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지금, 우칸촌乌坎村

- 홍진

광둥성의 평화로운 어촌마을이었던 우칸촌 2만명의 주민들은 현재 경찰의 봉쇄로 2주째 고립상태에 처해있다.

지난 9월 21일 처음 일어난 광둥성 우칸촌 시위는 주민 400여명이 터무니없이 적은 토지수용 보상액과 관리들의 선거 부정 문제를 상급기관인 산웨이汕尾 시에 고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수년째 주민들의 동의 없이 토지를 헐값의 보상금으로 강제수용해서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매각해 온 수박씨 발라 먹을 정부관리들에 대한 축적된 불만이 결국 흘러 넘쳤던 것이다. 지방관리 두 명을 인질로 잡고 경찰서를 점거하기도 하는 등, 사태는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3개월간 단발적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그 와중에 시위 주동자였던 42살의 쉐진보薛錦波가 12월 11일, 공안국에 체포된 지 만 3일 만에 사망하는 슬픈 사건이 일어났다. 시정부는 사망 원인을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발표했지만, 시체에서 발견된 타박상과 엄지손가락 골절 등으로 볼 때, 공안에 의한 구타와 고문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민들의 저항의 불씨는 급격히 커져 갔다.

12월 11일 무장경찰 1000여명이 최루탄과 물대포를 앞세워 마을 진입을 시도했지만, 마을 입구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돌팔매질로 격렬하게 농성하는 수천 명 주민들의 저지선을 뚫지 못했다. 12월 12일 수십 명의 정부 관리들은 마을 밖으로 쫒겨 나고 마을과 정부건물 등은 주민들에 의해 완전히 점거 되었으며, 13일 이후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주민이 생업을 중지하고 거리에 나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시정부는 무장경찰을 배치한 마을 5km 밖 봉쇄선에서 식량과 물을 포함한 물류의 유통과 인터넷 등 외부 통신선을 차단한 채 우칸촌을 압박하고 있으며 언론 출입 역시 차단한 상태이다. 12월 17일 마을 사람들은 사망한 쉐진보에 대한 추모위령제를 진행했으며, 이후의 소식들은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현재 검색어가 차단당한 상태)등을 통해 일부분만이 전해질 뿐이다.

지난 12월 9일 산웨이 시정부는 기자간담회를 열고, 언제나 그렇듯이 고정멘트로 ‘중국의 실패를 바라는 외국의 불순 세력들에 의한 유언비어와 선동이 차분히 수습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들(시정부) 때문에 사태가 정말로 악화된 12월 14일, 시정부는 책임자인 두 명의 지방 관리를 해임하고(이런 대규모 부패에 지방관리 두 명이 배후라는 설명은 요즘 한국 공권력의 발표처럼 믿기 힘들다!), 주민들의 대다수가 동의 할 때까지 우칸촌의 토지개발 사업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으며 사태는 수습국면에 있다고 발표했으나, 이미 주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현재 주민들은 지금까지 강제 수용된 토지의 반환, 사망자의 시신 공개(및 사인 규명), 구속 중인 주민대표 4인의 석방(이들 역시 고문과 구타에 노출되었을 것으로 여겨져 안전이 염려되고 있으며 일부 불확실한 소문에서는 한명이 추가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부패 척결을 슬로건으로 힘든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판 위키 백과사전에서는 이번 우칸촌 시위가 품고 있는 새로운 의의를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이하 후진타오 정권 중) 처음으로 스스로의 조직(대책위원회?)을 꾸려 정부의 권위에 대항했으며, 처음으로 과감하게 ‘독재 반대’의 구호를 사용했으며, 진압되지 않고 이어나간 최초의 장기 투쟁임과 동시에 폭력과 난동 및 절도등 기타 어지러운 범죄로 흐지부지 변질되지 않은 시위이며, 무엇보다도 우칸촌 스스로가 하나의 고립된 섬이 되어, 정부와 사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첫 번째 봉쇄-점거투쟁이라는 것이다. (약간의 의역이 있음)

이번 집회에는 표면적인 사안에 대한 요구를 넘어서서 ‘인권을 보장하라’와 같은 구체적인 정치 구호가 대거 등장하였으며, 시위를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90년 세대의 젊은이들은 휴대폰 등의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국내외 언론과의 소통을 유지하려 했다. 마을 대표는 연설 중 전 중국지역에서 투표를 통한 관리 선출의 미래상을 제시했다고 한다.

일견 우리에게는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일련의 특징들은 정치적 발언이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는 중국이라는 한계 상황에서는 기적 같은 큰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플랭카드에 적혀있는 인민들의 주장은 ‘쥐박이 퇴진’과 같은 한국의 평범한 구호에 비해 봐도 순박하기 그지없다. 70년대 같이 뿌연 사진속의 피켓 문구들을 들여다본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불법 집회일수 없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불법 집회일수 없다.”

“우리는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
“중앙 정부는 적극 개입하여 사태를 해결하라.”

중국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얼마나 생소하면서도 불안한 일일까. 단순하다 못해 허무한 구호들에서, 그 불안을 고스란히 품에 안을지라도 침묵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느낀다. 또 하나의 문구에서 우리는 부패한 지방관리와는 분리되는 중앙정부, 공산당과 국가에 대한 일정 수준의 신뢰를 여전히 볼 수 있다. 서방 언론과 호사가들이 매번 유행어로 띄워보고자 노력하는 ‘중국의 재스민 혁명’은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홍콩은 논외로 하더라도, 중국 본토 내 타 지역인 광저우 시내에서 감행된 우칸총을 지지하는 연대 집회는 위험한 만큼 희망적이다. (연행자들이 안전하기를 빈다.) 대대적인 언론 통제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한 귀퉁이에서는 지금도 과감한 의견 개진이 계속되고 있다. 석옥石玉이라는 한 블로거는 “돌맹이와 죽봉이 땅에서 춤을 출 때, 중국의 미래가 있다고 촌평했다. (걔도 안전하거나, 해외에 있기를 빈다.)

지난 12월 15일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국무원 부총리(이자 차기 총리 후보)인 리커창李克强은 내수 확대를 통한 경제 구조의 개편을 특별히 강조했으며,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를 통해 내수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어줄 낙후 지역의 ‘도시화’도 다시 거론했다. 공청단의 복지정책이 상하이방의 개발, 성장 정책보다 시급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급격한 자본화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빈곤층의 가난에 대한 처방이 다시 도시-자본화라는 것은 안타깝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추구하는 경제발전의 과정에서도 농어촌의 가난한 인민들은 계속 땅을 빼앗기고, 인민들의 의사결정참여는 수많은 변명과 함께 미뤄질 것이다. 그 시간을 감내하기 위해서, 2012년의 중국은 성장인가 분배인가를 고민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우칸촌을 보호해야 한다.

“사람이 하는 일, 하늘이 보고 있다.”

“사람이 하는 일, 하늘이 보고 있다.”

고립된 우칸촌에는 이만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들이 스스로의 믿음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이미 고립이 아닌 큰 연합이다. 물리적으로 단절된 우칸촌이라는 공간은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이며, 우리와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우칸촌은 혼자가 아니다. 우칸촌은 30년의 시간차를 두고 한국의 과거와 연결된 21세기의 작은 광주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와 문명사회를 표방하는 중국에서 더 이상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불안한 중국 남쪽의 사회 분위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다행히도 군대의 투입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계속 지켜봐야만 한다. 중국 지도를 펼쳐 봤을 때는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한 어촌마을의 안녕을 위해 국제적인 연대를 요청한다.

응답 1개

  1. 소량말하길

    맞아요. 언제나 세계 이곳저곳에서 민중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죠.
    바다를 건너 그들의 뜨거운 투쟁의 열기는 돌고 돌아 서로서로에게 힘이 되는 바람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들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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