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개성 난봉가’ 후일담 – 식민지 여성의 정치와 문화

- 권보드래

권애라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개성 난봉가’ 소동일 것이다. 1920년 가을 여자고학생상조회 주최의 강연회에서였다고 한다. 이 무렵 권애라는 이미 여성 연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몇 달 전 종교교회 여자야학강습소에서 개최한 연설회에서 여성교육의 필요를 대호(大呼), 거액의 의연금을 모아 근화여학교(오늘날 덕성여자대학의 전신)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여자고학생상조회에도 많은 청중이 모여든 가운데 두 번째 연사로 권애라가 등장했다. 문제는 무산 동포의 참상을 열거하며 여성 교육의 필요를 부르짖던 연설이 경관의 제지로 중단되면서부터. “중지 이유를 대라”, “계속하라”며 청중이 들끓는 중에 청중 못지않게 흥분한 권애라가 노래나 한마디 부르겠다며 입을 열었다.

“발가벗길 때― 피울음 나더라만― 콩밥을 받으니― 올 웃음 거기 있네.” 전해지는 내용으론 3·1 운동 때 투옥 경험을 노래한 듯 정치적인 가사였지만 곡조는 전래의 난봉가에서 따왔던 것 같다. ‘개성 난봉가 부른 권애라’라는 문구로 회자되었으니 말이다. 어리둥절하던 청중은 곧 박수를 치며 환호했지만 연이어 권애라가 수심가를 시작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고고천변― 일륜홍―” 첫 마디를 뗐을 때 어떤 신사가 “웬 기생 노래냐.”며 일갈했다고 한다. 권애라는 목청을 돋워 “너희는 왜 양국(洋國) 기생 노래만 할 줄 아느냐.”며 응수했단다. 여러 해 지난 후 권애라 자신의 술회로는 ‘다 놀려주고픈’ 심보였다고 한다. 이어 연설회장이 들썩하는 소란이 일었다. 한쪽에선 “네가 기생이냐.”며 따지고 한쪽에선 “기생도 조선인이고 여학생도 조선인이다.”, “조선 사람이 조선 노래 부르는 게 무슨 문제냐.”며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하여튼 드문 구경거리였다고 전한다.

권애라라는 이름이 처음 사회화된 것은 1919년 3·1 운동 와중에서였다. 권애라는 강화도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개성서 자라난 개성 사람으로, 호수돈 여학교와 이화여전을 졸업한 후 개성 남부유치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개성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학생들 간 시위를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개성은 3월 1일 당일 시위가 일어난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이후 권애라는 다른 몇 주동자와 함께 국경을 넘어 피신했으나 결국 몇 달 후 경찰에 체포된다. 6개월 징역형을 마치고 석방된 것이 1920년 봄이었던 듯하다. 권애라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 등 3·1 운동으로 투옥된 여러 여성과 같은 감방에 있었다는데, 난봉가며 수심가도 수원지역 시위를 선동한 혐의로 잡혀 온 기생 출신 김향화로부터 배운 것이었다고 한다. 3·1 운동의 ‘혁명가’였던 여학생 출신이 기생이나 부름직한 노래를 불러젖힌 것이니, 사람에 따라선 어지간히 불편·불쾌하게 느꼈음 직도 하다.

‘개성 난봉가’ 사건 이후 한동안 권애라에게는 대중의 시선이 붙어다녔다. 1923년 초에는 서울청년회 주최 강연회에서 ‘연애는 자유’란 주제로 연설을 한다 하여 또 떠들썩했으나, 이번에는 청중 사이 고함과 삿대질로 연설은 시작도 못하고 불발로 끝나 버렸다. 여성 운동가 중에도 권애라 연설을 막으려 팔을 걷어 부친 이들이 있었다. 그 사이 권애라는 도쿄로 떠났다가 상하이로 옮겨 활동했고 1922년에는 소련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민족 여성대표로 참가했으며 그 밖에 쑤저우[蘇州]에서 공부하였다고도 하나, 일반의 관심은 ‘개성 난봉가 부른 권애라’, ‘거리에서 바나나 먹고 다니며 독신주의 선포하는 권애라’, ‘연애는 자유라고 외치는 권애라’에 온통 쏠려 있었다. 고려공산당 내 이동휘파로 분류되는 핵심 성원 중 하나였으나 ‘연애’는 그보다 훨씬 막강했던 것이다.

얼마 지나 권애라가 결혼 후 낙향하면서 항간의 소문은 잠잠해졌다. 간혹 ‘그 사람은 어디에…?’ 식의 후일담이 거론되긴 했지만 1930년대까지 권애라의 이름을 신문이나 잡지에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권애라라는 이름이 다시 사회·정치적 의미를 획득한 것은 1944년―1942년이라는 설도 있다. 혹은 두 차례 체포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들 김봉년과 함께 체포되었을 당시였다. 1897년생이니 권애라가 47세, 1922년생이라니 김봉년은 23세였을 것이다. 김봉년은 광복군 제 3 지대에 입대, 항일군사정치학교를 졸업한 청년 투사였다. 다소 미심쩍은 것은 김봉년의 아버지이나 권애라의 남편으로 알려져 있는 하구(何求) 김시현의 존재이다.

의열단 창립단원이자 막후의 중요인물이었던 김시현은 해방 전까지 총 18 년여를 감옥에서 지냈을 정도로 험난한 생애를 산 사람이었다. 김시현은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 다나카 대장 저격사건, 도쿄 이중교 폭파사건 등 굵직한 테러 사건을 총괄했고, 시한폭탄을 제조해 조선에 밀반입, 경성을 불바다로 만들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며, 당연히 고비고비 체포와 고문과 투옥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권애라와 김시현은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회의―혹은 1921년의 약소민족회의?―에서 처음 만났다는데, 권애라는 14세 연상인 김시현을 늘 ‘선생’이라고 존대했고 김시현은 권애라를 ‘동지’로 불렀다고 한다. 이들은 아이를 낳은 후에도 내내 떨어져 지냈고 권애라·김봉년 모자가 중국으로 온 1942년 이후에야 잠깐 짧은 가족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 그러나 이 기록은 권애라가 이병철이라는 청년과 결혼, 충주로 낙향해 시부모와 함께 생활했다는 또 다른 전언과는 조화되지 않는다. 이병철이 김시현의 변성명이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병철은 권애라보다 2년 손아래요 고향도 안동이 아닌 충주라니 쉽게 인정할 만한 가능성은 아닌 듯하다. 그럼, 소문 속 권애라의 생애는?

응답 1개

  1. 말하길

    여학생에 부여된 민족주의적 이미지를 기생과 자유연애로 균열낸 멋진 장면, 오늘날에도 꼭 보고 싶은 그런 장면이네요. 3.1운동 속에 감춰진 인물 열전,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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