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원전사태 이후 일본>3·11 이후의 지구적 아나키즘

- 고소 이와사부로

3·11 이후의 지구적 아나키즘

고소 이와사부로
번역 : 윤여일

만약 ‘발명’되는 것이 실제로는 ‘우연’을 기호로서 그리고 호기로서 여기는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전시장을 즉흥으로, 즉 과학과 기술의 ‘비직접적 생산’인 재해와 (산업적 혹은 그 밖의) 돌연변이로 열어갈 때이리라.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연성이 실체를 개시한다”고 한다면, ‘실체’의 발명은 곧 ‘우연성’의 발명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난파는 배의 미래주의적 발명이며, 추락은 초음속 비행기의 발명이며, 체르노빌의 용해는 원자력 발전소의 발명이다.

– 폴 비릴리오

나는 박두한 하나의 죽음에 낙인 찍혔지만, 그리하여 나는 진정한 죽음이 두렵지 않다.

저것들이 전진하는 무서운 모습, 그것이 안기는 절망을 나는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그곳 너머에 영원으로의 길이 열리는 인생의 결절점이 있다. 절망은 거기로까지 미끄러져 간다. 그곳은 곧 영원한 이별이다. 내가 자신을 인간으로 느끼는 저 중심점에서 저것들의 무서운 모습은 그 칼이 미끄러져 들어와 내 명석한 현실에 대한 꿈과 나를 이어주는 생명의 신을 끊는다.

– 앙토냉 아르토

3․11의 불가역성

3·11 대재해 이후, 특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이후, 나는 외지인 뉴욕에 있으면서 동료들과 함께 오로지 일본에서 나온 텍스트를 영역하고, 이 사건에 반응하는 영어 텍스트를 일역해 <http://jffisures.org>에 게재하는 일에 몰두했다. 일본 현지에서 생활과 투쟁을 공유할 수는 없지만, 이번 사건으로 내 머릿속은 완전히 뒤집혔다. 전에 생각하던 것들을 실감 어리게 생각해낼 수 없을 정도다. 오로지 이 결정적인 단절과 직면하는 것, 그 단절을 내부와 외부의 시좌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해하는 것. 이것이 사이트의 주안점이다.

북부 아프리카/아랍 세계의 혁명, 유럽의 봉기와 학생운동, 미국의 노동운동 등 세계변혁의 추세는 우리 대부분을 고무시켰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3·11과 더불어 거기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 더해졌다. 그리고 그 차원은 인류사적 의미에서 불가역적이다. 지금 이 불가역성을 사고하지 않는다면,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변혁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부터 쓸 소론은 그 시도를 위한 단서다.

그것은 어떤 불가역성인가?

일본이라는 기호는 외부에서 보기에는 지금껏 많든 적든 일종의 선구적 형상을 체현해 왔다. 역사상 유일한 원폭체험, 전후의 기적적 경제부흥, 새로운 기술혁신, 이상적 관리사회, 대중소비사회의 실현,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가지 양상, 애니메이션 등의 대중문화, 10년 이상 지속된 불황 아래서의 사회통제. 그리고 후쿠시마가 도래했다.

후쿠시마는 결정적으로 현대사회의 한 가지 이상형을 내파했다. 원자력 사고를 계기로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그 소비관리사회가 내적 문제와 한계를 더할 나위 없이 묵시록적 형태로 드러냈다. 지금껏 ‘인류의 진보’로 여겨지던 ‘장치’의 한 가지 도달점 – 에너지 공급의 효율화와 생산의 고도화, 정보/과학기술, 그것들과 복합적으로 얽힌 관료기구와 시민사회 – 이 재해를 계기로 자기붕괴하여 자본주의적 발전이 구동한 인간 존재의 아슬아슬한 한계를 지구 내재성과의 관계에서 개시해버린 것이다.

이 개시는 인류에게 새로운 잔혹을 안겨다주었다. 민중의 일상생활은 전례 없는 강도의 방사선 피폭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피폭이 일상화되었다. 천문학적 시간이 지나야 잦아들 영향은 모든 영역, 예를 들어 일상생활, 노동, 사회관계, 통치, 투쟁에서 나타나고 그것들을 재규정한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인간과 자연환경의 직접적 관계성을 전례 없이 난해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정부의 통치력이 약화됨과 동시에) ‘세계 원자력 체제’라고도 불러야 할 새로운 통치와 경제 형태를 낳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생산/관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재해로부터 전면적인 부흥을 꾀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자력을 폐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과 공존하고, 즉 오로지 붕괴로 향하면서, 붕괴의 사실을 알면서도 지연시키는 기구/장치를 인류에게 강제할 것이다. 즉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이윤화와 관리를 도모할 뿐이다. ‘재해 자본주의’(나오미 클라인)의 궁극적 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 체제는 자기붕괴를 향한 무제한적 행정을 인류에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한편, 여전히 여진이 이어지고 또다시 찾아올 대지진을 우려하는 일본열도, 특히 동부에서는 이제까지의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른바 전후 55년 체제에 커다란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황을 감당할 명확한 주체성은 형성되지 않았지만, 사회변동이 도래했다는 실감은 주민층에게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방사선 피폭을 수반한 기구/장치의 자기붕괴는 동시에 ‘재해 자본주의’와 대척되는 것츠로 제기된 레베카 솔 니트의 ‘재해 유토피아’에 새로운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회복할 수 없는 재해, 즉 피폭의 일상화는 다른 세계를 창조하려는 ‘희망의 원리’(에른스트 블로흐)에 새로운 질곡을 안겼다. 피폭의 가능성은 유토피아적 사고의 시간 개념(사정(射程))을 무제한화하고, 공간 개념(장소)을 극히 제약한다. 그것은 ‘아직/없는 의식’에 의한 ‘아직/없는 존재’의 실천에 지금껏 없었던 무거운 짐을 지운다.

물론 우리는 ‘희망의 원리’를 저버릴 수 없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려면 바야흐로 어떤 결정적 우회가 요청된다. 그 대목에서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격렬한 투쟁의 무대가 되고 있는 ‘풍문 피해’를 둘러싼 ‘정보 전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도 소비관리사회의 체면을 유지하려는 체제는 애매한 정보를 추잡하게 흘리고, 어용학자를 동원해 한편에서는 전국민 일치의 협력체제를 장려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상황을 조금씩 타개해 ‘안전’과 ‘안정’을 회복하자고 민심을 몰아간다.

거기에 맞서 싸우는 민중은 절망을 얻고 절망을 공유하기 위해 정동의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며, 희망에 다가가기 위한 사실의 인식, 즉 ‘절망의 공유’를 위한 투쟁이다. 여기서는 ‘희망의 원리’가 지금껏 직면한 적 없는 난관이 – 자기역설이라는 형태로 – 가로막고 있다. 즉 싸우는 민중은 성실한 죽음, 병, 절망, 괴로움, 한탄, 슬픔을 공유함으로써만 비로소 함께 희망을 말하는 지평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의미에서 3·11은 불가역적이다.

끝없는 사회전쟁 – 그 적은 누구인가?

일본에서 터져나온 절박한 목소리 가운데 “대체 몇 명의 친구를 잃었는가?”라는 비탄도 들려온다. 이건 정보전쟁이 얼마나 뿌리 깊으며 격렬한 계기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구유고슬라비아처럼 국민국가의 분해 과정에서 과거의 민족 망령이 부활하여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적으로 바뀌지는 않겠지만, 따라서 내전으로 발전하지는 않겠지만, 일본에는 몹시 난해한 사회적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 균열은 아마도 일본 국민이라는 자기동일성을 해체하고, 거기로부터 새로운 주체화를, 그것을 뛰어넘는 세계변혁으로의 주체화를 형성하는 계기를 품고 있을 것이다.

이 균열/사회적 전쟁이 어떤 행방을 보일 것인지는 현대사회의 여러 영역들에 강제되는 불가역적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달려있다. 그것을 외면하고 지금까지처럼 계속 생활하는 시늉을 낼 것인가, 그것과 마주할 수 있는 지식과 의식을 형성하여 모든 걸 다시 시작할 것인가. 앞으로 전개될 투쟁은 이 차이를 둘러싼 정동과 생의 형식을 통째로 휘감을 것이다.

피폭 속에서 살아가는 일상생활(재생산 영역)이란 어떠한 것일까? 어느 시점에서 이것은 일본 열도를 초과해 세계 각지로 비화할 것인가. 앞으로 일생생활에서는 여러 변화가 드러날 것이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어쨌든 앞으로 생의 재생산을 맡는 일생생활의 투쟁이 일본 열도에서 발하는 세계변혁운동에서 넓은 토대를 이룰 것이다. 여기에는 고난과 가능성이 집약되어 있다. 방사선에 노출되면서, 사람들은 이제까지처럼 자연을 향유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무원칙하게 소비하며 생산을 떠받칠 수도 없다. 이 문제에 대응하여 민중들은 길고긴 사정(射程)에서 삶의 재생산에 관한 정보를 탈취하고 기술을 개발해갈 것이다. 민중이 기선을 잡고 생활환경과 먹거리의 안전, 생식, 육아, 그리고 피폭치료의 기술을 개발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ACT UP!’의 경험을 하나의 유효한 모델로서 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에이즈를 둘러싼 사회전쟁에 직면하여 이 운동은 상(喪), 간호, 의료 연구, 정보 전쟁, 가두 투쟁이라는 폭넓은 영역으로 지평을 넓혀갔다. 거기서는 한탄과 절망과 분노라는 극한적 정동이 공유되었다. 그러한 정동의 공유에서 출발해 자신들의 다치기 쉬운 삶, 병들고 있는 신체를 무기로 전선을 구축해갔다. 일본 열도에서는 보다 많은 인구를 대상으로 삼아 (다른 의미에서) 보다 까다로운 병과 마주하는, 보다 긴 사정의 투쟁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후쿠시마 이후의 노동이란 어떠한 것일까? 원전 사고를 처리하는 노동이 다른 모든 노동의 모델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국민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노동이 찬미되어 그 밖의 생산영역에서도 모범이 되어가는 것일까? 우선 여기서는 초보적인 의문이 생긴다. 왜 일본정부와 전력회사는 원전 재해의 현장 처리를 군대, 전문가, 특수부대 혹은(특히 블랙워터 등의) 엘리트 사설 영리군에게 맡기지 않았을까? 군대란 이럴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던가? 이런 목적을 위해 훈련되고 녹을 받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 왜 정규직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뒤처리 작업을 강요하는가?

재해지에서 고용된 노동자 가운데는 해일로 가족을 잃은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이런 이상한 책무는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 노동은 오히려 노동 개념의 내파를 고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재해지의 노동자는 자진해서 일을 하고 있으니 이른바 노예는 아니다. 하지만 책무의 중압감은 너무나 가혹하다. 이것은 오히려 순수 ‘잔혹’의 자주적 향유다. 따라서 갖가지 미명 아래서 구동된 이 잔혹 노동 자체가 ‘노동의 폐기’라는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표적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 사정이 너무나 길고, 그 결말은 우리의 망막 안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더라도 ….

어쨌든 이런 일상생활과 노동을 민중에게 강요하는 기구가 존재한다. 그것을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자기붕괴의 갈림길에 놓인 자본주의/국민/국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그것들이 주도하는 기술, 전문적 지식, 관료기구, 정보/교통망, 시민사회 등 모든 것을 말려들게 만드는 ‘기구/장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기구/장치’는 그 주체가 불분명한, 즉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망상 조직적 관리체제다. 그리고 후쿠시마란 이 기구/장치의 자기붕괴이며, 그 과정에서 인적 재해의 사회적 책임의 소재 역시 산산조각나고 있다.

후쿠시마적 잔혹 노동의 인류사적 출현은 이런 착종상태에서 기인한다. 일본정부와 전력회사가 그 기구/장치의 주요한 얼굴, 무대 위의 얼굴임은 분명하다. 그것들은 재해의 뒤치다꺼리를 한 번 쓰고 나서 버릴 노동력에게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의 통치/관리기능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대신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형성되고 있는 ‘세계원자력체제’로서의 ‘제국’에 가담함으로써 존속을 꾀하고 있다. 이 신세계 체제는 자신의 얼굴을 전면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의 무능성의, 있는 듯 없는 듯한 보완자로서 행동해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형성하는 국가/자본은 거꾸로 일본정부의 정보/정동 전략을 점차 배우고 답습해갈 것이다.

자본주의가 구동하는 장치는 현재 세계 민중의 생의 영역으로 보다 넓고 깊숙하게 침투하고 있다. 점점 더 우리는 그 장치와의 관계 속에서만 주체화에 관한 계기를 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3·11 이후의 세계변혁 운동이 그 ‘기구/장치’를 표적으로 삼는다면, 그 투쟁은 우리 자신의 자기해체와 자기재편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전면적인 전선을 구축해야만 기구/장치를 해체하고 재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세계변혁을 향한 일본 열도에서의 투쟁이 도화선 역할을 맡을 것이다. 후쿠시마에서 기구/장치의 자기붕괴가 인류사적으로 개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구/장치의 내파가 방사선 피폭이라는 형태로 민중 삶의 영역들을 이보다 잔혹할 수 없게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본 열도에서 적의 복합적인 존재 양태가 지금 분명히 드러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세계의 혁명적 지성은 일본에서 도래해야 할 투쟁을 분석하고 또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장치는 몇 가지 발전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지금은 자기붕괴를 양식으로 삼아 죽음을 조금씩 연기하려 하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 몸부림이 인류에게 앞으로 새 희망을 안겨줄 리는 없다. 만약 앞으로 기술에 미(美)가 있을 수 있다면, 장치를 해체/재편하는 민중적 투쟁이 주도하는 새로운 발명/사용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지금은 그리운 울림마저 갖는 도시 공간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하나의 가시적 정점으로 삼아 앞으로 장치는 지구의 모든 땅을 도시화로 내몰아갈 것이다. 그것이 남반구에서 메가 슬럼을 낳고, 각지에서 준도시적 공간을 출현시키고 있다. 즉 장치는 보다 넓고 보다 깊게 지구적 신체의 어디든 간에 자신과 일체화하려 든다. 후쿠시마는 그 확장의 전초전에서 벌어진 사고/사건이다. 확장이 진행되면 진행되는 만큼, ‘선악의 피안’에 있는 지구의 자기운동과 더욱 격렬하게 마찰할 것이다. 비릴리오가 말하는 ‘우연성’과 ‘실체’의 관계가 점점 밀착하고, 장치는 보다 많은 보다 커다란 재해를 ‘발명’해 나갈 것이다.

3·11 이후 원전 반대 운동의 물결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것은 반길 만한 일이다. 그러나 3·11 이후의 원전 반대 운동은 원전 반대라는 단일한 주제에 머무를 수 없다. 이미 밝혔듯이 3·11의 불가역성은 너무나도 크고 깊다. 반/탈원자력 발전은 이제 반자본주의/국민/국가이며, 기구/장치의 해체와 재편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현재 일본에서 진행중인 사회 전쟁이 함축하는 모든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와 지구의 틈에서

2010년 4월, COP15(유엔 기후변화 회의)에 대항하여 볼리비아의 코차밤바에서 개최된 ‘기후변화와 어머니 지구의 권리에 관한 세계 민중회의’ 이후 자연과 지구의 권리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졌다. 거기에 참가한 여러 운동체는 환경에 관한 권리들을 유엔에 인지시키고자 교섭했다. 그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생태적 다양성과 문화적 다양성의 상호관계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선주민 집단이 주도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환경보호 운동을 넘어 만물의 근원인 지구의 이름에서 자본주의/국민/국가에 대항하고 기구/장치를 해체/재편하는 지향성을 품었다.

2010년 6월, 그 광범한 운동은 물에 관한 인권을 유엔에 인지시켰다. 이것은 중요한 성과다. 하지만 선주민의 애초 동기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진정한 문제는 물 자체의 권리가 아닐까.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물에 관한 권리를 평등하게 획득하려면, 먼저 물 자체가 오염과 사유화로부터 벗어나 커먼으로서 존재하고 유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관건은 사람들이 물에 관한 어떠한 권리를 향유하는지 혹은 물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이다. 여기서 사유재산의 확장을 꾀하려고 근대국가가 제정한 인간 세계의 법률과 자연/지구의 자기운동이 충돌한다. 인간은 자신이 그 일부인 ‘비기관적 신체’로서의 자연/지구가 존속해야 존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의 법체계는 대체로 자연/지구를 주체성을 결여한 대상으로 간주하며, 일방적으로 소유하고 충당할 수 있는 자원으로 다룬다. 궁극적으로 커먼한 지구적 신체를 어디까지나 개발/상품화하려는 것이다. 법률이란 그 쪼갬의 코드화이며, (국제) 정치란 쪼갬에 혈안이 된 세력들 간의 절충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국민/국가의 계급적 이해에 근거한 법체계는 커먼으로서의 지구에게는 적이다. 따라서 선주민 그룹이 문제로서 끌어낸 ‘어머니인 지구의 권리’를 철저히 인지한다면, 지구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 권리 주장을, 즉 사유재산에 근거하고 있는 근대적 개인의 주체성을 해체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을 타도하는 것, 기구/장치를 해체/재편하는 것은 지금 그러한 차원의 문제다.

만약 앞으로도 ‘에콜로지’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상의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펠릭스 가타리가 제창한 세 가지 영역(마음, 사회, 환경)을 횡단하는 운동일 때다. 여기서 볼리비아 선주민 운동과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국부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Movimento al Socialismo이 주도한) 복수의 국민국가 볼리비아 사이에서 격화하는 대립은 더욱 중요성을 갖는다. 일본과 볼리비아, 후쿠시마와 코차밤바는, 기구/장치를 해체/재편하는 투쟁에서 반대극의 모델이 되어갈 것이다.

이상은 철학적 차원에서 ‘세계’라는 개념과 ‘지구’라는 개념의 차이를 보여준다. 세계란 자본주의와 국가가 통제하는 인간 사회들이 (세계정치, 국법, 국제법과 같은) ‘구조적 언어’로 통상, 조약, 선전포고라는 상호관계의 연극을 상연하는 무대다. 그것이 세계사의 무대다. 반면 지구란 그런 배우와 무대, 그리고 그것들을 떠받치는 환경/상황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공장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 전적으로 기반하는 우리의 일상에서 의식되지 않는 (아마도 부정형의) 운동이다. 그것은 구조적 언어가 아니라 ‘기계적 운동’에 의해 구동된다. 구조적 언어가 집합적 영역에서 의식(세계)을 체현하는 말이라면, 기계는 의식(세계)과 무의식(지구) 사이를 횡단하는 흐름/생산/운동인 것이다.

기구/장치의 지구적 신체로의 확장/일체화는 구조적 언어에 의해, 즉 세계의식의 무대에서 절충되고 사고되고 발화되지만, 동시에 보다 본질에서는 기계적 영역의 사건이다. 여기서 자본주의/국민/국가의 무책임과 무능력함이 드러난다. 국제정치는 환경오염을 해결하지 못한다. 조정하고 관리할 뿐이다. 확실히 그러한 의미에서 기구/장치의 내파인 후쿠시마는 ‘세계와 지구의 충돌’이라는 사건이었다. 즉 자연재해라는 형태로 무의식적 지구가 의식적 세계로 부상하고, 지구라는 궁극적 커먼의 곳곳으로 넓고 깊게 확장하여, 그것과 일체화하려고 해온 기구/장치에 전대미문의 균열을 낸 것이다. 기구/장치의 내파는 그런 일체화의 전선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 충돌의 여진은 바야흐로 인간의 모든 것 – 주체성, 사회성, 역사성, 세계성을 흔들기 시작했다.

세계와 지구의 이러한 충돌은 우리에게 어떤 결정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집합적 의식으로서의 세계에서는 대립/모순/항쟁과 그 해결인 통합, 즉 세계사가 주된 이야기로서 자리한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집합적 무의식으로서 지구의 언어, 즉 기계적 운동에 근거해 사고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세계의 이야기 아래에 지구의 이야기가 관류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먼저 자본주의적 개인/주체성을 해체해야 한다.

3·11 이후 일본열도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절망, 한탄, 분노는 해체의 급진적 지표다. 그 정동은 먼저 기계적 운동을 각성시켰고, 우리는 ‘자양의 어머니’인 동시에 ‘분노의 여신’인 만물의 근원 – 지구와 함께 존재한다는 숙명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국민국가의 대립/모순/항쟁과 통합의 무대인 세계사를 아래로부터 지탱하고 있는 불가피한 공생과 상호부조, 인간의 집합 신체를 관장하는 ‘속박’의 윤리를 획득하고 말았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사의 기원에 존재했다고 상정되는 하나의 진리/말을 무화하고 유기적 생과 무기적 생을 아우르는 지구적 운동으로 다가간다. 그것은 기원 없이 진동하는 능선의 늘어섬으로서 지구와 함께 생성하는 운동의 각성이다. 이리하여 문자 그대로 ‘지구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다른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는 문제가 바뀔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우위에 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부정적 운동으로서의 낡은 평면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평면에서 바야흐로 문제는 세계를 믿는 사람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의 존재만이 아니라, 그 운동과 강도의 가능성을, 즉 동물과 광물에 보다 가까운 새로운 존재를 다시 낳기 위한 세계의 가능성에 관여하고 있다. 아마도 이 세계를, 이 삶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곤란한 사명, 혹은 오늘날 우리의 ‘내재성의 평면’에서 여전히 찾아나서야 할 존재 양태의 사명인 것이다. 이것은 경험주의자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인간 세계를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수 없이 많다. 우리는 약혼자와 신 이상으로 세계를 상실했던 것이다.) 정말로 문제가 바꿔버린 것이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1991년에 출판한 마지막 공저에서 ‘세계의 상실’과 ‘지구적 시대의 도래’를 예견했다. ‘낡은 평면’에서 기구/장치는 여전히 지리적 확장의 가능성을 맹신한다. 환경 문제는 이미 위기 단계에 들어섰지만, 국제정치에서는 어디까지나 ‘특수 문제’로 다뤄졌다. 하지만 2009년의 시점에서 선진국 주도의 환경회의 COP는 처절하게 파탄났다. 그리하여 ‘국제정치’의 무효화 혹은 ‘세계의 상실’을 말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3·11 이후 자본주의의 상품화 그리고 도시화의 한계, 즉 기구/장치의 확장의 한계가 방사선 피폭의 일상화를 통해 지구환경과의 폭력적 관계 안에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리고 주전장은 누가 보아도 보다 ‘동물적’이고 ‘광물적’인 차원, 즉 ‘기관적 신체’와 ‘비기관적 신체’를 아우르는 ‘지구’로 이행했다.

이런 정세에서 세계 원자력체제에 맞선 투쟁은 지구적 계급투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국민/국가, 그리고 기구/장치에 대항하는 폭넓은 의미에서의 ‘신체’의 투쟁이 될 것이다. 거기서 우리의 ‘육체’(혹은 기관적 신체)는 한편에서 개체로서 자기붕괴하는 기구/장치에 속하면서도, 한편에서 ‘비기관적 신체’라는 기계적 접합, 지진과 기상을 포함하는 지구적 운동과의 기계적 접합을 통해 ‘신체’ 측에 속하게 된다. 즉 우리의 육체는 두 가지 의미성을 끌어안는 운동이다. 그것은 한편에서 방사선에 노출되고 죽음과 병에 시달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할 수 없이 ‘환경 이민’의 거대한 조류를 형성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죽음과 병의 가능성을 품으면서도 지구와의 의식적 교감/교류를 통해 근대적 주체성과 자본주의적 개인을 해체하고, 지금껏 각종 기술이 개발해온 모든 것을 재도입하여 스스로 생존하기 위한 사용법을 고안해 전에 없던 광범위한 전선을 구축할 것이다. 이 양가적 육체는 세계를 능가하는 지구의 일부가 되어갈 것이다.

그것은 반역하는 육체이며, 육체의 반역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또 한 사람의 혁명적 인물상을 환기해야 한다. 저주받은 시인/배우/극작가 알토냉 아르토다. 아르토는 자신의 말과 육체를 통해 정신분열증만이 아니라 그 치료법에서 기인하는 증후와 투쟁했다. 그리고 그 투쟁을 무기 삼아 주체성/개인의 내파를 내걸고 구조적 언어의 표면을 파쇄하면서 자기의 신체와 지구적 신체를 기계적으로 접합하고자 했다. 그는 굳이 자신의 신체에 자리한 ‘고통’과 ‘잔혹’을 방법으로 끌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리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 지도, 강도들의 접합, 기체나 물결이나 흐름의 지도를 작성해 갔다.

일본 열도는 세계 지리에서 아시아 대륙의 극동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아시아에 속한다. 하지만 방사선은 기상과 함께, 기류와 함께 여러 흐름으로 흩어져갈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잔혹의 지도를 형성해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구적 계급투쟁의 지도와 겹쳐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3·11 이후의 지구적 계급투쟁의 주체인 ‘신체’는 자신의 죽음과 병을 소재로 삼아, 절망, 한탄, 분노를 무기로 삼아 묵시록적 대지로부터 일어서려 하고 있다.

눈에는 칼을, 입에는 불을, 엉덩이에는 절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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