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해를 따라 저무는 일, 사람을 따라 남는 일

- 고병권(수유너머R)

2011년, <위클리 수유너머>의 세밑 인사 올립니다. 이맘때면 누구나 하는 말,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뭅니다. 여러분은 그 ‘다사다난’ 했던, 그 많던 일들 중 어떤 것을 기억하십니까. 올해의 마지막 편집자 말을 쓰면서 지난 1년간 우리가 다루었던 주제들을 쭉 훑어봤습니다. 부당 노동행위와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서 싸웠던 홍대미화원 노동자 이야기를 시작으로, 등록금 때문에 힘들어하는 대학생, 커피전문점에서 일하는 청년노동자, 구제역 때문에 생매장한 동물들, 쓰나미와 방사능피폭으로 희생된 일본 민중들, 쥐그림 재판, 4대강의 파괴현장, 강제철거에 맞섰던 두리반과 마리, 희망버스, 병역거부자, 잡년 행진, 용역의 폭력, 제주 해군기자, 월가 시위, 한미FTA, 한국의 원전, 재능지부노조의 싸움 등등.

쭉 주제들을 나열해놓고 보니 ‘다사다난’했다는 말이 얼마나 쉽게 나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저 일들 중 두세 가지만 차분히 음미하려 해도 감정적 동요가 커서 그 가짓수를 세 볼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우리가 ‘다사다난’이라고 말하며 저무는 해를 따라 묻어버리는 그 많은 일들이 거기 관여한 이들에게는 그대로 남겠지요. 어떤 일은 해를 따라 저물지만 어떤 일은 사람을 따라 남습니다. 좀처럼 떨쳐버릴 수 없기에 결국 끼고 살아야 하고 어쩌면 나를 변형시켜서라도, 내 삶을 통째로 바꾸어서라도, 껴안아야 하는 그런 일들이 분명 있습니다. 해를 따라 저물지 않는 기억들, 아니 저물기를 거부하는 기억들, 그것들을 쓰다듬으며 살아가는 길, 그것들과 연대하면서 싸우는 길, 그 길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번호 표제는 <미국 역사의 뒷골목>입니다. 저자인 베이랑(Beilang) 선생님과 지난 주 인터뷰를 했습니다. 첫 회에는 흑인들에 대한 잔인한 린치의 역사가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이번호에는 미국이 자행한 ‘생체실험’의 역사가 소개됩니다. 온갖 폭력이 난무했고 온갖 고통과 슬픔이 함께 했던, ‘역사의 뒷골목’에 주목하는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 선생은 이렇게 답하더군요. 역사에서 가장 고통받았던 이들의 삶, 그것이 그냥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것은 어쩌면 성숙의 문제라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괴롭고 수치스러웠던 순간, 그 순간들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야 우리는 성숙하지 않느냐고, 그런 것처럼 역사는 괴로운 순간, 치욕의 순간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성숙한다고. 그런 것들을 회피하면서 역사를 구성하려는 것은 성숙하지 않으려는, 말 그대로 미숙한 채로 남으려는 행동이라고 말이죠.

선생의 말을 들으며 언뜻 발터 벤야민이 말한 ‘억압받는 이들의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역사’를 떠올렸습니다. 억압받는 이들의 원통함, 그들이 흘렸을 눈물, 그들이 이를 갈았을 일들, 역사에 속하지 못했기에 또한 역사와 더불어 묻힐 수도 없었던 그 모든 일들에 주목하는 역사 기술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베이랑 선생의 말을 떠올려보자면, 우리가 성숙의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은 바로 그 일들과 함께 할 수 있을 때이겠지요.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옵니다. 우리 모두가 나이 한 살을 더 먹는 때입니다. 지난 1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응답 1개

  1. […] [편집자의말] 해를 따라 저무는 일, 사람을 따라 남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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