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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미국 역사의 뒷골목’ 저자 베이랑(Beilang)

- 고병권(수유너머R)

베이랑 선생은 현재 뉴욕에서 내가 활동하는 <이본의 다락방> 멤버다. 뉴욕의 할렘에 위치한 <이본의 다락방>은 수유너머처럼 세미나와 생활을 함께 하는 작은 프로젝트 그룹이다. ‘미국 역사의 뒷골목’을 연재하고 있는 베이랑 선생과 ‘미국’과 ‘역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1. 북방의 이리

고병권: <위클리 수유너머> 독자들이 베이랑 선생이 누군지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누기 전에 본인 소개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일단, 필명을 베이랑으로 쓰시는데 그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베이랑: ‘베이랑’은 ‘북방의 이리(北方的狼)’라는 뜻인데요, 홍콩의 치친(齐秦)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 狼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여러 해전 중국방문 중에 지인이 소개해준 그 노래가 너무 좋아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온 겁니다. ‘북랑’, 중국어로 읽으면 그게 ‘베이랑’입니다.

고병권: 동토의 땅에서 어슬렁거리며 사는 늑대군요(웃음).

베이랑: 내가 살아가는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미국에서의 삶이 참 외롭고 황폐했다고 할까, 외국인으로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뭐 한국인들과도 커뮤니티를 만들지 못했고 세상에 나 혼자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가졌죠. 미국이 그런 나라이기도 해요. 자신이 찾아 나서지 않으면 완전히 개인적으로 고립될 수도 있는.

고병권: <위클리 수유너머>에 칼럼을 쓰실 때 저희가 ‘동아시아사상사 연구자’라는 직함으로 소개를 드립니다만, ‘동아시아 사상사’를 전공하신 건가요?

베이랑: 글쎄요, 뭘 공부했냐고 하면 딱 집어서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보통 ‘필드’는 동아시아였지만 관심은 ‘사상사’와 ‘철학’에 함께 걸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학계에서는 보통 ‘필드’를 중시하죠. 특히 ‘동아시아학’이라고 부르면 그게 ‘지역학’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역학’이라는 ‘접근법’의 문제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국주의가 지역학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그런 학문 체제를 만들었는지. 어떻든 저는 필드를 통해 규정되는 전문학자라는 정체성에 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곳 학계 관행과는 달리 저에게 필드는 부차적입니다. 학부에서는 서양철학을 전공했지요. 그리고 대학원에서 ‘동아시아 유학’을 전공한 셈인데요. 일본의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 한국의 ‘다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지역학적 관심에서 접근한 건 아닙니다. 제게 철학과 사상은, 차라리, 삶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과 더 관련이 있을 겁니다.

고병권: 미국에 오신 게 80년대 말이지요?

베이랑: 여기 왔다기 보다는 한국에서 여기로 도망쳤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네요. 80년대 대학을 다녔는데, 뭔가 갑갑하고 삶의 출구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사회에 열불이 나긴 했지만, 제 성격이 뭔가 실천적인 활동에 뛰어들지도 못했고, 거창한 사회정치적 이슈가 아니더라도 대학 공부 자체가 제게 너무 맞지 않았어요. 제가 한국에서는 공대를 다녔는데요, 대학에 들어간 첫 날, 교수가 한 말이 꽤나 충격이었습니다. 재벌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저에게 ‘너희가 지금 대학 들어왔다고 좋아하는 모양인데, 졸업해서 현대 같은 데 들어가려면 지금 놀면 안 된다, 열심히 공부해야 해.’ 대학 첫 수업에서 말이죠. 정말 끔찍하게 느껴졌어요. 대학이라는 게 이런 덴가 싶었죠.

고병권: 저도 자연과학대학을 졸업했지만, 사실 이공계 대학에서 그런 말을 듣는 게 낯선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현대 같은 데 가려면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공대생’, 뭐랄까, 앞서 ‘삶이 답답했다’는 말씀도 그렇고, 공학이 성정에 맞지 않으셨던 건 아닌가 싶어요.

베이랑: 미국에 건너온 뒤 ‘철학과’에서 학부를 다시 시작했죠. 처음에는 ‘과학철학’과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물리학을 하기에는 제 자신의 수학적 토대가 약했고 서양철학을 하다가 철학을 지식이 아닌 삶을 구원할 수 있는 무엇으로 생각하면서 대학원에서는 점차 사상사 쪽으로 눈을 돌린 것 같습니다.

2. 미국이라는 나라

고병권: <위클리 수유너머>에 ‘미국 역사’에 대한 연재를 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미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베이랑: 아시겠지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실 제가 오래 미국에 있었던 건 맞지만 주로 학교 주변에 살았고, 제가 살던 동네가 미국의 면모를 잘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전형적인 마을이었던 것도 아니고. 글쎄, 뉴욕같은 대도시라면 모를까.

고병권: 사실 뉴욕에 살아도 ‘이게 미국이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어떤 분은 제게 미국을 보려면 중소도시의 소시민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고도 하더군요. 그래야 언뜻 보기에 아주 낡고 보수적인 생각인데 그게 어떻게 미국을 지배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글쎄 어디가 미국을 잘 볼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오고, ‘미국의 이해관계’가 어디 있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렇게 보면 심지어 한국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게 ‘미국’ 아닌가 싶기도 하고.

베이랑: 미국은 정말 다양한 층위에 존재하죠. 한편으로 ‘미국’은 미국인들을 포함해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갖는 ‘판타지’의 이름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하나의 ‘거대담론’이기도 하고, 첨예한 이해가 엇갈리는 ‘구체적인 현실’이기도 하죠.

고병권: 미국을 확정적으로 말한다는 게 어렵다는 걸 전제하기로 하고, 그런 전제하에서도 말할 수 있는, 선생님이 생각하는 미국이란 어떤 것입니까.

베이랑: 저는 미국을 떠올릴 때마다 ‘모순’이랄까 ‘역설’이랄까, 그런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미국은 자신이 내세우는 대의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정반대인 채로 존재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한 주장과 정반대 주장이 동시에 가능한 나라이기도 하죠. 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어느 독재 못지않은 억압의 측면이 있고, 가장 개방적인 나라이지만 가장 폐쇄적인 면을 갖고 있지요. 이런 모순이랄까, 역설이랄까, 하는 것을 한 몸에 지니고 있어요. 사실 그러면 갈등이 생겨나야 하지만 그냥 유지됩니다.

고병권: 선생님 말씀을 조금 더 분명히 해보고 싶은데요, 선생님은 ‘기만’이 아니라 ‘역설’이라고 이해하신 거죠? 그러니까 ‘기만’이란 속내와 다른 걸 말하는 것으로 사실 한 개체에 반대 주장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거죠. 본심은 분명 있는 거니까. 하지만 선생님이 ‘역설’이나 ‘모순’이라고 말하는 건, 그게 단지 속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반대 주장이 동시적으로 성립하고, 그것이 파국에 이르지 않으면서도 관리되고 있다고 보시는 거죠?

베이랑: 물론 기만의 측면도 클 겁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저지른 전쟁들의 상당수가 기만과 관계 있죠.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미국에는 양립하기 힘든, 그러나 그럼에도 양립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태생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나라의 초기 이민은 분명 유럽에서 자유를 찾아온, 어쩌면 유럽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들을 가지고 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주는 원주민 학살과 동시적이죠. 이 나라는 ‘원죄’를 안고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죄악이 이 나라 건국 과정에 개입되어 있죠.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죄악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미국이 자유를 말하고 민주주의를 말할 때마다 그들의 죄가 또한 폭로되고 개입하게 될 겁니다.

고병권: 구원을 찾는 과정이 죄를 짓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거군요. 구원과 죄의 동시적 발생이라. 선생님이 말하는 ‘역설’이란 어쩌면 태생적인 것이군요. 아마도 그 ‘원죄’, 물론 이 ‘원죄’는 미국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가령 미국 내부의 인종주의라든가 외부의 제국주의적 침략 같은 걸로 나타날 것 같습니다만- 어떻든 그 ‘원죄’가 선생님이 <위클리 수유너머>에 연재하는 역사의 ‘뒷골목’을 이루어 온 것 아닙니까?

3. 역사의 성숙

고병권: 선생님께서 ‘역사의 뒷골목’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베이랑: 이유를 따지고 보면 뭔가 이야기가 없진 않겠지만 그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간단합니다. 처음에 <위클리 수유너머>에 칼럼 청탁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처음에 한국 쪽 이야기를 많이 썼죠. 하지만 편집진이 제게 해외칼럼을 맡긴 건, 이쪽 이야기를 쓰라는 뜻이잖아요, 그렇죠? (웃음) 사실 미국 이야기라는 게 밝은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와 있어서 그걸 쓸 마음은 없고 뭔가 미국의 어두운 구석, 그것도 미국 내부에 있는 어두운 구석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긍정과 부정을 고루 봐야 한다는 식의 ‘균형론자’가 될 생각은 전혀 없구요. 뭐랄까, 역사에 대해 제가 개인적으로 가진 관심인데요,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 ‘망각된 것들에 대한 관심’이 있죠. 민중사라고 할까. 역사란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인데 그게 소위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로 너무 단순화된다는 느낌. 무엇보다 저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 가장 고통 받았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크나큰 고통을 받은 그들이 삶이 그냥 사라져 버린다면, 그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왠지 그런 삶에서 큰 의미를 끌어내고 싶어요.

고병권: 선생님께 역사는, 원혼을 달래는 일종의 굿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단순한 위로는 아니겠지요? 왜냐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배제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와 대결해야 하니까요. 역사에서 가장 고통받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로 끌어낸다는 건 어떤 걸까요?

베이랑: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가 과거를 돌이켜 보면 정말 많은 순간들이 있잖아요? 즐거운 순간, 괴로운 순간, 그냥 알게 모르게 지나가는 순간들. 하지만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우리를 정말로 성숙케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가장 괴롭고 가장 수치스러웠던 순간’이 아닌가 싶어요. 그 순간들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숙하는 거겠죠. 그것들을 회피하면서, 밝은 면, 긍정적인 면만 묘사하는 건, 성숙하지 않으려는, 말 그대로 미숙한 채로 남으려는 행동이죠.

고병권: 성숙의 시간으로서 역사라, 참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괴로운 순간, 치욕의 순간, 어쩌면 ‘억압받는 자들이 이를 갈았을 시간’, 그 시간들을 응시할 때, 역사가 성숙한다…

4. 뒷골목에 늘어선 주제들

고병권: 선생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 쓰시는 용어가 참 거칩니다(웃음). ‘패악질’, ‘새끼들’이라는 단어가 난무해요. <위클리 수유너머>가 아닌 다른 잡지라면 아마 검열에서 다 걸려서 줄그어졌을 단어들입니다.(웃음)

베이랑: 사실 제 집사람이 자주 지적하는 문제기도 하죠(웃음). 저는 표현이 감정과 느낌에 충실한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나도 철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내 용어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고상한 용어로 쓰면 뭔가 빠져나갔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요. 가령 말콤 엑스가 연설할 때 그 눈을 보세요, 그 섬뜩한 느낌. 아마 그에 대한 백인들의 거부감은 그의 눈빛에서 느낀 공포감같은 것에서 온 게 아닌가 싶어요. 마틴 루터 킹의 단호하지만 온화하고 포용적인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거죠. 말콤엑스가 ‘화이트 데블스(white devils)’라고 말할 때, 그걸 ‘하얀 악마들’이라고 해서는 느낌이 안 살아요. ‘허연 악마 새끼들’이라고 옮길 때, 느낌이 옵니다. 그렇지만 감정에 너무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글을 써보려는 노력은 계속 하고 있습니다.

고병권: 네, 앞으로도 선생님의 ‘섬뜩한 용어들’, 많이 기대하겠습니다(웃음). 지난번에 ‘린칭’을 다루셨고, 이번호에는 ‘생체 실험’을 소개하는데요, 다음에는 어떤 주제들이 뒷골목에 있습니까?

베이랑: 미국의 사법제도, 그리고 경찰의 폭력을 다룰 생각입니다. 사실 뒷골목이라고 했지만, 린칭 같은 경우 신문에 광고까지 내면서 사람을 죽였고 생체실험도 정부와 대학들이 적극 참여하는 아주 공적인 것이죠. 다만 그렇게 공(개)적이면서도 그 역사를 감추거나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식 아래, 의식의 뒷골목에 있는 거죠. 사법제도, 특히 사형집행제도도 그렇고, ‘경찰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경찰의 폭력성은 과거에는 깡패 수준이었고 옛날과는 달라도 지금은 다른 의미에서 아주 폭력적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유로 이런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인의 역사의식이란 영화를 통해 흔히 보여지듯 기껏해야 영웅적인 백인이 ‘과거 오류를 이렇게 극복했다’는 식의 일종의 영웅담론, 승리담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금 자료가 다 정리되지는 않았는데 시간이 되면, 부의 불평등과 관련된 미국만의 역사적 뿌리를 드러내는 일, 그리고 참, 미국의 기독교 문제, 꼭 다루어야 할 사안입니다. 주제도 자료도 너무 많아요. 이 모든 걸 읽다보면 아주 우울해집니다. 일부러라도 즐겁게 해나가야 하는데 침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그리고 글을 쓰다보면 고발 충동을 느끼죠, 미국의 치부를 폭로해야 한다는(웃음). 하지만 그런 충동은 일시적인 거죠. 사실은 그것이 드러내는 구조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병권: 앞으로도 정말 많은 주제들이 기다리고 있군요. 뒷골목이 꽤나 붐비는 곳이군요. 뒷골목에서 하나씩 불려나올 주제들, 흥미진진하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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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동시대반시대] <인터뷰> ‘미국 역사의 뒷골목’ 저자 베이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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