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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며느리에서 활동가 정영신으로

- 박정수(수유너머R)


용산며느리는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에 있다. 서대문 사무실 가는 길이 왠지 낯익다. ‘어? 이 길은 홈리스행동 사무실 가는 길인데?’ 도착하고서야 전에 몇 번 와 봤던 ‘홈리스행동’ 아래층에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있다는 얘기가 기억났다. 와본 곳이지만 처음 방문한 그곳에 용산며느리 정영신씨가 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만나자마자 “어? 유명하신 분이 오셨네요. 쥐 그림 그리신 분이죠?” ‘어디서 봤더라?’ “전에 검찰권력 남용 규탄 좌담회에서…” 그제서야 생각났다. 전에 봤지만 처음 만난 정영신, 그녀는 이처럼 ‘기억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용산참사의 진실에 운명을 건 마흔 한 살의 여자다. “용산참사 유가족에서 반-개발주의 활동가 정영신으로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난 겁니까?”

2010년 1월 9일 355일 동안 미뤘던 장례식을 치뤘어요. 감옥에 있는 남편(이충연)과 저는 반대했어요. 도대체 뭐가 해결됐다고, 뭐가 밝혀졌다고 장례를 치른다는 말인가? 아버지(이상림)를 불태워 죽인 아들이라는 누명을 쓰고 3년 째 감옥에 갇혀 있는데, 우리가 요구한 가게 자리를 얻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억울한 넋들을 하늘로 날려 보낸단 말인가? 장례식이 끝나고 모두 흩어졌어요. 유가족 어머니들도, 연대단위들도 모두 남일당에서 사라졌죠. 집에 혼자 돌아오니 너무 공허했어요. 몇 달 간 바깥을 나갈 수 없었어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에 스스로를 가둬 버렸어요.

그러다 우연히 ‘김진숙’이라는 이름을 들었어요. 35m 높이 쇠덩이 위에서 혼자 150일 넘게 농성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조건 거기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출발장소인 재능노조 앞에 갔더니, 아는 사람들이 “어? 왠일이세요?” 라며 놀라더군요. 85크레인 위에도 올라가 봤죠. 가대위분들도 만나고 전국에서 몰려온 희망버스 탑승자들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은 살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2009년 1월 20일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이 타죽기까지 25시간 나는 뭘 했나? 아니, 그 전 2008년도 철거반대 싸움을 하면서 나는 도대체 뭘 했나? 언론사에 찾아가지도 못하고, 인터넷으로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희망버스 같은 게 있었다면 그런 참사는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캄캄한 어둠 속 남일당 망루와 다를 바 없는 85크레인 위에서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자고 마음 먹었죠. ‘전철연’을 따라다녔지만 거기서는 제가 할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에 찾아왔죠. 용산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구속된 분들을 위해, 그리고 재개발사업으로 쫓겨나는 세입자들을 위해 활동하기로 한 거죠.

정영신씨를 인터뷰하기로 한 건 그녀의 트위터 소개글에 “용산 레아입니다. 용산며느리로 통한답니다^^ 이젠 용산참사 진상규명 위원회 신입활동가로 활동중입니다.” 라는 문구 때문이다. 용산 레아와 용산 며느리, 신입활동가, 이 세 단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삶의 격변이 궁금했다. “용산 레아를 운영하게 된 건 언제인가요? 이충연씨와 결혼한 건 언제?”

충연씨와는 6년 동안 연애하다 결혼했어요. 친구 애인의 후배로 소개받았는데 사람이 참 성실하고 착했어요. 그때 충연씨와 저는 각자 노점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제 노점을 먼저 챙겨 주고, 저희 아버지 병구완도 자기 일처럼 해 줬죠. 저보다 엄마가 더 맘에 들어 했어요. 그러다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하시던 ‘레아’ 호프집을 같이 수리하고 나서 결혼했어요. 우리 손으로 하나하나 정성들여 수리한 ‘레아’였는데, 얼마 안 있어 재개발 사업승인이 떨어져 버렸어요. 그때부터 용역들이 돌아다녔어요. 용역들, 정말 끔찍해요. 아버님 앞에서 제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건 예사였어요. 제 앞에서 시어머니 뺨을 때리기도 하고, 한번은 아버님이 현수막을 달려고 사다리에 오르자 욕을 하며 사다리를 흔들었어요, 말리는 사람들을 내동댕이 치고 사다리 위에 있는 아버님의 성기를 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때렸어요. 가게 앞에 오물을 버리고 갖은 욕을 하고… 지금도 덩치 큰 사람들 보면 다 ‘용역’ 같아서 무서워요.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도 나고.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요. 남편한테 “그냥 이사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충연씨는 “우리 같은 젊은이야 딴 데 가서도 살지만, 아버님 같은 어르신들은 어디 가시겠냐며” 세입자 어르신들 한 명 한 명 돌아보며 다녔어요.

그럼 결혼한지 얼마 안 되서 참사가 일어난 거네요?

네, 8개월 만이죠.

2009년 1월 20일 영신씨는 어디 계셨어요?

건물 맞은 편에 있었어요. 용역이랑 경찰이 못 들어가게 했어요. 핸드폰으로 남편이 물을 구해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펜스를 뚫고 ‘레아’로 들어갔어요. 4층에서 맞은편으로 물병을 던져 주려고. 아래에서는 용역깡패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남일당 건물은 아수라장이 됐어요. 불이 난 줄도 몰랐어요. 망루가 무너지고 나서야 알았죠.

그 25시간 동안 정말 무서웠겠어요.

너무 무섭고 가슴이 아파서 울고만 있었어요. 농성자들 밥 해 주려고 망루에 올라간 한 여성분이 계셨어요. 불이 나고 경찰에 끌려 나오고 나서 그 여자분은 지금까지도 그때 충격으로 심한 외상 신경증을 앓고 계세요. 25시간 동안 함께 부둥켜 안고 싸웠던 사람들이 불에 타죽는 동안 자신은 살아 남았다는 죄의식에, 그러고도 그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혀 있다는 억울함에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거죠. 심한 우울증에 지금도 집밖을 못 나오고 계셔요.

장례식이 끝나도 정영신씨의 마음에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활동가로 살겠다는 것도 어쩌면 그 애도의 마음과 풀리지 못한 울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유가족’으로서의 삶과 ‘활동가’로서의 삶 사이에는 뭔지 모를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새내기 활동가’라는 말이 왠지 신선하게 들려요. 활동가로서의 생활은 어떤가요? 가령 다른 활동가들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다들 너무 대단하신 것 같아요. 가까이 원호씨도 그렇고, 위층에 있는 홈리스행동 활동가들도 그렇고, 학생인권조례 활동가들도 그렇고, 하나같이 ‘나’를 비우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능력들이 참 놀라워요.

오래 동안 장사를 해 오셨는데, 장사하는 사람과 활동가는 어떤 점이 다르던가요?

장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저 사람과의 관계가 나한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생각하는 게 몸에 뱄어요. 저도 그랬죠. 그런데 활동가는 먼저 자아를 비우고 타인을 만나는 거 같아요.

영신씨에게 비워야 할 자아는 어떤 건가요?

‘용산 며느리’라는 딱지가 제게는 참 풀기 힘든 수수께끼에요. 충연씨 아내로서, 고 이상림씨 며느리로서, 한마디로 용산참사 유가족이라는 처지가 저를 이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지만, 다른 사람의 삶과 고통을 자꾸 저의 사연과 견주려고 하는 거 같아요. 제 마음 속의 분노를 남김없이 비워낼 때 진정한 활동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닮고 싶은 활동가의 모습이 있나요?

홈리스행동 활동하시는 분들에게는 질기디 질긴 헌신성과 성실함을 본받고 싶고, 또 학생인권조례 활동하는 친구들에게는 발랄함을 본받고 싶고, 저마다 다른 장점들을 모두 제 거로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먼저 제 안의 이 분노와 싸워서 다 비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2의 용산이라 불리던 두리반에 가 보셨을 텐데…

용산 장례식 얼마 전에 두리반 명도 소식을 들었어요. 자주 갔었죠. 안종려 사장님이 무척 잘해 주셨어요. 밥도 챙겨주시고, 두리반에 가면 음악도 듣고 커피도 마시고 젊은 사람들 보면서 많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죠.

용산과 두리반을 많이 비교하는데 어떠셨어요?

부러웠어요. 안종려 사장님 체구가 작으시잖아요. 그런데도 혼자 펜스를 뚫고 두리반에 들어가 농성 시작하셨어요. 젊은 친구들도 많이 오고, 거기 가면 항상 기타가 있고, 매일 매일 행사가 있고, 레아에 있던 미디어 활동가들이 있고, 목사님의 기도와 시인들의 시 낭송 소리가 들리고, 참 좋았어요. 철거민 싸움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우리는 왜 못 그랬을까 생각도 많이 했어요.

뭐가 제일 부러웠나요?

사람들 표정이 밝은 게 너무 부러웠어요. 그리고 용역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점도.

상인의 문화, 유가족의 문화, 활동가의 문화가 다 다를 텐데, 어떠세요?

요즘은 전에 알던 친구들 안 만나요. 이해는 하지만 ‘왜 혼자 그러고 있냐. 다 잊어 버리고, 그냥 살아’ 이런 말 듣는 게 싫어요. 그들과는 이미 너무 달라졌어요.

“젊은 활동가들의 문화는 어때요? 인디밴드 공연 같은 거 있잖아요. 야마가타 트위스터 같은.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는, 그런 기회도 많을 텐데.” 이 질문에 영신씨의 표정이 흔들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뜻밖의 말이 쏟아졌다.

저, 그런 데 잘 못 가요. 소리 지르고 싶은데, 맘껏 소리치며 억눌린 걸 터뜨리고 싶은데, 못 그러겠어요. 언젠가, 제가, 웃고 있었나 봐요.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 “어, 웃네?” 하며 지나갔어요. 그 후로 제 마음 속에서 ‘시아버지 불 타 죽고 남편 감방에 있는데, 뭐가 좋아서, 웃고 다녀?’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아요. 술자리도 못 가겠어요.

순간, 내 가슴이 탁 막히는 듯했다. ‘용산 며느리’란 단어가 영신씨에게 어떤 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유가족’, ‘미망인’이란 단어가 여성의 삶에 어떤 굴레를 씌우는 지도. 어울리지는 않지만, 가족이 참사를 당했을 때 얼마 동안 웃음을 잃어야 하는지 ‘애정남’에게 물어보고 싶다.

용산며느리 정영신 활동가, 언젠가는 앞의 꼬리표를 뗄 날이 올 것이다. 용산참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날, 그래서 구속된 남편과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명예를 되찾게 되는 날, 그녀는 용산 며느리란 수식어를 떼고 그냥 반-개발 활동가 정영신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가난한 철거민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이명박 정부의 ‘외상’ 같은 용산참사의 진실은 여전히 철거중이다. 죽음의 망루에서 내려오자마자 구속된 7명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수감되었으며 이감신청도 거부당하고 있다. 아무리 ‘모범’적인 재소생활을 해도 용산 철거민들은 가석방 대상에서 번번이 배제된다. 기소된 9명 중 두 명은 거듭된 재수술 끝에 장애인이 됐지만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항소심에서 법정구속의 위협에 놓여있다. 장례식이 끝나고 모두가 용산을 잊어갔지만, 경찰들은 여전히 살아남은 자들에게 소환장을 보내고 있다. 유가족을 불러 왜 ‘불법집회’에 참여했냐고 묻고 있다. 그 불법집회란 바로 2010년 1월 9일 용산참사 ‘장례식’이었다.

응답 2개

  1. 진달래말하길

    먹먹하네요.
    그래도 웃으셨으면 합니다.
    돌아가신 분에 억매이지 말고 현재의 삶 속애서 웃음도 찾고 새 울음도 찾으셨으면 해요. 돌아가신 분도 경직된 정영신님의 얼굴보다 밝게 웃으며 현재 미래를 살아가시는 것을 더 원하시지 않을까요.
    영양가 없지만 격려의 박수 보내드립니다.

  2. 고추장말하길

    정영신님, 너무 멋지세요. ‘자기를 비우고 타인을 만나는 사람’, 활동가에 대한 이만큼 멋진 정의가 또 있을까요. 그리고 마음껏 웃으세요. 그럼 그 웃음의 힘으로 모두가 웃게 되는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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