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영락 없는, 그 딸에 그 아비..

- 김융희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경제 개발이 한창 진행되면서 안정과 희망에 부풀었던 1970년대의 후반기였다. 가정경제의 여유로 생활의 변화가 눈에 띄게 바뀌고 있었다. 의식주의 안정과 생활의 여유는, TV 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의 수요가 특수를 누렸다. 먼저 안방부터 시작된 살림이 부엌가구로 점차 늘어나고 있을 때로, 가전품은 벌써 TV 정도는 집집마다 갖춰졌고, 냉장고 세탁기도 거의 보급된 때였다. 그런데 우리집은 그 대세를 따르기가 힘겨웠다.

어느 화창한 봄날, 관광버스로 교외 가족나들이 때의 있었던 일이다. 가전제품까지 챙길 형편이 아닌 나는, 냉장고 세탁기는 물론 집마다 즐기는 TV도 없이 잡음투성이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하나로 버티는데, 아이들의 TV에 대한 불평과 성화가 여간 아니었다. 불가피 16인치 하나를 월부로 들여 놓은지 얼마 후였다. 내 여섯 살배기 딸내미를 교외 나들이에 대리고 갔다. 이놈이 버스칸에서 큰 소리로 ‘우리집 TV있다’는 자랑을 해버렸다. 버스내에는 웃음판이 벌어졌고, 우리 가족은 수치와 당황에 안절부절이었다.

평범한 웃음이 나에겐 냉소로 보였고, 특히 어린 아이의 말을 가려 어느 어른의 던진 말이 더욱 조롱의 모욕감으로 다가와,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잠재해 있다. 남들 앞에서 말씨도 야무지고 노래도 잘 불러 어른들의 귀염둥이로 통했던 딸이었다. 그런 자랑스럽던 내 딸이 때려주고 싶도록 너무 미웠다. 그 때에 있었던 일로,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안절부절 민망스러움에 마음이 편칠 못하다. 그 철 없었던 어린 딸이 지금은 중년의 주부가 되어 잘 살고 있다. 흐르는 세월의 덧없음과, 한 때의 좁쌀 같았던 마음의 배려가 아쉬움으로 새삼스럽다.

이번 음악회에 있었던 일로, 많은 분들께서 위로와 격려가 있었다. 지난 여강 만필(94호) “음악회에 초대합니다”에 대한 가까운 이웃들의 반응이었다. 대부분의 격려가 나를 고무시켰고, 고마운 격려의 너무 과분함에 쑥스럽기까지 했다. 착각이겠지만, 속내로는 우쭐함도 없지 않았다. 그 도취된 착각을 지금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수선부림에 대한 자중을 당부하는 충언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많은 격려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컸었지만, 나의 자중을 당부하며 충언을 배풀어준 우정의 이웃이 있어 다행이며 참으로 고마웠다.

매사를 좀 조용히 지켜보며 순응함이 아쉽다. 나도 지겨운 이런 짜증스런 짖을 남들은 오죽하랴 싶다. 경망스러움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면서도 나의 경박이 잘 다스려지지를 않는다. 이런 일로 내 주위의 이해와 소통에 대한 혼란스러움에 부담도 느낀다. 끼리들이 모여 함께 즐기는 취미동호회는 많다. 현대인들의 여가 선용을 위한 관심의 열풍은 대단해 극성스러워 보인다. 우리 남성 합창단도 그런 동호회의 하나일 뿐, 그런데 운좋게 명창들의 음악무대에 동참하게 되었고, 그것이 나같은 촌놈의 벅찬 감동에 들뜸이 지나쳤던 것이다.

마치 여섯 살배기 내 딸아이가 여러 사람들앞에서 TV자랑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가정마다 진즉부터 당연히 있는 TV를 뜬금없이 큰 소리로 자랑거리를 삼았으니, 듣는 이들 오죽이나 가소로웠겠는가!
그런데 여러분들의 의외의 관심과 많은 격려에 그만 들떠 우쭐함으로, 이번에는 내가 가까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불쑥 그 일을 자랑했다. 앗차, 또 실수! 바른말 속내를 감추지 못한 한 친구의 따끔한 충언 “주석에서야 허언 잡설이 인정되고 자유롭지만, 아무리 만화같은 글(만필)일 찌라도 대중앞에 개인 자랑은 지나치다.”는 일침에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 아내의 냉소와 주책바가지 놀림을 집안식구의 일이라며 도외시했음도 걸린다.

수치와 당혹의 민망스러움… 착잡한 심사에 내재된 삼십 년도 넘는 옛적 의식인, 딸내미의 철부지 돌출 행동이 갑자기 스쳤다. 영락없는 그 딸에, 그 아비란 생각이다. 빈곤하게 성장했고, 가난하게 산 것이 결코 자랑일 수는 없다. 또 그것이 어떤 일에서도 명분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요즘처럼 신자본적 의식의 지배사회에서는 가난이란 결코 내세울 수 없는 수치이다. 또한 모두가 일상화된 취미생활에 겨우 끼어들면서 엉터리를 빌미의 자랑거리로 삼음은 결코 당위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일을 반복해오고 있는 내가 문제이다. 나의 성격 탓이려니 계속 조심은 하자며 다짐하려니 또 억울하다. 수없는 다짐에도 계속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어쩌겠는가. 왜일까? 그렇다. 내 마음의 확고한 믿음의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 확고한 믿음의 나를 곡해하며 부정하는 주위가 내게는 이상하고 억울한 것이다. 여섯 살짜리 어린이가 그토록 그리던 TV를 보게 됐으니 얼마나 좋왔겠는가. 그토록 좋은 일을 왜 남 앞에서 자랑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좋은 걸 좋다고 자랑한 철없는 아이를 가난뱅이로 냉소하며, 더하여 알아듣지도 못한 애기에게 조롱의 야유라니….

이번 “음악회에 초대합니다”의 글도 여러분께 음악회를 알리는, 여러분께 정보를 알려드리는 나의 지극한 배려였던 것이다. 전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랑은 더욱 아니올시다. 비록 아득한 과거라지만 자기의 아픈 과거를 들추면서 자랑을 일삼는, 그런 어리석음을 가릴 분별력은 충분히 갖춘 나 임를 나는 믿는다. 주위와 동화하지 못한 뒤바뀐 생각으로 겪는 불편에 불구하며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또 여전히 저지르며 살 것이며, 누구도 못말리리란 생각이다. 이를 옹고집이라 했던가? 여기서 ‘옹’은 억지가 아주 심한 壅자가 아닌 늙은이 翁자인 ‘노망구 고집’으로 바꾼다.

술집에서 분위기와 당했던 이야기를 집에 전했더니 잘됐다 싶어, 아내가 또 비위를 건드렸다. 심통에 겨워 쓰다보니 자나쳤음을 여러분께 사죄한다. 매사 알뜰한 나의 아내는 특히 나를 위해 ‘남의 배려와 노욕을 버리고 조용히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늘 나를 거드르는 충직한 도우미요 동반자이다. 그런 고마운 아내를 표현의 불실로 전혀 아닌 방해자처럼 내세웠음을 깊이 사죄한다. 어떻든 초대한 음악회가 “성가의 갈라음악회”로 너무 좋왔다는 반응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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