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노동잔혹사

군바리

- 김민수(청년유니온)

젊음의 도전!

명망 있는 기업의 인사 채용 광고가 아니다. 병무청 페이지 좌측 상단에 버젓이 자리 잡은 징병검사 공고이다. 아직 군필을 마치지 못한 나에게는 클릭하기 조차 섬뜩한 공간이라 할 수 있으며, 현재진행형 군인으로 존재하는 친구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표어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젊음의 도전이라니. 중년의 백인 남성이 삿대질을 하며 어서 들어오라 손짓하는 미국의 모병 포스터가 조롱과 풍자의 상징으로 전락한 지 수십 년이 지났거늘, 이 놈의 선진 일류국가는 도대체가 수치심이란 것을 모른다. 적의 숨통을 가장 효율적으로 끊는 법을 가르치며, 머리와 가슴에 명중한 탄환의 개수를 세어 포상휴가를 내리는 것을 두고, 젊음의 도전이라니!

국민의 의무 vs 국민의 권리

“그래도 국방은, 대한민국 국민(특히 남성)이라면 당연히 짊어져야 할 의무가 아니야?”

맞다. 국방은 국민의 의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방이 백성의 의무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국가적 차원에서 무기를 내려놓아 국민의 짐을 덜어주거나, 국방에도 시장 원리를 도입하는 새로운 양상은, 그 역사가 매우 짧다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만간 의무를 다해야 할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의 의무와 권리를 놓고, 마치 기업이 수입과 지출을 비교하듯이,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보아야 겠다.

먼저, 권리이다. (평등권/자유권/참정권/사회권/청구권)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나보다는 이건희가 더욱 평등하다. 또한 개인은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가 있고, 이는 집회 결사의 자유 – 언론의 자유 – 사생활의 자유 등의 구체적 내용이 있지만, 나는 FTA 집회에 나갔다가 물대포를 맞았고, 나는 내가 쓰는 좌편향(!?)의 글이 혹여나 관리감독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두렵고, 내가 아는 어떤 이는 국가의 관리 대상이 되어 사생활을 사찰 당했다. 국민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고, 투표로 이를 실현하지만, 어떤 의원실의 비서는 ‘디도스’를 선관위에 구현할 줄 안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고, 교육권과 근로권, 환경권 등으로 구현 되지만, 등록금은 천 만원이고, FTA는 날치기 됐다. 또한 국민은 국가에게 ‘이거이거 해주세요~’라고 청구할 권리가 있지만, 개뿔, 아까도 말했듯이 청구했다간 물대포 맞는다.

이거이거, 국민의 입장에서 국가에게 얻은 수입은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에 가깝다. 나를 요로코롬 막 대하고도, 경제 10대국, 선진일류국가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워 하라니. 국가도 상품이라면, 반품하고 새로 뽑고 싶다. 그런데 요런 놈들이 국민의 의무, 즉 국민의 지출은 따박따박 챙겨 먹는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지라 납세의 의무가 없을까 싶다가도, 필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섭취하고 있는 알콜과 니코틴에 포함 된 간접세며, 뭐만 샀다 하면 붙는 부가가치세… 거기다가 나이 찼으면 딴 생각하지 말고 얼렁 군대에 들어오라는 협박 문자까지 받아야 하고,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근로의 의무를 다해볼까 했더니 일자리가 없고, 기껏 대안이라는 것이 청년 실업자를 인도네시아 탄광으로 보내버리는 일이다. 이런 빌어먹을, 우라질, 지랄하고 자빠졌다.

권리의 영역에서 ‘더욱’ 평등한 이들은, 의무의 영역에서 ‘면제’ 되는 법 또한 빠삭하게 알고 있다. 고위공직이나 재벌가에는 신의 아들이 양성 되고 있으며, 세금 좀 내라고 재산 목록 뒤져 보니 29만 원 밖에 없다 하고… 상황이 이러하니 얌전히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여러모로 수지 안 맞는 장사임이 분명하다.

군인도 노동자다!?

(상대적으로…)최근, 일부 진보진영에서 ‘군인도 노동자다!’라는 주장이 등장한다. 군인에게 최저임금과 노동 3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군인 또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구성원이 된다면 참으로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 될 것 같다. 하지만 ‘신성한 국방의 의무’와 ‘분단 국가’라는 프레임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당위’로 곧장 나아가는 일은 공상과학에 다를 바 없어서,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가치와 철학, 기조를 분명히 한 조건에서 지금-여기의 현실을 조금 더 디테일하게 볼 필요가 있겠다.

뜬금없지만 눈 아픈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 이는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대단히 권위 있는 도식이라 하겠다. 우선, 노동을 할 수 있는 만 15세 이상 인구의 전체는 생산가능 인구로 들어간다.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4천 만 명 정도일 것으로 졸라게 추정 된다. 그리고 이 중에서 ‘구직 의사’를 기준으로 경제활동 인구와 비경제활동 인구로 양분 된다. 구직과 근로의 의사가 있는 집단은 전자이며, 그렇지 않은 학생, 취업준비생, 그냥 쉰 놈 등은 후자에 들어간다. 경제활동 인구는 ‘직업 유무’를 두고 다시 한 번 나뉜다. 조사 당시까지 한 달 중에 임금을 목적으로 1시간이라도 일했으면 취업자이고, 그렇지 않다면 실업자이다.

머리 아픈 이야기는 이 쯤에서 정리하고, 매일 12시간 가량을 꼬박 일(?)하고, 10만 원이 채 안 되는 월급(!?)을 지급받는 군인은, 위의 도식에서 어디에 들어갈까? 어쨌든 시간당 1,2백 원은 받고 있으니 실업자는 아닌 것 같고, 취업자인가? 그렇다고 노동자로 볼 수도 없으니 비경제활동 인구로 보는 것이 정확한 것 같기도 하고…

정답은, 저 도식 안에 없다. 다시 말해 ‘생산가능 인구’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열라게 총질 혹은 삽질 혹은 보초를 서고 있을 대한민국 70만 장병들은, 만 15세 이상이면 근로를 수행할 수 없는 중증의 장애인 조차도 포함되는, 생산가능 인구에 들어가 있지 않다. 생산가능 인구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는 ‘생산력’이 없다는 의미이며, 국제적 기준으로 ‘생산가능 인구’에 포함되지 않는 유일한 집단은 ‘교도소 수감자’이다.

국가는 ‘군인도 노동자’라는 주장을 묵살하기 이전에, 위와 같은 모순에 답해야 한다. 군인들의 폭풍 삽질로 만들어진 ‘사회적 가치’들은 GDP에 포함시키면서, 군인들을 생산가능 인구에 포함시키지 않는 아이러니에 답해야 한다. 자신이 ‘교도소 수감자’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복귀한 내 친구의 절망에 답해야 한다.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간단하고 옳은 방법은, 군인을 생산가능 인구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되겠는가. 제일 눈에 훤한 그림은 우선, 20대 경제활동 인구의 임금 수준이 다이나믹하게 곤두박질 칠 것이다. 어쨌든 ‘월급’을 받고 복무하는 이들은 취업자로 배치 되는 것이 타당하며, 시간당 백원 대의 임금을 받고 있는 이들이 포함 된 통계치는 참으로 볼만 할 것이다. 진보-개혁 진영의 의원들이 관련 부처 장관들을 호통치는 꼴 또한 그림 나온다.

좋다. 어디 한 판 벌여보자. 우선, 대한민국 70만 장병들이 이 모순을 깨닫고 절망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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