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누나, 그리고 정조(正祖)

- 오항녕

누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내게 다가왔다. “가령 내가 그것을 했다고 쳤을 때, 나는 이런 행동을 한 나 자신과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객설 한 마디 하련다. 양해 바란다. 내게는 어렸을 때 콤플렉스가 있었다. 공부도, 키도, 얼굴도, 집안 형편도 아니었다. 이 중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콤플렉스란 다름 아닌 누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소종(小宗)이기는 하지만 종손이다 보니, 애당초 같은 항렬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형이나 누나가 없는 게 당연했다.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친구에게 누나가 있으면 사정없이 부러웠다.(이상한 것은 형이 있는 사람은 별로 부럽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윗 학번 여자 선배에게 스스럼없이 누나라고 부르는 친구들을 보면 실제로는 부러워하면서도 ‘국남이! 누나가 뭐야, 형이지!’라며 핀잔을 주었다.(그땐 통상 남녀 구분 없이 선배를 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누나가 없다는 사실은 도대체 만회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 이 아니라 나의 조건이었다.

그러다 최근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계기가 생겼다. 인간+X라는 전주의 세미나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요즘 아렌트의 책을 읽고 있다. 그런데 이 분이 너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이따 얘기하겠지만 몇 년 전에 《정치의 약속》(김선욱 옮김)에서 한 번 필이 꽂힌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체주의의 기원》Ⅰ(이진우․박매애 옮김) 제1부 제1장 ‘상식에 대한 만행’을 읽다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어디 학술발표회 토론하러 가 있었는데, 발표는 안 듣고 아렌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와우’, ‘아!’, ‘그렇지’ 등등 온갖 감탄사를 써가면서 연필을 놀리고 있었다. 역사연구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유감없이 유대인은 내내 순교적 박해를 받았다느니, 영원한 반유대주의가 있었다느니 하는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기존 통념을 비판해갔다.

그리고 아렌트를 누나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왜 느닷없이 누나라고 부를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계기는 있는 듯하다. 요즘 시사IN의 주진우 기자가 누나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하던데, 그런 인기를 기대하기는 언감생심이고, 누나라고 부를 사람이 있으면 불러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아무튼 그리하여, 세미나가 있던 날 뒷풀이 자리에서 우리의 건배 구호는, ‘한나! 누나!’, ‘아렌트! 누나!’였다.

아렌트 누나 얘길 꺼낸 것은 조선의 역사 중 일반인이나 역사학 전공자에게 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관심을 끄는 대상이 정조라는 문제적 인물과 연관이 있어서이다. 정조는 전에도 계몽군주에 비견되면서 주목을 받아왔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맹아론이나 실학 등 조선사에서 근대의 맹아를 찾는 일환으로 정조를 절대주의 시대의 계몽군주로 파악했던 것이었다. 그런 시각의 연장에서 일부 당색의 사랑방에서 전해오던 정조 독살설이 《영원한 제국》이니 하는 소설로 나오게 되었고, 아예 정조가 독살당함으로써 ‘아깝게’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다고 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정조가 살던 시대나 정조를 어떻게 보는 일치하는 견해는 정조가 공부를 잘했다는 사실이다. 잘 하고, 많이 하고. 연구자들은 직업이 그래서 그런지 공부 좀 하는 사람들에게는 점수가 후하다. 후하다 못해 껌뻑 죽는 경우도 많다. 인정하다가 존경하다가 투항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물론 투항하는 순간 비판은 멈춘다.

정조가 규장각(奎章閣)을 두어 학자를 양성하면서 그들을 친위대로 삼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친위대는 학문적 친위대이기도 했다. 조선이라는 나라, 넓게 조선 문명은 ‘알고 실천해야’ 살아남는 세상이었다. 말발, 글발이 서지 않으면 행세가 불가능했다. 그것은 기록으로 남는다. 지금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가 남아 있는데, 아주 잘 만들어진 알찬 문집인 데다 분량도 적지 않다. 그 중 ‘경사강의(經史講義)’, 즉 클래식과 역사에 대한 토론, 연구노트가 64권이다. 자신의 연구노트인 《일득록(日得錄)》 18권을 포함하면 문집의 거의 반이 세미나를 한 결과이다. 나머지도 다 공부 얘기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노트이다.

“학이(學而)의 학(學) 자는 실로 이 편(篇)의 뿌리인데, 학 자의 뜻을 상세히 말할 수 있겠는가? 주자(朱子)는 《집주(集註)》에서 학 자를 본받을 효(效) 자로 풀이하고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을 겸한다고 하였고, 또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는 지(知)와 능(能)을 아울러 말하였다. 그렇다면 학이라는 한 글자는 지(知)와 행(行)이 모두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되면 배움에 뜻을 둔다’고 할 때의 십오지학(十五志學)의 ‘학’ 자도 또한 이 ‘학’ 자인데, 삼십이립(三十而立)과 서로 대응하여 지(知)와 행(行)이 되는 것처럼 하였다. 어째서인가? 혹시 이 학이 편의 학 자와 십오지학의 학 자가 서로 다른 것인가?”

 군주가 학덕 있는 신하에게 배우는 경연(經筵)에서, 정조가 가르치러 들어온 신하에게 묻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논어》 〈학이〉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학(學)’이라는 용어가 왜 서로 다른가를 묻는 질문인데, 이거, 그동안 어떤 주석가도 주목하지 않았던 대목이다. 그러니 경연관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심문하는 격이 된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강의를 했다. 질《홍재전서(弘齋全書)》권116 경사강의(經史講義)53에 실린 《자치통감강목》 강의 때의 질문이다.

 “태종이 고구려(高句麗)에서 철수한 후 정벌을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러한 정벌이 있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동쪽으로 정벌을 떠날 때에 이를 말리려고 간언한 신하들이 또한 많았다. … 간언을 따르는 것은 본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지 누가 간언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위징이 간언하였다 하더라도 태종이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위징은 당 태종의 거울이라고 불렸던 제대로 된 참모였다. 정조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정조가 질문은 하는데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테스트용 질문이라는 것이다. 경연관에서 유생에 이르기까지 정조는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테스트하고, 가르치려고 든다.(이렇게 가르치려 들다가 일찍 죽은 왕이 조선에 또 있다. 세조. 차이가 있다면 세조는 무식했고, 정조는 정교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정조의 군사론(君師論)을 보면 이해가 쉽다. 그는 군주이자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이 태도, 어디서 본 태도이다. 그렇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좌절을 목격하고 아무래도 ‘진리를 아는(=안다고 생각하는)’ 철학자가 군주가 되어야 이런 부조리가 해결되겠다고 생각하며 플라톤이 구상했던 철인정치(哲人政治)와 닮았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한 번도 실제 역사에서 구현된 적이 없었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좌절한 게 아니라 플라톤이 좌절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동굴로 내려가기를 포기하고, 저자거리에서 토론하기를 포기하는 가운데 플라톤은, 소크라데스에게 독배를 마시게 했던 아테네 권력자들보다 더 소크라테스를 부정했다. 결국 서양 정치철학에서 철학과 정치를 합치려던 의도와는 다르게 철학과 정치가 갈라서 버린 비극은 플라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시각이다. 우리가 흔히 정치를 우습게 보고, 학자의 삶은 그와 다른 뭔가 대단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태도가 플라톤의 철인정치론에 배인 독소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플라톤의 철인정치론은 동아시아 정치철학의 전통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얼핏 유가(儒家)의 성학(聖學)을 제왕학(帝王學)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철인정치론과 유사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군주와 학자의 영역을 나누고, 군주가 학자에게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것. 그게 경연이었다. 플라톤이 철학과 정치를 합치려다가, 철인이 군주를 하려다가, 결국 철학과 정치가 갈라진, 철인이 정치를 포기한 비극에 이른 반면,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둘은 합치려고 하지 않다 보니 둘이 어떻게 긴장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이 주제는 따로 얘기할 만하니까 이쯤하자.

아무튼 철학과 정치의 분리는 결과는 철인정치 자체에 내재한 폭력성의 결과이다. 정조의 군사론에 따라 국왕=철학자=스승이 될 경우, 아니 되고자 할 경우 ‘철인-왕 콤플렉스’가 작동한다. 《정치의 약속》을 번역한 김선욱 교수는 정치의 본질을 철학적(=진리 독점) 태도로 포착하는 위험성이 드러나고,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하는데, 이 폭력은 통상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첫째는 자신의 정치철학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정치과정에서 소외시키고 단순한 지시 이행자에 머물게 만드는 폭력이다. 실제 정치에서 정조가 다른 정치세력을 소외시키기에는 힘이 부쳤다. 긍정, 부정을 떠나 조선의 정치제도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시스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규장각을 그 기존 정치제도를 소외시키려는 방책이었다.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에 올라 교만에 빠지고 타인의 조롱을 받는다.” 요 대목은 좀 어렵다. 정조는 너무도 정당한 방식으로 지배자의 위치에 올랐고, 교만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남들이 조롱하기에는 너무도 철저한 스승(철인)+군주였다. 설사 그렇더라도 군주는 그 자체로 시스템이다. 정조는 정조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으로서의 군주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의 군사론은 전통적인 조선 정치시스템에서의 일탈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야 정조 이후의 협애한 세도정치는 이해된다. 다양한 의견(doxa)이 배제되기 시작하는 전조로서의 정조 시대, 이게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응답 2개

  1. 뽀숙씨말하길

    잘은 모르지만, 흥미롭게 한창 읽어가다 보니 저도 모르게 ‘아’ 하면서 정조에 대해서 좀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같은 세상에 국왕 = 철학자 = 스승이라는 개념이 신선하기 때문일까요.=)

    • 여하말하길

      국왕 = 철학자 = 스승이 정치의 부재, 이념의 독단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신선하기보다는 위험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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