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3.1 운동, 2백만 갈래의 만세소리 ― 원곡면 최은식의 심문 전략

- 권보드래

3.1 운동은 아직도 일종의 불가해한 운동이니 만큼 그 구체적 양상은 드러나지 않은 바 많다. ‘민족’의 ‘독립’이라는 이념 아래 전 조선인이 궐기, 사망자만도 7천여 명에 달하는 희생에도 불구하고 1919년 봄철 내내 저항 운동을 벌였다는 것이 공식 서사의 요체이지만, 지도자도 조직도 태무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일어설 수 있었는지, 울릉도에까지 전파된 운동의 놀라운 감염력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동기와 속내에서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를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진 건 별로 없다.

3·1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예컨대 “음력 2월 그믐날 밤에 세 사람이 마을 뒷산에서 만세는 부”르는 식으로도 운동을 시작했다. 대개 집집에 통문 돌리는 선전 과정이 앞섰지만, 사전 계획이나 조직 없이 몇 사람이, 심지어 한 사람이 만세를 시작한 일도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방문을 붙이거나 격문을 뿌리는 것도 소수의 실천일 때가 많았다. ‘서울서 학생들이 만세를 불렀다더라’, ‘조선이 독립됐다더라’, ‘만세를 부르면 독립한다더라’― 소문 몇 마디가 그렇듯 감염력이 높았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1910년 이후 근 10년 동안 다른 삶, 다른 세상에의 갈망이 한번도 폭발하지 못하고 극한까지 팽창해 왔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만세’라는 단순한 한 마디는 잡기하다 곤장 맞은 원한, 세금과 부역에 허덕였던 불만, 일본인과의 차별을 감수하고 일본인 앞에 굽신거려야 했던 굴욕감 등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당시 인구의 10%에 육박하는, 2백만 가까운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2백만 종류의 ‘만세’였을 것이다.

그러나 심문 과정에서 봉기 참여자들은 대부분 협박 때문에 나섰다고 둘러댔다. 나오지 않는 집에는 불을 지른다고 했고, 돌아가는 놈은 밟아 죽인다고 으르댔다는 것이다. 누가 선동했냐고 물으면 으레 옆 마을 아무개를 짚었다. 헌병대에서 고문한 후 검찰로 돌리고, 다른 진술을 하면 다시 헌병대로 되돌리는 조리돌림을 당한 후에는 무조건 발뺌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경기도 원곡면에서 체포된 최은식의 경우 검사의 질문을 제외하고 당사자의 답변만을 추려본다면 모르쇠의 거대한 계열이 형성될 정도다. “그런 일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듣지 못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 사람이 거짓 진술을 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렇게 말한 일이 없다.”, “나는 가지 않았다.”, “거기에도 안 갔다.”… 무려 30차례가 넘게 반복된 ‘모른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끝에 최은식은 그러나 “독립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사실만은 긍정했다. 총독정치에는 아무 불평이 없으며, 그저 조선인인 까닭에 독립을 바랄 뿐이라고 엉거주춤하긴 했지만 말이다.

최은식은 보통학교를 나왔고 장로교 신자이기도 했으니 모르쇠로 일관하기엔 불리한 처지였을 텐데도 그랬다. 최은식의 진술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협박에 못 이겨 군중을 따라가 만세 한번 부르곤 슬그머니 빠져 나왔다는 진술이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최은식이 주재소 방화에도, 우편국 전신주를 잘라 넘어뜨리는 데도 앞장섰다는 이웃의 진술을 되레 의심해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체포 과정에서부터 토끼몰이 당하듯 당하고, 헌병대에선 구타와 협박에 시달리고, 감방에 돌아가선 한 방에 무려 2백까지 수용했다는 비참한 정황에서 몇 달을 보내면서 ‘만세’로 폭발했던 그 숱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를 찍어야 매질에서 풀려나는 곤경은 어떻게 넘겼던 것일까. 실제 적극적이었던 아무개 이름을 대서? 가능하면 인연 먼 옆 마을 아무개를 팔아서? 혹은 평소 밉보았던, 아니면 안전하리라 생각된 아무개 이름을 둘러대서?

최은식이 검사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한 것은 1919년 5월 30일자 심문에서다. 앞서 5월 4일 심문에서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최은식은 3월 1일 상경했던 경험이 있었으며 따라서 서울에서의 시위 소식을 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주동자로서의 역할을 부정하기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최은식은 당당하게 자기가 한 일을 진술했던 것 같다. 서울에 함께 다녀 온 다른 세 사람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했고, 군중을 동원했으며, 주재소에 방화하고 우편국을 파괴할 때도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때는 “취사장에는 내가 방화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5월 30일 심문에서는 너댓 사람의 증언이라며 ‘불붙은 솔잎을 들고’, ‘기둥 밑에 서류더미를 쌓아놓고 불붙이는 것을’ 보았다고 추궁하는데도 딱 잡아떼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짓말이다.”로 시종한 것이다.

말을 바꾼 보람도 없이 최은식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내란죄가 적용된 때문이었을 터인데, 면사무소·주재소·우편국을 파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일본인 잡화상이며 사채업자의 집과 가게까지 습격한 것도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최은식에겐 1960년대에 훈장이 추서되었지만, 보통학교 졸업생이자 장로교 신자, 게다가 6백 원 출자를 약속하고 오산 읍내에서 잡화상을 경영할 정도로 집안 형편도 넉넉했던 그가 왜, 어떻게, 어느 정도로 시위에 관여했고 심문에는 어떤 속내로 맞섰던 것인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는 아직 너무나 좁다. 그런 미지의 영역 2백만 갈래가 합류했던 사건을 우리는 3·1 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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