양되기 전에 가라앉습니다. 쓰라린 사건도 일상적이 되면 비극성이 옅어지고, 매일 자잘하게 분노하느라 분노는 휘발성이 짙어지고 형해화됩니다. 시청자들은 정치 드라마에 매일 상처입지만 우화처럼 금방 아뭅니다.

3.

단편적 사건들을 과식한 시청자들은 그 포만감에 통각이 무뎌집니다. 그러나 뉴스를 챙겨봤을 때 느끼는 포만감은 만족감을 안기지 않습니다. 차라리 거대한 물량 앞에서 무료함과 무기력을 맛봅니다. 범람하는 정보는 정치적 판단에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매스미디어를 대하고 있노라면 현기증이 느껴집니다. 각종 사안의 등급이 온통 흔들리고 굵직한 사건과 소소한 이슈가 사정없이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피로감이 찾아옵니다. 그 피로는 비극적 사태를 막으려고 노력한 자의 피로가 아니라, 비극의 반복 속에서 질려버린 자의 피로입니다. 다음 수순은 식상함과 환멸입니다.

그리고서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번져갑니다. 그러나 무관심하다고 정치에 관심을 끊고, 그 관심을 다른 데로 옮기지는 못합니다. 차라리 냉담한 표정에는 초조한 내분의 그림자가 드리워있습니다. 또한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적 관심과 얼마든 공존할 수 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해지더라도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정치 드라마에 반응하고 정신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남의 일입니다. 열광도 하고 분개도 하지만 자기책임 하에 개입해야 할 대상으로 대하지는 않습니다.

4.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FTA비준안에 최종 서명을 한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분노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선관위 홈페이지 공격 등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분노는 분산됩니다. 정권을 향한 분노는 커가지만, 한미FTA 체결에 관한 분노는 그 사이에 조금 희석되었습니다.

이 분노는 언제까지 간직할 수 있을까요.

5.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에서의 인간과 정치>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1930-40년대 나치 독일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글에서 철저한 권력통제, 탄압과 폭행, 숨 막힐 듯한 상호감시체계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독일인들의 현실감각을 문제 삼았습니다.

마루야마의 물음은 이것입니다.

일반 독일국민들은 나치의 통치 아래서 12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 12년 동안 독일사회 내부에서는 나치에 대한 대규모 저항이 일어나지 않았다. 공포에 짓눌렸기 때문인가? 하지만 공포에 떨면서 전 국민이 내리 12년간의 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일반 독일인들에게 나치는 대단한 위기와 공포로 여겨지지 않았다. 심지어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학살이 있는지도 모른 채 12년을 지낸 독일인마저 있었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저 시대를 안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갔던가?

논지를 좇아가면 두 가지 계기를 짚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변화의 점진성입니다. 즉 하나둘씩 나쁜 변화가 생겼지만 전보다 조금 더 나빠졌을 뿐이며, 따라서 별스럽지 않게 독일인들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위화감을 느꼈을 법한 광경도 어느 틈엔가 익숙해집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쌓이면서 사회의 풍경은 몹시 달라졌지만 낯설거나 위험해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계기는 독일인들이 보여준 ‘평상심’입니다.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나치의 선전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내면생활 혹은 내면성의 영역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환경은 바뀌었지만, 사적인 영역은 꿈쩍하지 않은 채 내면과 표면을 분리하는 이중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수의 독일인은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적응해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치나 파시스트가 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리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름의 생활을 영위해 갔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변화의 점진성과 연결됩니다. 즉 나치의 12년은 하루하루의 일상이 12년간 연장된 것일 따름이었습니다.

6.

그러나 마루야마는 나치 독일의 특수성을 지적하려고 이런 분석을 내놓은 게 아닙니다. 이 글의 제목은 「현대에서의 인간과 정치」입니다. 마루야마는 독일 상황의 예외성이 오히려 예외적이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일반적인 속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루야마의 분석을 일반적인 ‘현실감각’에 대한 분석으로 가져와 재구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현실감각의 ‘호흡’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정치적 사건이 지니는 지속성에 비해 일상의 시간은 호흡이 짧습니다.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하루하루 바뀌는 주식상황과 매일같이 쏟아지는 사건사고의 주기보다는 깁니다. 그리하여 커다란 전환이 발생해도 매일 매일 일상의 시간으로 잘게 나누어 간직한다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리라는 전망이 선다면, 그 사안이 야기하는 부정적인 효과에 반응하는 통각은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고 맙니다.

둘째로, 개별화·고립화의 경향으로 각 개인은 현실을 자기 나름의 필터로 걸러내는데, 그때 현실은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양으로 쪼개집니다. 마루야마는 나치 시대에 외부 환경의 거센 변화도 독일인들의 단단한 내면을 상처 입히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데올로기도 프로파간다도 쉽사리 침범할 수 없는 이 내면의 영역에서 어쩌면 대중들의 억센 생존능력을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내면의 영역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현실 이미지를 수용하고 그 이미지가 일상 속에 침전되고 그것이 두께를 더해 응고된 산물이라면, 그 내면의 영역은 사회적 연대감을 부식시키고 결과적으로 대중에게서 정치적인 능력을 앗아갑니다.

7.

여기서 아까 말했듯이 대중은 ‘내면성’ 속에서 외부 문제를 정치의 세계에 맡겨 자신의 책임은 면제시킵니다. 가령 공적인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일상의 영리활동이나 오락활동에 국한합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치 기사를 보고 열광도 분개도 하지만, 자신이 책임지고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그리하여 “현실이 말야”라며 대화를 나누지만, 그때의 현실은 각자가 받아들이고 재생산한 어떤 이미지나 파편에 불과하며, 함께 책임질 사안은 되지 않습니다. 그 시대와 사회가 지니는 무게가 서로 간에 공유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계기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건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추이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두거나 내부에 있는데도 관조자의 시점을 유지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현실의 시간과 현실의 무게가 개인들의 일상감각 안에서 잘게 쪼개지는 것입니다.

8.

이제 다시 묻습니다.

이 분노를 언제까지 간직할 수 있을까요.

한미FTA가 체결되었다고 내일 당장 크게 바뀌는 건 아닐 겁니다. 생활을 생존의 위기로 몰아가는 변화는 10년, 15년에 걸쳐 서서히 축적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도 한미FTA를 문제의 원인으로 되새기며 분노할 수 있을까요. 생존의 위기에 치달으면 그 삭막한 풍경 속에서 개인들은 연대하기보다 제 살길을 찾게 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결코 균질하지 않을 테니까요.

9.

그래서 나중에 분노하려면, 분노할 수 있는 준거를 지금 만들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흥적인 분노는 오늘일로 가능하지만, 분노를 길게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제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FTA 이행법안에 최종 서명한 날, 거의 홧김에 이런 내용의 메일을 아는 편집자분에게 보냈습니다.

“『긴 복수를 다짐한다 – 우리의 피해목록(이명박의 부채목록)』, 이런 걸 내년까지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각 부문별로 우리가 입은 피해를 기록해서 정리해두는 거죠. 내년은 전환의 때가 되어야 하는데, 기억하고 기록해야 다음 전환의 의미도 그나마 보이지 않을까요.

이 정권은 우리에게 기억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날이 쌓여간 피해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기억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심문하는 듯도 합니다. 벌써 잊혀져간 것도 있습니다.

당연히도 피해는 여러 양상입니다. 한미FTA만이 아닙니다. 제 기억에 이명박 정권은 들어서자마자 과거사 위원회들의 예산을 깎았습니다. 역사, 외교, 인권, 문화, 생태 등 그 피해는 전방위에 걸쳐 있을 것입니다. 그 피해목록을 정리해서 시민과 유권자가 기억하고 다음 일보를 함께 옮길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요.”

10.

94호는 ‘한미 FTA 자유발언대’를 특집으로 삼습니다.

이 자유 발언대로는 거리의 자유 발언대처럼 분노의 목소리가 올라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 발언대는 여느 자유 발언대와 달리 기록될 것입니다.

지금의 분노를 기록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저 따위 적을 이겨내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감정의 호흡, 기억의 호흡, 생각의 호흡이 충분히 길지 않은 탓입니다. 저런 적과 싸우려면 우리에게는 분노를 간직할 수 있는 ‘분노의 방법론’이 필요합니다.

그게 무엇일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피해목록과 감정상태를 정확히 기록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응답 2개

  1. […] [편집자의말] 어떻게 해야 분노를 간직할 수 있는가 […]

  2. 지나가다말하길

    정말, ‘MB실록'(이때 실짜는 상실할 실)이나 ‘MB죄목’ ‘MB에 대해 기억해야 할 100가지’ 뭐 이런 제목으로 책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요. 국민참여형식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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