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사이트에서 ‘일본 드라마 추천’이라고 치면 나오는 대부분의 추천작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작품들이 몇 있다. 그리고 그 공통작 중에 빠지지 않고 연관되는 인물이 두 사람이 있다. 배우 기무라 타쿠야와 작가 키타가와 에리코다.
기무라 타쿠야는 이전에도 그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듯 일본의 국민 아이돌그룹 출신의 배우다. 배우 기무라 타쿠야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수식어는 ‘시청률의 남자’인데 일본 드라마 역대 시청률 순위 TOP 10 중 1~5위까지를 포함한 총 7개가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88년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 후 배우 겸업을 하면서 정상에 올라 벌써 2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속한 그룹 SMAP은 국내 아이돌그룹들이 기획, 홍보, 활동에 대표적 롤 모델로 선정할 만큼 성공한 일본의 국민가수이기도 하다. 국내에도 열성팬들이 몹시 많으며 카메라와 청바지 CF 등으로 국내 공중파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기무라 타쿠야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큰 공헌을 한 드라마가 몇 편 있는데 절반은 작가 키타가와 에리코와의 합작품이다.
키타가와 에리코는 일본의 김은숙 작가, 라고 소개하면 가장 빠를 듯하다. 대부분의 작품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방영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는 로맨틱 트렌디 드라마의 대표 주자이다. 91년도에 데뷔한 후 93년 <아스나로 백서>가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 후 95년 작 <사랑한다고 말해줘> 에 이전 소개한 <러브 스토리>의 토요카와 에츠시가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해 드라마와 함께 큰 히트를 치면서 명실상부 인기 작가로 자리 잡게 되고 이후 집필하는 드라마마다 당시 가장 핫한 남녀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무라 타쿠야와 키타가와 에리코가 처음 만난 것은 93년 작 <아스나로 백서>인데 이때까지 기무라 타쿠야는 조연에 불과했지만 3년 뒤인 1996년 키타가와 에리코가 쓴 대본의 ‘남자주인공’을 맡게 된다. 그 작품이 바로 오늘 소개할 <Long vacation>이다.
31세를 목전에 두고 있는 하야마 미나미는 결혼식 당일, 전통 신부 복장으로 달려와 헐떡이며 세나 히데토시의 현관문을 두드린다. 결혼식을 1시간 앞두고도 신랑인 아사쿠라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나미는 문을 연 세나에게 다짜고짜 아사쿠라를 내놓으라고 하지만 그 집에서 함께 살고 있던 아사쿠라의 흔적이라고는 달랑 책상 위의 편지 한 통 뿐이다. 미나미에게, 너는 나 없이도 백만년은 살 수 있지만 새 여자친구는 자신이 없으면 하루도 못 살 것 같아 떠난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결혼식이 당일 엎어진 엄청난 일을 겪은 미나미는 며칠 후 ‘또’ 다짜고짜 세나의 집에 찾아온다. 이번엔 이삿짐과 함께. 아사쿠라에게 신혼집 자금 마련을 위해 돈을 전부 주어서 갈 곳도 없고 만약 아사쿠라가 돌아온다면 만날 수 있는 장소라고는 그 집 뿐이기에 무작정 들어앉은 미나미와 당황하여 정신을 못 차리는 세나는 그렇게 룸메이트가 된다. 31살이 된 미나미와 24살인 세나는 서로에게 이성적 관심은 커녕 티격태격하기만 하는데 사실 둘에게는 큰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요즘 유행어로 ‘현실은 시궁창’인 상황이다. 미나미는 직업이 모델이긴 하지만 나이 때문에 들어오는 일이라고는 슈퍼마켓 전단지나 바스트업 도구 등이 전부다. 심지어 결혼식 당일 차인 신부이기도 하다. 세나는 대학원도 떨어지고 치르는 콩쿨마다 떨어져 생계를 위해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꼬마들 강습을 맡고 있다. 짝사랑하는 대학 후배는 자신과 달리 벌써부터 인정받고 있어서 말 한마디 건네는 것도 큰일이다. 사랑에는 서투르고 동료들은 자신과는 다르게 잘 나가는 현실을 깨닫고 씁쓸하게 집에 돌아오곤 하는 일상 속에서 둘은 대화하기 시작한다. 이 이후야 다들 짐작하시다시피.
키타가와 에리코와 기무라 타쿠야의 그 첫 번째 성공적인 합작인 이 드라마는 일본 역대 드라마 시청률에서 5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무라 타쿠야를 비롯해 타케노우치 유타카, 히로스에 료코, 마츠 타카코 등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유명 배우들이 파릇파릇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의 패션이 웃음을 자아낼 만큼 오래전 드라마이긴 하지만 트렌디 드라마의 정석이라 할 만큼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국내의 대형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의 보아, 동방신기 등이 일본 진출을 위한 어학공부 교재로 이 드라마를 가장 처음 봤다고 주인공 기무라 타쿠야와 함께 출연한 일본 방송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가 트렌디 드라마의 정석이라고 하는 데에는 방영 당시 유행했던 연상연하 커플, 동거남녀의 러브스토리가 있어서만은 아니다. 일본은 1991년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거품이 수그러들며 장기적 경기 침체에 들어섰다. 청소년기에 80년대의 호황을 경험하며 자란 이들이 청년기를 경기 침체라는 암흑 속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을 일군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하지 않으니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다그쳤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정된 직장, 행복한 미래는 좀처럼 가질 수 없었다. 드라마의 두 주인공은 아르바이트와 같은 일시적인 일자리에 머물며 점점 성공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는 90년대 일본 젊은이들의 시대상이다. 되는 일은 없고, 무엇도 될 것 같지 않은 암울한 오늘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임을 주인공 세나와 미나미가 보여주는 것이다. 하루를 견디고 돌아와 마주 앉아 함께 마시는 맥주, 짝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 헤어진 그와의 추억 등을 이야기하며 혼자가 아님을 느끼는 과정을 통해 여전히 어렵고 불안하지만 조금은 따뜻해진 마음을 안고 다시 또 하루를 맞이하는 것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전부라 할지라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드라마. 96년의 일본 젊은이들은 그래서 이 드라마에 더욱 열광했다. 90년대부터 일본 유행가에 ‘혼자가 아니야’ 라던지 ‘괜찮아’ 라는 문장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간이 지나도 사랑받는 트렌디 드라마는 유행하는 패션 스타일, 최신 기종의 핸드폰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방송 분량을 채우지 않는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민이야말로 가장 큰 트렌드임을 알고 그들에게 동감한다. 그리고 그 고민을 함께 생각하고 궁리하는 마음이 드라마에 담겼기 때문에 그만큼 드라마의 여운도 오래 간다고 생각한다. 재벌 3세와 만나서 부모 허락 받는 일이 삶의 가장 큰 고민인 사람이 지금 대한민국에 몇이나 있을까. 왈랑왈랑한 애정씬이 방영 당시에는 화제가 될지언정 결국 지나고 나면 연말 정산용 화면에나 들어가고 끝난다. 몇 년이 흐른 뒤에도 다시 봤을 때 촌스러운 패션 때문에 웃음이 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주인공에게 동감하고 위로받기에 이 작품은 트렌디 드라마의 ‘정석’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무라 타쿠야는 <롱 배케이션>이 드라마 첫 주연. 그 후 2000년에 다시 한 번 키타가와 에리코와 만나 평균 시청률 32.3%로 일본 역대 시청률 2위, 심지어 마지막 회 순간 시청률 47.3%를 기록한 TBS 드라마 <뷰티풀 라이프>로 그 해 일본 TV 아카데미 부분을 거의 휩쓸며 명실상부 로맨틱 드라마의 최강 콤비가 되었다. 이후 2002년 후지 TV에서 방송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억 개의 별>은 키타가와 에리코의 첫 스릴러물, 기무라 타쿠야의 첫 악역, 일본의 대표 코미디언 아카시야 산마의 정극 도전 등으로 큰 화제가 되어 월드컵 특수임에도 불구하고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호시절은 끝난 것일까. 아니면 드라마 제목처럼 긴 휴식기에 들어간 것일까.
‘멜로의 여왕’이라는 칭호와 함께 가장 성공한 작가로 손꼽히던 키타가와 에리코는 2004년 <오렌지 데이즈> 이후로는 그렇다할 추천작이 없다. 2006년 작 <단 한 번의 사랑>에서 예전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장점이 클리셰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실망을 자아냈다. 2008년 직접 메가폰을 잡고 연출을 맡은 영화 <하프웨이>는 이와이 슌지의 제작으로도 화제가 되었고 데뷔작으로는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았지만 2010년에 쓴 TV 드라마 <솔직하지 못해서> 에서는 최고의 주가를 기록하던 에이타, 우에노 쥬리 등을 주연으로 내세우고 트위터를 소재로 삼아 트렌디 드라마 여왕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기무라 타쿠야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2046>, 트란 안 훙 감독의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무사의 체통> 등 유명 감독들과의 영화작업과 더불어 드라마에서는 멜로가 아닌 갖가지 장르물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펼쳐왔다. 기무라 타쿠야가 출연한 작품 중 추천작은 이전 소개한 <히어로>, <체인지> 이외에도 2003년작 <굿럭>, 2004년 작 <프라이드>, 2007년 작 <화려한 일족> 등 많고 다양하다. 이 배우가 나온 드라마만 다 봐도 ‘일본 드라마 추천작’의 반은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올해 우리 나이로 41세, 데뷔한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는 스타이자 배우라 할 수 있다. 다만 최근 들어 <우주 전함 야마토>, <남극대륙> 등 일본의 패권주의를 담고 있는 내용의 우익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것이 몹시 우려가 된다. 2010년 <달의 연인>으로 오랜만의 멜로 드라마 컴백을 했지만 결과도 좋지 않아서 이제 기무라 타쿠야의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쉽게 정상을 내어주지는 않을 거라 생각되지만 말이다.
일본 드라마계의 정상에 서 있던 이들 콤비는 혹시 그 첫 시작이었던 <롱 배케이션>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를 지금 곱씹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안 될까? ‘긴 휴가’ 라고. 나는요, 언제나 분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 있잖아요, 뭘 해도 잘 안 될 때가. 뭘 해도 잘 안 풀릴 때. 그럴 때는 뭐랄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하느님이 주신 휴식이라고 생각해요. 무리하지 않는다, 초조해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는다,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하면?”
“… 좋아지는 거죠.”
“정말로?”
“아마도…”
덧붙여 드라마 속 미나미는 31세 노처녀다. 하지만 15년이 흐른 후에도 30세를 넘은 미혼여성들이 가지는 고민은 여전하다. 다만 연령제한선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것일 뿐.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2005년 방송된 <내 이름은 김삼순>의 주인공이 ’29세’ 노처녀였고 가장 최근 같은 여배우가 등장한 드라마 <여인의 향기>에서 그녀는 ’37세’ 노처녀가 되었다. 결혼, 직업,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의 이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 또 10년이 지난 후에도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은 결혼 강요와 덜 자란 남자들과 불안한 미래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고 다만 주인공 나이가 43세쯤으로 늘어났을 뿐이리라 짐작하는 것은 섣부른 짐작일까.
미나미 역을 맡은 야마구치 토모코는 이 드라마로 명실상부한 A급 여배우가 되었지만 드라마 방영과 같은 해인 96년 배우 카라사와 토시아키 결혼과 동시에 TV CF를 제외한 모든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러다가 지난 2004년 기무라 타쿠야가 소속된 그룹 SMAP이 진행하는 버라이어티쇼에 출연하여 ‘미나미-세나, 8년만의 재회’로 큰 화제가 되었고 그 이후 간간히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남편인 카라사와 토시아키는 이후 다시 언급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하여 큰 성공을 거둔 일본의 2003년판 <하얀 거탑>의 주연(우리나라에서는 김명민이 연기한 장준혁 과장)을 연기하기도 한 유명 배우다.
꺄아, 나의 첫 일드.. 다시 봐야겠어요, 두근두근 쾅쾅!
꺄아…나의 첫 일드!! 추억을 꺼내주셨네요, 감사감사! 다시 봐야겠어요. 두근두근 쾅쾅!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드라마에서 보다도, 가장 멋지고 가슴 떨리는 키스신이 있는 드라마입니다.
정말 지금 봐도 너무너무 두근거리는 드라마, 이런게 명작입니다ㅜㅜ
“언제나 분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라니. 멋지네요..^^
좋은 드라마 소개와 그보다 좋은 드라마 평 감사해요. 한 번 꼭 찾아 보고 싶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