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신은 질서(진)와 생명(선)과 조화(미)의 근원적 존재란다.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태초에 초고밀도로 압축된 질량의 대칭구조가 무너져 내리면서 빅뱅이 있었다고 한다. 빅뱅이 빛의 속도로 시공간을 확장시킬 때 초고온의 에너지가 식으면서 소립자가 생성되고 소립자가 모여 원자가 되고 원자, 분자, 원핵세포, 진핵세포, 균류, ········ 식물, / 어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를 거쳐 드디어 인간이 나타나는 위계적인 진화 과정을 거치었단다. 이러한 진화 과정은 안으로는 가능성과 의식의 확장과정이고, 밖으로는 그 가능성이나 의식 또는 자유를 담는 물체나 신체도 복합성을 더해 갔다고 앞에서 말했었다.

이러한 차상위 단위 존재와 차하위 단위존재의 차이만으로 볼 때 진화가 우연의 조합으로 보이니까 유물론적인 생물학자들은 진화에 목적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문학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으로 보면 자연의 진화와 역사의 발전과 개인의 성숙의 연속성은 분명히 개체의 가능성과 의식과 자유의 확장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단다. 특히 인간의 태아 성장과정이 진핵세포에서 시작하여 생물의 진화과정인 위계적인 단계를 거쳐 인간의 모습을 갖추는 과정임을 생물학이 인정한다면 인간의 경험가능성도 똑같은 과정으로 성장하므로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영장류의 경험만이 아니라 포유류 더 거슬러 올라가서 파충류나 양서류 어류 ······· 시절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수정 보완되면서 축적된 운영체제는 거의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 무의식이 우리의 생명(생리와 생태)을 운행하고 있잖아. 우리가 아는 한 현재로써는 우주의 진화에서 가장 앞선 인간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진화 경험으로 보아 그 연속성이 향하는 진화의 방향과 목적을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단다. 진화와 발달과 성숙의 연속성이 보여주는 방향과 목적은 경험의 가능성과 의식과 자유의 확장이었단다. 만약에 진화가 우연의 결과라면 목적이 없을 것이나, 있다면 이 목적을 설정하고 실현해 온 주체가 있을 것이고 그 주체의 이름을 신이라고 부르자는 거지. 경험가능성과 의식과 자유의 확장이라는 목적에 따라 생명체와 인간이 출현했어. 그래서 바람직한 인간성을 신성의 반영이라고 보며 이를 우주에서 신격화의 표본이라고 보는 거야.

그렇다면 경험 가능성과 의식과 자유의 확장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여 뭇 생명이 더 잘 사는 거지. 그래서 생명이 더 잘 살고 생명을 더 잘 살리는 것을 선(善)이라 한단다. ‘선(善)’의 원래적인 의미는 형용사로 ‘좋다’ 또는 동사로‘잘하다’란 뜻이었는데 윤리적인 추상어가 되어‘착하다’ ‘착한 것’을 가리키게 되었어. 그러니까 가장 좋은 행위나 잘하는 행위, 즉 가치있는 행위는 생명을 보다 더 잘 살리는 것이라는 뜻에서 선 중의 선은 사랑이야. 왜냐하면 사랑은 ‘생명을 더 잘 살리려는 노력’이거든.

그러니까 누구든지 진화나 발달 또는 성숙하기를 원한다면 ‘잘 살기’라는 진화나 발달, 성숙의 목적에 따라 선하고 사랑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떤 생명이든지 살아있는 것의 생명권을 존중해야 할 거야. 만약에 우주의 진화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계적인 진화과정에서 그 종에 이르기까지 수십억 년의 진화 경험이 집대성되었고, 생명계의 유기적이 구조에서 어떤 종이 가진 역할이 대체될 수 없으며, 어떤 생명이든지 더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에 공감한다면 생명을 존중하여 더 잘 살리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니. 그러나 선택적인 상황에서라면 수많은 위계적인 단계에서 수많은 종들의 생명 가운데 경험 가능성이 가장 많이 축적된 인간의 생명을 더 잘 살리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생명권을 존중하기 위해 할 수만 있다면 채식을 하는 것이 좋겠으나 고기를 먹으려고 가축을 죽이거나 또는 병든 환자를 고치기 위해서 기생충이나 병원균을 제거하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단다. 채식을 한다 해도 식물 또한 당연히 생명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생명체에 의존해서만 인간의 생존할 수 있다는 존재 조건 때문에 선택적일 수밖에 없어, 그런데도 다른 생물의 생명권을 존중하기 때문에 먹히는 생명체에게 죄송하여 인간이 굶어 죽을 수는 없잖니. 경험 가능성이나 자유, 의식의 확대가 진화과정이라면 세균보다는 지렁이가, 지렁이보다는 사슴이, 사슴보다는 인간이 더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주장을 인간 중심주의라고 아무리 비판해도 인간이 살아있는 생명체로부터 에너지를 얻어야 산다는 생존 조건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가능성이나 의식, 자유도 생물의 먹이 사슬이라는 존재 조건에 제약되어 있으므로 그 사슬의 앞뒤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경험 가능성이 더 큰 쪽의 생명의 가치를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어떤 것에도 인간성이 드러나듯이 자동차나 비행기, 컴퓨터나 로봇 등에도 진선미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드러나 있어. 인간의 경험과 자유와 의식의 가능성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확장시켜서 더 잘 살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시킨 문화나 문명에는 인간이 경험했던 진선미의 어떤 수준이 나타나게 마련이지. 만약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존재하는 것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은 우주에게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무가치할 거야. 그래서 우주 안에서 발견되는 진선미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창조적인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여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더욱 확장하기 위하여 노력한 과정이 우주의 진화로 나타났다고 봐야할 게다. 그렇게 본다면 우주 만물에 나타난 진선미는 그것의 근원인 신성의 반영이라고 봐야 할 게다.

화이트헤드는 신이 모든 존재 단위들의 존재 조건인 자기 결정능력(신이 허용했던 경험이나 의식 또는 자유의 가능성)을 존중하고 더 높은 단계의 가능성을 이상(진선미)으로 제시하는 설득으로 우주의 진화와 역사의 발달과 개인의 성숙을 이끌어왔다고 말한단다. 그러나 무신론자인 그의 제자 버틀란트 러셀은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상들을 숭배하며 우리 자신의 의식이 창조한 신에게 경배한다.’고 한다. 우주의 진화에서 ‘새롭고 좋은 것(이상)’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그들의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세계관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인생관이 달라진다는 것이 유신론과 무신론 논쟁의 핵심이지. 무신론적인 유물론자인 러셀에게 그 ‘새로움’은 물질의 우연한 조합이며 화이트헤드에게는 우연한 조합이 결코 ‘새로움’을 가져올 수는 없으므로 ‘새로움’을 제시하여 새로운 단위 존재를 이끌어내는 진화의 주체를 신으로 가정하는 거야. 나는 당연히 화이트헤드 입장에 서 있고.

인간이 언제나 이상을 꿈꾸는 것은 인간이 가진 의식의 본질이야. 더 높은 수준의 진선미를 경험하기 위해 연구하거나 사색하며 명상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인간이 진선미의 신에게 다가가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신의 설득 방식이기도 하지. 만물이 모두 신의 섭리의 증거지만 특히 경험 가능성과 의식과 자유가 인간에게 위계적으로 축적되면서 진화한 것도 바로 신의 섭리의 증거야. 그러므로 그가 만물의 존재 조건인 자유(경험가능성이나 의식)를 주고 설득으로 진화를 이끌어온 피조물 가운데 진선미에 대한 가장 큰 경험의 가능성을 지닌 최상위 단위존재는 상상의 존재인 천사나 신선을 제외한다면 당연히 인간이므로 인간이 피조물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존재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인감중심주의라고 아무리 비판해도 사실을 바꿀 수는 없지.

신의 창조적인 모험이 자신의 가장 뚜렷한 존재 증명으로써 자기 닮은 인간을 진화시켰고 그 결과 인간은 신이 준 창조 능력으로 창조적인 모험을 거쳐 문명을 발달시켰다. 그래서 인간의 이상은 신이 준 신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것이 되었지. 그러나 신을 닮은 가능성과 의식과 자유를 거꾸로 사용할 수도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준 신의 모험이 자칫하면 생태계를 파괴하여 이 지구를 아주 못 쓸것으로 만들지도 몰라. 신이 인간에게 가능성과 자유와 의식을 많이 줄수록 더 큰 모험이 될 수 있고, 그 결과가 오로지 인간 때문에 지상에는 악이 들끓고 지구상에서 신의 모험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어. 그렇더라도 신은 자신의 진선미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설득하며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는 모험을 멈추지는 않을 게다. 진선미가 신의 본질이며, 이상이며, 자기실현이며, 그것만이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니까.

신조차도 더 큰 우주의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그의 피조물의 존재 조건으로써 자유라는 자기결정성을 존중해야만 하기 때문에 결코 우리 우주의 신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다만 신의 실험실인 우리 우주의 진선미는 우리 우주의 신에서 온 것이며 우리 우주의 가치일 뿐이고, 다른 우주가 추구하는 가치는 진선미가 아닐지도 모르며, 운영체제도 달라서 다른 법칙과 원리와 가치로 운영될 지도 몰라.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우주에 존재하는 질서(진)와 생명(선)과 조화(미)를 보면서 진선미의 근원적 존재를 잠정적으로 신이라고 부르자는 거야. 홍아야, 가치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자꾸 곁가지로 빠지는구나. 가치의 원천이 신이라는 것을 밝히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단다. 그러나 신 얘기를 빼더라도 진선미의 가치는 우리의 경험 안에서 얼마든지 증명되지 않니. 네가 무언가를 추구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수준의 진선미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란다.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만 본다면 그것은 분명히 신성의 일부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자유와 의식만큼 선택지가 많기 때문에 어떤 인간은 무지할 수도 사악할 수도 추잡할 수도 있지. 그러나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는 바람직한 인간성만으로 본다면 인간은 우주의 신격화(신의 성품을 닮음 또는 신의 성품이 드러남)를 가장 잘 드러난 존재라서 동학(東學)에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고 하더라.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귀한 존재이니 보이지 않는 하느님 대신 인간을 하느님처럼 섬기라는 뜻일 거야.

만약에 진선미를 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성의 진화를 통해 우주의 진화의 방향이 진선미의 실현이라는 창조주의 목적을 알 수 있다면 인간은 진선미와 관련된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의 근거를 발견할 수도 있을 거다. 그리고 네가 이러한 신념을 가진다면 더욱 더 진선미라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살게 될 거다. 진선미 이것이 신과 우주와 인간의 영원한 가치라는 것을 설득하려고 이글을 쓴단다. 가치에는 상대적인 가치와 절대적인 가치가 있으며, 절대적인 가치는 차상위 단위의 수단이 아니라 각 단위 존재가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진화와 발달과 성숙의 단계에서 달성된 진선미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과 의식과 자유의 가능성에 있다고 했어. 그러나 절대적인 가치도 포월적이고 위계적이어서 무생물보다는 생물에게, 다른 생물보다는 인간에게 더 많은 우주의 진화가 축적되어 진선미를 경험하고 실현할 가능성이 더 많으므로 인간이 더 가치가 있단다. 그러니 결국은 인간을 잘 살리려는 삶이 잘 사는 삶이란다.

홍아야, 진선미 대한 인간의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서 스스로 잘 살게 하는 데는 수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 진정 네가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에 동의해다오. 무엇보다도 네가 경험한 진선미를 실천함으로써 서로 잘 살게 하는데 다 같이 노력하도록 네가 앞장서기를 바란다. 인간이 진선미에 대한 경험과 표현보다는 그 부산물인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더 섬긴다면 너 잘 살려고 남 못살게 하는 거란다. 진선미를 잘 응용해서 생긴 돈은 남들의 노동 가치이고, 명예는 남들이 알아줘서 생긴 것이며, 권력은 남들이 결정권이나 영향력을 위임해서 생긴 것이니 모두 사회적인 자산이잖아. 이를 독점하거나 독단하거나 독재하려고 하면 누군가는 이 가치들을 빼앗기게 된단다. 그것들을 더 많이 가지려고 아귀다툼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돈이나 권력 명예)이 이들 사회적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분배해준다는 거짓말에 속지 말아라. 네가 만약에 이러한 사회적인 공공재를 위임 받았다면 그것으로 너보다 남을 먼저 섬겨라. 이것을 함께 나누려 할 때 진선미가 실현되어 모두가 함께 잘 살게 된단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로 사람을 먼저 섬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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