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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칼럼

점거 텐트, 그 마을들의 노래

- 신지영

* 11월 19일, 오랜만에 만난 오키나와 친구 코즈에.

2011년 6월 원전집회 모습

2011년 6월 원전집회 모습

한달 쯤 전이다. 오키나와의 아라사키 모리테루(新崎盛暉)선생님이 도쿄에 오신다는 소식에 연속 티치인 오키나와(連続ティーチ・イン沖縄)에 갔다. “코즈에, 오랜만! 근데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지?” 코즈에는 나에게 오키나와와 도쿄 사이의 온도차에 대해서 느낄 수 있게 해준 오키나와 출신 친구다. 하와이 유학 기간 중 오키나와와 하와이의 연대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적이 있는, 말이 통하는 사이다. 한두달에 한번씩 오키나와 데모에 가면 어김없이 코즈에가 있고, 배고파지는 시기가 비슷한 탓에 둘만 빠져나와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눴다. 선두에서 말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섬세한 마음을 지닌 코즈에 덕에 오키나와를 내 일처럼 느끼게 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우리 왜 이렇게 오랜만이지?

3월 11일의 재난 이후, 반원전 탈원전 데모가 일본 전역을 휩쓸었다. 그만큼 절실했던 탓이다. 한편 7~8개월동안 연속 티치인 오키나와도 매달 있던 <신주쿠 한가운데의 오키나와 강좌>도 정지했다. 오랜만에 열린 티치인의 주제는 <3.11 재난 후 동아시아와 오키나와>였다. 탈원전 운동에 집중해 있는 사이에 오키나와 다카에에 미군기지 공사가 재개되었다. 이것이 3월 11일 이후의 상황과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3월 11일 이후 불거진 문제들을 기존의 사회운동 즉 오키나와, 식민지, 재일 조선인, 비정규직, 빈곤, 홈리스 등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사고할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백성을 버리기로 작정한 국가와 행정은 참으로 부지런했다. 도쿄에서 탈원전 반원전 소리를 높이는 중에도, 행정과 국가는 후쿠시마 주민들을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피난시키거나 도호쿠 주민들의 생활 대책을 제대로 마련해주기는 커녕,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기지 건설을 본격화하는 예산을 책정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당하거나 월급을 지급받지 못하는 것을 ‘비상시’라는 이유로 정당화했으며 아라카와(荒川) 하천 부지에서 홈리스들을 몰아내는 행정 대집행을 서둘렀다. 3월 11일이라는 날짜는 마치 그 이전과 이후가 단절된 듯한 인상을 주었고,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호명은 ‘포스트 전후’ 혹은 ‘새로운 일본의 부흥’이 시작되는 듯한 인상을 주었지만, 상황은 ‘변화’ 했다기 보다는 ‘악화’되었다. 기존의 문제들이 3월 11일 이후 대두된 국가와 대기업의 폭력 속에서 드러난 폭력과 겹쳐지고 반복되면서 그 깊은 심연을 드러내는 데에는 일종의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이상 친구의 초상 구본웅 1935

이상 친구의 초상 구본웅 1935

물론 탈원전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또 다른 폭력의 그림자들이 조금씩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충분히 감지하지 못한 점에 대해 반성하게도 된다. 그러나 현재의 이 상황은 탈원전이냐 탈미군기지냐, 탈원전이냐 탈빈곤이냐 하는 식으로 배재된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후쿠시마, 오키나와, 빈곤층, 재일조선인 등이 서로 더 강하게 연결되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평시건 위기시건 늘 부지런히 작동하며, 국가 행정 기업 등이 긴밀히 협조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3월 11일 이후의 문제들을 기존의 문제들과의 연속성 속에서 사고하고, 각 운동 분야들이 서로의 문제를 함께 논의해가려는 시도들이 두드러지는 것은 3월 11일 이후 1년간의 운동이 날카롭게 획득한 중요한 연대의 방향성이다.

* 12월 17일, 점거텐트 속 <지하대학>과 후쿠시마출신 히마와리씨.

“오늘 왔으면 참 좋았을텐데. 류큐 대학의 아베 코스즈(阿部小涼)씨가 왔었어. 헬리콥터 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분인데 자신이 왜 오키나와에서 이 경제 산업성 점거 농성장까지 오게 되었는가,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어째 설명하려니까 잘 말이 안 나온다. 그보다 넌 왜 운동에 참여하게 됐어?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아라카와 텐트마을 떡방아

아라카와 텐트마을 떡방아

코즈에와의 짧은 대화는 내 마음을 쳤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오키나와의 아베씨는 왜 도쿄의 경제 산업성 앞 점거 텐트까지 오게 되었던 것일까? 12월 17일에 열린 지하대학 유스트림 중계를 찾아 보았다(http://www.ustream.tv/recorded/19197362 / http://www.ustream.tv/recorded/19198296) <반기지 반원전, 미래의 상상력>이란 테마로 열린 지하대학 소개글은 다음과 같았다. “원전 문제가 끝없이 계속되는 한편, 오키나와에서 다나카(田中) 방위성국장이 ‘범하다(犯す)’1등의 폭언을 했다.-중략-오키나와 북부 히가시 마을 다카에(東村高江)에 미군 헬리콥터 기지 건설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중략- 설령 원전이 전부 사라져도, 오키나와에 기지가 계속 남아있다면, -중략- 후쿠시마에 방사능 피해를 강요하고 있다면, 이 모든 것은 동일한 문제다. -중략- 오키나와-도쿄-후쿠시마를 왕복해가면서 우리들이 지금 하고 있는 반원전 운동의 과제와 관련시켜 이야기해 보자.”

첫 번째 강연자는 아베 코스즈(阿部小涼)씨였다. 그러나 그의 강연은 유스트림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미군기지 건설 반대를 위한 모든 활동들이 정부에 대한 방해 증거로서 재판에서 불리하게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죄송하지만 유스트림 중계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카에에 오시면 뭐든 다 이야기해 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갑자기 끊긴 영상. 그 침묵 속에서 오키나와에 건설중인 미군기지의 폭력성, 오키나와의 마을을 침묵시키는 국가 권력의 횡포가 육박해 왔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반원전 점거 텐트에 온 그녀의 무게감이 전해져왔다. 몸소 오지 않으면 전할 수 없고 왔음에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 말할 수 없는 것들의 강렬한 온도를 온몸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두 번째 강연자는 우에마츠 스세이지(植松青児)씨였다. 그는 대규모 집회가 진행될 때 후쿠시마와 도호쿠 마을의 복잡성을 도쿄에서 공감하자는 소규모 집회를 만들어 왔다. <후쿠시마의 복잡한 상황과 수도권의 우리들>데모라든가 <배상과 자주 피난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사람들을 고립시키지 않기 위한 데모>등이 그것이다. 그는 ‘엄청난 사고’가 없으면 우리는 생각하지 못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피해지의 복잡한 사정을 도쿄에서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자고 했다.

세 번째 강연자는 후쿠시마 출신 <경제산업성 여성 점거 사무국(福島育ち、経産省前女性座り込みの事務局)>의 히마와리(해바라기라는 뜻)씨였다. 그녀의 말은 터질 듯한 울음이 뒤섞여 있어서 옮길 수가 없다. 또랑또랑하고 명쾌한 울음에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단편적 말들만 겨우 옮겨본다. “처음엔 탈원전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도쿄에서 동북지방의 전기를 써 온 것에 대해 어떤 반성도 없이 단지 (원전이) 싫다고 하는 게 아닐까라는 위화감이 있었어요. 저도 후쿠시마 출신이지만 도쿄에서 후쿠시마 전기를 썼으니까, 내게도 그런 가해성이 있어요……. 피난소에 많은 여자친구들이 있어요. 경제적인 이유로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피난에 대해서는 가족사이의 의견차가 너무 커서 이혼하는 경우도 많구요. 도망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아이에게 미안해하면서 마음속으로 미안해하면서 생활해요…….후쿠시마 사람들은 포기한 게 아니예요. 매일 매일이 생활이니까 생각하는 게 힘든 거죠 ……. 비가 오니까 후쿠시마 아이들이 ‘우비, 우비’라고 외치기 시작해요. 엄마들이 조금이라도 비를 맞으면 안된다고 했으니까……아이들이 ……. 아이의 생명과 생계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거예요. 피난 생활을 유지할 돈이 없어서 돌아간 사람들도 있어요. 후쿠시마 사람들은 죽음을 강요당하고 있어요……. 뭐든 해야겠기에 이 텐트와 관계를 맺게 되었어요. 이곳에 오면 이런 기분들을 말할 수 있고,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후쿠시마 상황은 복잡해요. 나카토오리, 하마토오리, 아이즈가 분열되어 있고. 당사자들이 왜 움직이지 않냐고들 하는데, 여러 활동들로 정말 바쁘고 마을의 상식이나 통념들도 있어서…… 여성들이 움직이기 어려워요. 저는 그녀들이 온 순간 눈물이 났어요. 정말 힘든 상황에서 잘 와 주었다고…… 도쿄와 온도차가 정말 커요…… 예전에는 나도 오키나와에 대해 잘 몰랐어요. 그렇지만 그 아픔을 알아요. 후쿠시마는 정말 자연이 좋은 곳이라서…….그거 빼면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는 눈에는 안 보이지만 다 오염되었죠. 편안한 마음으로 산과 하늘을 볼 수가 없어요. 오키나와의 다카에 헤노코도 모두 그런 곳이지요 ……. 원전이나 기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가 희생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런 일에 스스로가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서 관계가 없을 수가 없어요. 당사자성을 공유하고 싶어요.”

함께 만든 신년 떡

함께 만든 신년 떡

오키나와의 아베씨, 도쿄의 우에마츠씨 후쿠시마의 히마와리씨의 말을 통해서 나는 그들이 살아온 마을과 내가 살아온 마을 사이의 있는 온도차를 느꼈다. 노력해도 아베씨처럼 오키나와를 느끼는 것도 히마와리씨처럼 후쿠시마를 느끼는 것도 가능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 온도차를 느끼는 사람들의 가슴은 그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뜨거운 온도를 지닐 수도 있다. 텐트에 와서도 오키나와의 언어를 전달할 수 없는 아베씨의 몸이 보여주는 긴박함을 느끼는 순간. 히마와리씨가 후쿠시마에 대한 애정을 통해서 오키나와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는 순간. ‘우비 우비’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비명이 내 가슴으로 파고든 순간. 오키나와, 후쿠시마, 도쿄 사이에는 각각의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뜨거운 온도가 형성되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걸까? “여기”는 어디인가? 오키나와의 아베씨는, 도쿄의 우에마츠씨는 후쿠시마의 히마와리씨는 우리는, 도쿄가 아니라 “점거 텐트” 속에 있다. “이곳”에서, 탈원전의 기치는 탈기지, 탈빈곤, 탈식민지주의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온도차는 연대로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아니라 실은 연대의 시작이다. 스스로의 뜨거움을 통해서 타인의 뜨거움이 지닌 색깔과 온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가슴을 뜨겁게 만들 수 있겠는가? 만약 내가 그 마을 사람들과 똑같아져야 한다면, 어떻게 차이를 지닌 연대가 가능하겠는가? 벽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벽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벽을 느끼고 그 벽을 통해서 공감하기 위해 우리는 “이곳 텐트”에 함께 있다. 동화되거나 정착하는 게 아니라, 드높게 달라지고 더 멀리 이동하기 위해서.

* 12월 14일, 텐트마을의 “노래”들 人工의 날개짓들

12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한국으로부터 소식들이 빗발쳤다. 수요집회 1000회를 둘러싼 동아시아 전역의 공감, 김정일의 죽음이 몰고 온 불안, 나꼼수의 실형 선고를 둘러싼 반발. 내년에는 한국, 타이완, 미국에서 일제히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일본 내부의 문제들이 이 외부로부터의 소식과 얽혀 들어갔다. 이때 다시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오키나와 친구의 그 질문이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러나 그 순간 어찌해도 주어가 바뀌어 버린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이 일련의 사건들은 전세계적 냉전 체제에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한다. 수요집회 1000회는 한국과 일본이 맺은 65년 조약이 적용될 수 없는 방대한 영역을 보여주며, 김정일의 죽음은 북한을 둘러싼 역학을 공고하게 하겠지만 동시에 그것이 매우 약한 고리가 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이것은 3월 11일 이후가 일본의 전후 55년 체제에 일으킨 변화를 볼 때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후쿠시마-도쿄-오키나와’를 생각하는 것과, 식민지문제, 위안부 문제나 북한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감촉을 준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이른바 한국과 관련된 역사적인 문제들이 훨씬 더 직접적이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내 속에서 후쿠시마, 도쿄, 오키나와라는 마을들의 위치가 살짝 어긋나 버린다. 일본 내부 지역간 “온도차”와 한국에서 절실한 문제의 “어긋남” 사이에서, 올해 1년 동안 자주 길을 잃었다.

비슷한 느낌을 일본의 젊은 대학생들에게 조선의 식민지 문학을 가르칠 때 느끼곤 한다. 한국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너무나 당연한 비판대상이어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학생들의 눈빛 앞에서 나는, 과연 식민지 지배가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나빴는지 보편적인 가치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설명해야 한다. 어떤 작품에서 내 피가 뜨거워질 때 그녀들의 피가 식거나 망설이고 있으면, 이 온도차와 어긋남 사이의 비밀을 알기 위해, 여러 지역 여러 민족 여러 국가 여러 운동의 입장에 스스로를 가져다놓고 생각해 봐야 했다. 그러다 보면 그 수많은 경계선들이 어긋나면서 발밑이 흐물흐물해진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내가 건너온 것은 일본과 한국의 국경이 아니라는 것을. 빛과 어둠이 수없이 겹쳐진 여러 개의 국경과 이곳에서 새롭게 만나고 있다는 것을. 그때마다 떠올리는 것이 이상의 도쿄행, 그리고 도쿄에서의 그의 죽음이다.

함께 만든 신년

함께 만든 신년

이상이 처음 도쿄를 향했을 때 그는 도쿄=근대의 첨단이라는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도쿄에 온 순간 그는 도쿄가 서양근대의 모조품임을 날카롭게 알아차린다. 또한 서로를 모방하면서 위계화하는 근대의 본질 속에서 식민지 지식인인 자신이 처한 위치란 절망 뿐임을 알아차린다. 그는 자신이 꿈꾼 근대가 도쿄에 없음을, 스스로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음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오감도>에서처럼 무서워했고 동시에 무서운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생각건대 그는 자유로웠을 것이고 그곳이 도쿄이든 경성이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가 넘어선 것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국경이 아니라, 현존 세계=근대의 극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 자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자각이 그를 더 깊이 추락시켰지만, 동시에 그 추락 속에서 그는 더욱 드높은 세계를 꿈꾸었다. 소설 <날개>의 마지막 장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흔적은 바로 그러한 시도의 흔적들인 것이다.

후쿠시마와 오키나와와 도호쿠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텐트 마을’과 그곳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는, 바로 이상이 꿈꾸었던 인공의 날개들이다. 일본 내부에는 후쿠시마의 원전노동자, 후쿠시마의 주민, 도호쿠의 주민, 오키나와의 주민, 도쿄 및 전역의 빈곤층과 비정규직들, 오늘도 쫓겨나고 있는 홈리스들, 이 모든 ‘국가 내부의 식민지’가 가시화되고 있다. 이 모든 ‘배제당한 우리’는 일본 어디에도 한국 어디에도 세계 어디에서도 살아갈 권리를 박탈당한 현대판 李箱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국경/지역 간의 온도차와 어긋남을 끌어안고 점거 텐트를 만든다. 도쿄 한 가운데에, 오키나와에, 공원에, 빈터에. 그리고 ‘이동’과 ‘삶’을 점거하자고 노래한다. 후쿠시마로부터의 피난의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민족/국가/지역 간의 경계만을 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당면한 생존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전후 냉전 체제 이후의 집단과 삶을 상상하기 위해서. 식민지 현실 속에서 스스로 ‘부재’하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드높은 인공의 꿈을 점거하려 했던 李箱처럼.

지하대학을 주도하고 있는 히라노 켄은 이번 모임을 텐트와 노래라는 두 단어로 정리했다. 지하대학을 코엔지가 아니라 경제산업성 점거농성 텐트에서 하자고 결정했을 때, 그에게는 여러 가지 텐트의 기억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가스미가세키(霞ヶ関)의 텐트 앞은 히비야 공원의 파견 마을(派遣村)이 있었던 곳이며, 그 전에는 신주쿠 서쪽 출구에 골판지 박스마을(段ボール村)가 있었고 그 훨씬 전부터 산야의 타나히메(玉姫公園)의 월동준비가 계속되고 있었으며, 오키나와 다카에의 도로변에는 늘 텐트가 있다. 나에게는 걸개 그림을 그렸던 옥상, 대추리의 점거 가건물과 텃밭, 미야시타 공원의 텐트, 그리고 이상이 헤매어 다니다가 감옥에 수감되었던 1930년대 중반 도쿄의 거리가 떠오른다. ‘Occupy’는 미국 월가에서 이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 곳에서든 시작되어 있었다.

아라카와 텐트마을의 저녁무렵

아라카와 텐트마을의 저녁무렵

텐트가 있던 곳에는 늘 노래와 음식과 자연의 웅성거림이 있었다. 노래와 음식과 공기에 실려 텐트의 기억은 몸 속에 각인되었다. 히라노 켄씨는 그것이 노래가 지닌 망령성이라고 한다. 빅토르 하라가 부른 <평화롭게 살 권리http://www.youtube.com/watch?v=WMoRygHvSWA>라는 노래는 전쟁반대 노래이지만 그가 죽은 뒤에도 그 망령성이 남아 일본의 일용 노동자 마을 산야에서 불려지고 4월 10일 코엔지의 반원전 데모에서 불려졌다. <평화롭게 살 권리>도 <불굴의 백성(http://www.youtube.com/watch?v=jAHJTqz8pjc&feature=related)>도 허밍하고 싶어지는 노래들이다. 이 망령성과 허밍성이 우리를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텐트와 노래는 우리를 이동시킨다. 자신의 마을로부터 다른 마을로. 따라서 1년간 도쿄의 거리가 집회로 넘쳐났던 것은 단지 3월 11일 이후의 상황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이전부터 사람들의 몸 속에 각인되어 왔던 텐트 마을, 그 점거와 연대와 노래의 쾌감들이 다시 우리를 거리로 나서게 했던 것이다. 근대성의 경계를 훌쩍 넘어 꿈꾸었던 식민지 조선의 문학가 李箱은 이 도쿄에서 죽었지만, 천차만별의 국적과 성향을 지닌 李箱들이 도쿄에서 다시 텐트를 치고 노래하고 있다.

* 12월 24일, 아라카와(荒川) 하천 부지의 떡방아 소리.

며칠 후면 일본의 연말연시가 시작된다. 12월 31일부터 3일간은 모든 가게와 공장이 멈춘다. 그동안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기존의 홈리스와 빈곤층들과 3월 11일의 재해로 새롭게 형성된 빈곤층들이다. 이런 혹독한 계절에 아라카와 하천 부지의 홈리스와 노동자들은 20년간 살아왔던 텐트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24일에는 그곳에서 떡방아 찧기 대회가 있었다. 그곳에도 텐트와 노래와 음식과 이야기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복수의 시간 속을 스쳐지나갔던 그 모든 텐트 속 연대의 쾌감과 고통이 없었다면, 그들은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3월 11일 이후 일본 전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텐트에서는 그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노래가 뒤섞여 들린다. 언어도 시간도 공간도 사람들도 다른데 기묘하게도 그 마을들의 노래는 마치 하나의 노래 같다. 모두 다른 사람들인데 어딘가에서 만났던 친구 같다.

올해 이곳에 연재한 글들은 주로 3월 11일 이후 부각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잊혀진 문제도 있지만, 이전부터 지속되어 온 문제들을 더 깊이 들어다 볼 수 있기도 했다. 앞으로는 3월 11일 이후의 상황 속에서 기존의 문제들과 마을들이 어떻게 서로 연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다. 기억의 속임수에 속지 않고, 망각의 달콤함에 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면 기억의 달콤함과 망각의 속임수를 이용해 멋진 거짓말을 만들어 내거나.

1년 동안 일본에서 만들어진 여러 텐트 마을들에서 친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달해 보았다. 그 이야기를 접할 때 어떤 온도차와 어긋남을 느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느끼는 온도차와 어긋남이 낯선 서로를 끈끈하고 강렬하게 끌어들여, 각자가 몸에 간직하고 있던 텐트마을의 노래와 음식과 이야기를 꺼내놓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래 본다.

  1. 다나카(田中) 전 방위국장의 폭언이란 “이제부터 성폭행하기 전에 성폭행 하겠다고 말하겠습니까?(これから犯す前に犯しますよといいますか)”라고 후텐마 미군 비행장 이전 문제를 성적으로 비유해서 말한 것을 의미한다. 정부가 헤노코의 미군 기지 이전을 위한 환경영향평가 시기를 발표하지 않은 것을, 여성에 대한 성폭행에 비유한 발언이다. 이 발언은 오키나와와 여성에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를 무의식중에 드러냈다. 후텐마 이전이 16년 전 미해병대 병사가 오키나와 소녀를 폭행한 사건에서 비롯된 사안이며 현재도 미군에 의한 폭행사건이 지속되고 있는 점도 있어서 이 발언은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다나카는 경질되었지만, 오키나와인들의 분노는 하늘로 치솟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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