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케이씨의 뉴욕 인상기>를 시작하며

- 권용선(이본의 다락방 연구실)

도시는 무채색이다. 어떤 도시도 고유의 역사성, 분위기, 정서, 인종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그런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도시 안에 있는 ‘비도시적인 것’들의 일부일 뿐이다. 회색의 빌딩숲, 어디선가 몰려왔다가 다시 어디론가 몰려가는 군중들, 각자의 속도로 흘러가는 자동차들, 지하철과 노숙인들, 번쩍이는 네온사인의 백화점과 상점들 사이사이에 별처럼 박혀있는 수입브랜드의 커피전문점과 햄버거 가게들, 그리고 그들 틈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작고 허름한 노점상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도시들, 서울과 베이징과 도쿄, 파리와 로마 그리고 뉴욕의 공통적인 풍경이다. 이 모든 도시의 거리를 거닐어 본 적이 있는 당신, 그렇지 않은가?

동일한 외관,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상품이며, 어떤 도시에 대해 환상을 품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와 상품에 대해 환상을 품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술문명의 발달과 세련된 도시의 풍경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진보를 가져온 것처럼 비춰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모두의 삶을 위한’ 진보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진정한 진보는 언제나 거북이의 산책 속도로만 온다. 몹시 느리고 지루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이 존재하는 속도로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어떤 도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환상(때로는 ‘혐오’조차도 환상의 일부가 된다)을 품고 있다. 우리에게는 없는, 뭔가 더 그럴싸한 것이 저쪽에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호기심이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한다.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 그중에서도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언제나 유혹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14시간의 시차와 물리적인 거리가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고, 애초에 미국(米國)이었던 것이 미국(美國)으로 바뀌어가는 와중에 각종 미디어가 긴 시간 공들여 만들어 낸 이념적이고 미적인 조작일 수도 있다. 아니면 더 많은 부(한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불렀던) 것에 대한 동경일 수도,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힘에 대한 경외심이거나 부정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미국 특히 뉴욕은 우리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한편에서 도시는 동일하지 않은 것들, 이질적인 것들이 잡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떤 도시든 그곳에는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 이국적인 것과 고유의 것이 뒤섞인 채 공존하고 있다. 그런 점이 도시를 무국적적이고 비시대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도시는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만 그 안에는 또한 무수히 많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인 것들이 잠재해 있으며 곳곳에서 그 흔적들이 자주 발견된다. 올해 우리는 아랍의 봄과 1%의 부의 독점에 반대하는 월스트릿 점거농성 등의 사건을 목격한 바 있으며, 지금 서울에서 반FTA 투쟁의 불길을 경험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오직 ‘도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나에게 태생의 공간인 도시를 삐딱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것은 발터 벤야민의 몇몇 책들이었다. 그는 자기 생의 마지막을 뉴욕에서 보낼 계획이었다. 19세기의 파리를 탐구하는 자신의 연구프로젝트를 동시대의 뉴욕을 연구하는 것으로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벤야민은 미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처음 뉴욕의 맨해튼 5번가에 섰을 때, 그곳에서 나는 벤야민의 도시를 보았다. 거기서 한 세기도 훌쩍 지난 그의 이론과 메모와 단상들이 내 눈 앞에서 거대한 빌딩숲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과 중앙공원으로 바뀌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대단히 기묘하고도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때문에 앞으로 내가 이야기할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 곳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벤야민의 흔적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도시는 내게 아직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나는 이 도시에 잠시 머무르는 자일뿐이며, 언젠가는 또 다른 도시 혹은 고향으로 돌아갈 자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런 자의 시선으로 당분간 이 도시에 관한 인상을 간간히 이야기해 나갈 것이다.

응답 1개

  1. 김상미말하길

    오오 샘! 뉴욕 인상기 기대할게요. 재작년에 일주일 뉴욕 ‘서점’을 전전하던 기억이 가물가물… 샘도 뵙고 싶고 뉴욕도 다시 가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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