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노동잔혹사

노스페이스

- 김민수(청년유니온)

전단지

“감사합니다”

연말 이 맘 때면 길거리에 찌라시, 아니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청소년이 유독 눈에 띈다. 예전에는 한 명이 독고다이로 지하철 역에 버티고 서서 나눠 줬는데, 요즘은 4~5명의 그룹이 여기저기 포진해서 행인들을 빈틈없이 공략한다. 처음에 한 두 번 거부하던 이들도 결국에는 지쳐서 한 장 받아가는 형국이다. 번화가에서 익숙하게 만나던 중년의 여성들도 아니고, 자신의 조카나 자식 뻘 되는 친구들이 어설픈 어조와 몸짓으로 나누어주는 찌라시에는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묘한 힘이 있다.

이렇게 만나는 이들의 상당수는 중학생이며, 편의점 노동시장으로 유입되지 못한 일부 고등학생들이 포함된다. 전단지 아르바이트는 시급이 아닌 배포 된 찌라시의 숫자로 임금이 결정 되며, 한 장에 1~30원 수준이다. 100장을 뿌려봐야 2천 원 남짓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말이 쉬워 100장이지 전단지 시장(?)이 포화 상태인데다가, 행인들의 거부빈도(?)가 대단히 높아진 요즘에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유동인구가 적은 지역이거나, 숫기 없는 친구들의 경우 2시간을 꼬박 서있어도 100장, 못 채운다. 또한 이들이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이러저러한 트집이 잡혀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할 것이란 추정에 이르게 되면, 졸라 피곤하다.

전통적인 시장 원리에 따르면, 전단지 배포는 사장 되어야 마땅한 산업(?)이다. 배포 과정에서 창출 되는 홍보효과나 수익성이 대단히 모호하며, 이에 따라 전단지 종사자의 인건비 또한 최저임금 미만으로 책정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저열한 임금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집단이 없다면 존재가치가 없는 시장이지만, 편의점이나 커피숍 등 주변부 노동시장에도 편입 될 수 없는 중년의 여성과 청소년들이 이에 종사함으로서 이 업계는 대단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예전에는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전단지를 배포하였다면, 요즘에는 타 업체와의 홍보 경쟁에 밀려 낙오되지 않기 위해 전단지를 배포한다. 폭발적으로 과열 된 자영업과, 편의점 바코드를 손에 쥘 수 없는 청소년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 진 ‘죄수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전단지 산업에 대한 분석은 이 쯤으로 정리하고, 이제 청소년들이 ‘왜 전단지를 뿌리는가’, 다시 말해 ‘왜 돈을 버는가’를 분석해야 한다. 어린 나이에 생계전선 삼아 뛰어든 이들도 없지 않겠지만, 절대 다수는 생존이 아닌 실존을 위해 돈을 모은다. 청소년들에게 실존이란, 자기긍정을 위한 욕망의 소비이다.

노스페이스

몇 년 전부터 나타난 현상인데, 겨울철 아웃도어 제품을 입고 다니는 청소년들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흔한 일이다. 탁월한 보온성과 디자인, 교복과의 결합이 용이한 점 등을 근거로 아웃도어 제품은 청소년들의 필수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부상했다. 그 중에서도 노스페이스는 이 바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갖고 있다. ‘노스페이스 중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의 행렬은 이제 낯선 광경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아웃도어 제품이 대단히 고가라는 점에 있다. 10만원 대 후반에서, 60만원에 이르기까지 하는 이 연장들은 청소년들이 접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언론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른들의 물질만능주의가 청소년들에게도 전염 되었다’라는 식의 하찮은 분석을 일삼지만, 이는 이렇게 단순하게 지켜 볼 문제가 아니다. 청소년의 욕망은, 그들이 발 딛고 선 사회의 반영이다.

특정 브랜드와 명품에 대한 집착은 한국 사회에서 보여지는 대단히 독특한 현상이다. 나는 이를 ‘자기긍정’을 위한 투쟁으로 해석한다. 사회가 긍정하는 가치가 대단히 협소할 때, 사회 구성원의 절대다수는 소외 된다. 사회가 긍정하는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이 1:1000일 때, 사회가 긍정하는 SKY의 경쟁률이 1:1000일 때, 이 가치에 조응하지 못하는 999의 존재들은 소외 된다. 선생님의 관심어린 애정으로부터 소외 된 이들은 자기 긍정과 자존을 위해 소비라는 우회로를 선택하며(과거에는 주먹이었으며, 이는 오늘날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샛길로 빠진 이들은 동질감이라는 공동체의 보호를 받게 되며, 이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다시 한 번 도태된다.

이의 연장선에서, 노스페이스를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계급의 형성이다. 과거에도 청소년들의 욕망과 부러움을 사는 브랜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휠라, 프로스펙스, 이스트팩 등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진부함을 뛰어 넘으면서, 선망의 대상이 된 브랜드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이들은 소비하는 층이 광범위 하지 않았으며,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영역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해당 브랜드의 가격별로 깨알같은 계급이 형성되지도 않았다. 선망의 대상이 되는 특정 브랜드를 구입할 수 있는 ‘독특한 집단’으로 과거의 ‘유행’이 존재했다면, 필수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브랜드임과 동시에, 그 가격에 따라 계급과 질서가 형성되는 것이 현재의 ‘유행’이 존재하는 것이다. 얘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고, 딱 어른들 하는 꼬락서니대로 아이들의 질서가 형성되고 있다.

어떤 죽음

얼마 전, 동갑내기 친구 2명에게 1년 가까이 괴롭힘을 당하던 한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을 열거할 수 있겠으나, 나의 눈을 사로잡는 문구가 있었다. 이들은 피해학생에게 특정 브랜드의 상품을 구입하기 위한 목돈을 마련해오라는 요구를 지속했다. 특정 브랜드가, 어떤 것인지는 볼 것도 없다.

이 사회는,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교육이 산으로 가고 있어서, 아이들이 ‘노스페이스’를 즐겨 입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질만능주의’나 ‘요즘 애들이란’ 따위의 초딩일기 수준의 분석과 설왕설래는 다 때려 치우자. 상황과 맥락을 처절하게 분석하여,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면, 이 땅의 내일은 없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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