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여정아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여정아

네가 보낸 글 잘 읽었다.

부모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는 데에 있구나. 그래서 왜 독서 과부하(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지움)가 유사 자폐로 이어지는지 기사내용을 비판적으로 따져보아야만 그런 일을 막을 수가 있겠구나.

첫 번째 문제는 발달 단계를 나이에 따라 획일적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부모가 정서적인 교감능력을 길러야 할 발달 단계에서 독서를 비롯하여 인지적인 학습을 강요하면 아이에게 정서적인 교감 능력에 결손이 생겨 유사 자폐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징 조작이 만 세 살이 지나야 가능해지며 문자 상징 조작은 초등학교 2~3 학년쯤 되어야 가능해지므로 그 때부터 책을 읽힐 수 있다는 획일적인 발달 단계 문제이다.

좀 특별하여 쉽게 적용하기 어려운 사례이긴 하지만 나이에 따른 발달 단계 구분이 획일적일 수 없다는 것으로 김시습의 예를 하나 듣고 가자. 세 살에 글을 엮고(짓고) 다섯 살에 세종 앞에서 시를 지어 상으로 비단 한 필을 받고, 무거워서 이를 들고 갈 수 없었으므로 풀어서 끌고 갔다는 얘기다. 그런 김시습이 은둔 생활을 하며 기행을 일삼기는 했지만 자폐증상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일이 없다. 하긴 은둔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모르면 은둔 생활도 자폐의 한 증상으로 볼 여지는 있겠다만.

상징 조작은 실체를 대신 나타내는 기호를 만들어 사용하는 거잖니. 지금 홍아가 소꿉장난으로 상징을 조작할 때 사용되는 모든 장난감이나 행동들은 살림에 사용되는 실체들과 엄마의 실제 행동을 대신하는 기호들이다. 만 두 돌인데도 홍아는 벌써 상징을 조작하고 있잖니. 요즘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홍아의 음성언어 상징 조작에 놀란다. 홍아가 말을 배우면서 경험한 것들을 음성 기호들로 조작하여 표현하고 있잖아.

문자 상징 조작은 음성 상징 조작처럼 실제 상황 속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서 훨씬 어렵겠다. 경험하지 못한 사건들을 오로지 상상 속에서만 전개시켜야 하니까. 그래서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인 뒤에야 그 배경지식(경험의 총체)으로 문자의 의미와 내용을 추리·상상하는 문자 상징 조작이 가능하겠다. 그럴 나이가 아마 초등학교 2~3학년이라 하는가 보다. 그러나 동화 자체가 정서적인 교감 능력을 기르자고 만든 것이며, 동화를 듣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벌써 언어를 매개로 상상할 수 있다는 게 아니냐.

발달 단계에 비추어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을 어찌해야할 시기인지 몰랐다는 게 문제였구나. 그러니까 내 얘긴 그 신문 기사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여 홍아의 발달 단계에 맞추어 적용하자는 것이다. 기사에서 말하는 발달 단계로 보아 지금은 책을 꺼낼 시기가 아니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책을 문자로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동화를 들려주는 것이잖니. 만약 동화를 듣고 즐거워한다면 그 즐거움은 홍아가 등장인물이 되어 그의 감정을 공감하는 데서 생기는 것 아니냐. 그러니 홍아의 발달 단계에 맞추어 적절하고도 필요한 경험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홍아가 만약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책을 읽는다면 그 읽기가 칭찬이나 보상 때문에 문자를 음성으로 바꾸는 기능적인 읽기인지 문자를 의미로 바꾸는 해석적인 읽기인지를 우리가 알 수 있잖니. 만약 내용을 알고 읽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면 말릴 이유가 없어진다. 해석적인 읽기의 즐거움은 이미 그 책을 읽을 만큼 배경지식이 준비가 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잖니. 너도 독서 연령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잖니. 더구나 지금은 책을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신문 기사의 두 번째 문제는 8~9세 이전의 모든 독서가 정서적인 교감 능력과 상관없는 과잉 학습 강요라는 전제로 유사 자폐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8~9세 이전의 아이가 동화를 듣거나 동화책을 읽어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이나 화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정서적인 교감을 경험하고 있는데도 마치 모든 독서 활동이 정서적인 교감 능력을 기를 기회를 잃게 하여 유사 자폐에 빠질 수 있다는 논리는 문제가 있다. 마치 운동선수가 육체의 어떤 근육을 쓰면 쓸수록 민첩해지거나 지구력이 생기듯이 정신적인 경험도 정서적인 공감 경험이 많을수록 정서가 더욱 풍부해진다는 일반적인 원리에 어긋나잖니.

내가 대덕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상담했던 김동일이라는 아이 얘기를 했던 것 기억나니. 그 애도 자폐아야. 담당 의사 얘기는 선천적으로 뇌구조 이상 때문에 교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거야. 그러나 선천적인 장애라기보다는 그 애가 어린 시절 어학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 애 또한 영어나 어떤 외국어 과잉 학습으로 정서적인 교감 능력을 기를 기회를 잃어버린 피해자 일 수도 있어.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의 공감 능력 결손을 뒤늦게라도 메울 수 있다고 믿고 소설책을 사다가 권했어. 그렇지만 그 애는 일본어나 중국어 불어 학습서나 역사 지리책만 들고 다니고 소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애는 시도 때도 없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해당 과목 선생님을 찾아가 묻는데 내가 그 분들에게 확인해보면 자기가 알고 있는 조각 지식을 그것도 맥락도 없이 묻는다는 거야.

타고난 정서적인 교감 능력이 없어서 정서적인 교감을 경험할 수 없는 건지 정서적인 교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 능력이 계발되지 않은 건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지만 나는 후자가 옳다고 믿고 독서 치료를 시도했으나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약간의 차이가 있을망정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는 공감 능력이 전혀 없이 태어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다만 계발 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래서 지금도 그 애에게 한국문학 특히 소설로 감정을 주고받는 경험을 제공하려던 나의 방법이 옳다고 생각해. 부족한 공감 능력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느낀 자기 감정으로 미루어 남의 감정을 공감하거나 또 역할놀이나 독서 등으로 입장 바꿔 남의 감정을 공감하는 기회가 많아진다면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찾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신문 기사에서 ‘의미도 모르고 읽는 것만 대견해 했’더니 그렇게 되었다는 엄마들의 탄식이다. 내 생각에는 동화를 듣고 즐거워한다면 그 즐거움은 정서적 공감에서 오는 즐거움이며, ‘의미’를 알기 때문에 오는 즐거움이므로 홍아가 동화를 듣거나 읽고 즐거울 수만 있다면 나는 빠를수록 좋다는 거야. 어린이 도서관에 그 많은 동화가 8~9세 이전의 아이들과 정서적인 교감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거잖니. 지금 홍아가 동화를 듣고 즐거워 한다는 것이 감정이입과 동일시와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로 등장인물의 정서에 공감하는 증거 아니냐. 그것이 대견한 일이지 왜 걱정할 일이냐.

여기서 유의할 것은 부모들이 아이가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문자를 음성으로 바꾸는 기능적 활동을 문자를 의미로 바꾸는 해석적인 활동으로 오해하고 대견해할 수가 있다는 거야. 경험이 경험을 낳는다는 인식론에 따라 아직 배경지식(경험의 총체)이 미치지 못하는 내용을 강요하면 추리·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기능적인 읽기가 될 수밖에 없지. 그러나 기능적인 읽기에 따른 칭찬이나 보상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동화를 듣거나 읽고 정서적 공감으로 즐거울 수만 있다면 이는 우리가 바라는 바이다. 왜냐하면 동화에 공감하면서 듣거나 읽는 것은 거꾸로 현실에서 부족한 공감 기회를 메우고 사회성을 길러 자폐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홍아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8~9세 이전의 아이들이 독서라는 과잉학습 때문에 자폐로 이어진다고 해서 동화를 공감하며 읽는 해석적 읽기까지 그렇게 몰아가지는 말라는 거야.

세 번째 문제는 취학 이전의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접촉으로 공감능력을 길러야 할 때에 어떤 것에만 집착하고 몰입하면 공감능력을 기를 기회를 잃어 자폐로 이어진다는 문제이다. 그 시기에 모든 몰입은 위험할 수 있다고 하여 동화로 공감을 나누는 몰입도 안 되는 거냐고 묻는 거다.

앞서도 말했지만 아동도서들은 대개 정서적인 표현을 통해 공감을 나누자는 것들이다. 너는 동화를 들려주는 것조차 어쩌면 강요된 과잉 학습이라 엉뚱한 집착과 몰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주저하는 것 같더라. 그러나 말귀를 알아듣는 시기가 되면 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묻고 대답하고 흉내를 내보는 것 등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그리고 자연스러운 공감 방법이잖니. 옛날 동화책이 없었을 때는 대개 할머니가 동화 작가이면서 구연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동화책을 이용하여 엄마들이 얼마든지 재미있게 동화를 들려줄 수 있다. 아동도서관에 엄마를 돕기 위해 그 많은 책들이 꽂혀있다. 그런데도 너무 자주 동화를 재미나게 들려주면 동화에 몰입시킬까봐, 홍아가 동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까봐 겁나는 거니.

미혜 아들이 구구단을 그렇게 잘 외운다고 들었는데 그걸 칭찬하는 것이 바로 비극의 씨앗이었구나. 덧셈을 바탕으로 같은 수를 몇 번 더했는가를 모르거나 답에서 곱하는 수를 몇 번 뺄 수 있는지를 모른 채 외운다는 것이 그 아이에게 곱셈이 무슨 의미가 있겠니. 덧셈을 바탕으로 나누는 숫자를 몇 번 더하면 나뉘는 숫자가 된다는 것을 모르거나 뺄셈을 바탕으로 나뉘는 숫자를 나누는 숫자로 몇 번 뺄 수 있는지를 모르거나 나누는 숫자와 답이 되는 숫자의 곱이 나뉘는 숫자인 것을 모르면서 나눗셈을 아무리 잘 해봐야 그 아이는 수학 잘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구구단 외우는 기능적인 재주를 자랑하는 미혜나 외할머니는 현재 그 아이가 보여주는 자폐 증상의 원인을 잘 모를 것이다. 그 나이에는 수리의 관계적인 의미를 알기 어려운 때인데 기능적인 활동에만 몰두하게 하여 정서적인 교감 능력에 결손이 생긴 생생한 사례이다. 만약에 동화에 몰입시켰어도 결과가 똑같았을까.

물론 자폐의 원인이 정서 소통의 즐거움이 아니라 특정한 지식이나 기능의 즐거움에만 몰입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폐는 오히려 공감을 못하는데서 오는 결과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어떤 원인 때문에 어린 시절에 가족들 특히 엄마에 대한 불신이나 미움이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일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소통을 거부하던 태도가 굳어져 무의식을 지배하므로 아예 소통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을 거다. 그래서 혼자만의 즐거움을 추구하려다가 지민이처럼 대인 관계를 기피하고 게임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취학 이전의 아이들이 정서 소통이 아닌 즐거움만 매달리면 아예 공감 능력을 키울 기회가 사라지므로 그 악순환이 결국은 자폐 증상으로 고착된다는 몰입이 간접적인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을 내가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화에 몰입하는 것은 오히려 공감 능력을 증진시키므로 몰입할수록 좋다고 나는 말하고 싶은 거다.

그리고 여정아, 나는 두 가지 점에서 홍아가 공감 기회를 잃어버릴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나는 홍아 성격의 때문이다. 이미 홍아는 개성이 뚜렷하잖니. 제가 싫은 것을 아무도 강요할 수 없도록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것이다. 내가 다 큰 너희들 눈치 보듯이 너는 나보다 더 홍아 뜻을 더 받들었으니 그렇게 됐나보다. 그래서 제가 공감할 수 없어 재미가 없는 동화 듣기나 읽기를 아무도 강요할 수 없고 그랬다가는 벌떡 일어나서 딴 짓을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홍아가 동화를 듣거나 읽는 즐거움이 칭찬이나 보상 때문인지 아니면 등장인물과의 동일시에서 오는 공감 때문인지 분간할 수 있는 네가 공감 못하는 홍아에게 동화 듣기나 읽기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나도 학습 과부하가 자칫하면 뜻밖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폐라니.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우리 홍아는 남에게 피해주는 일 말고 저만 좋다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어야 돼.

그러나 홍아가 싫은 일은 미래에 아무리 큰 행복을 가져온대도 강요하지는 말자. 다만 설득은 할 수 있지. 강요가 아닌 설득. 우린 강요인지 설득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는 홍아 뜻에 맡기자. 그리고 우리 부족한 설득력을 한탄하며 기다리자. 이것이 내가 믿는 하느님의 모습이기도 하다.

만약에 홍아가 바람직하지 않은 무언가에 집착한다면 그 또한 아무도 말릴 수 없을 테니 걱정이다. 바람직한 것에 집착하도록 설득하되 그래도 우리 설득력이 부족하다면 그 때 가서 한탄하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자. 인생이란 기회는 단 한 번이지만 성장 과정들은 아무리 늦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니. 그러니 엉뚱한 것에만 매달려 길을 잃고 엄마 말을 듣기 싫어하더라도 다시 제 길을 찾을 때까지 너는 기다릴 수 있겠지.

다만 지금은 공감의 즐거움을 가지고 동화를 듣거나 읽는다면 동화에 빠져드는 걸랑 말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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