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도그빌>, 혹은 사람들을 뻔뻔하게 만드는 것에 관하여

- 이진경

카프카는 <성>에서 ‘성’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관료나 ‘국가’ 같은 것의 권력이 아니라 바로 이웃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행사되는 권력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성의 관료 소르티니의 구애를 아말리아가 거절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웃사람들은 아말리아의 아버지에게 맡겼던 구두를 하나둘 찾아가고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또 마을 사람들이 그에 보낸 신뢰의 징표였던 자치소방대장에서 그를 해임한다. 이런 식으로 아말리아의 가족들은 ‘왕따’가 되어 몰락하게 된다. 아말리아의 아버지는 성의 관료들에게 사면을 구하지만, 지은 죄가 없기에 사면될 수도 없었기에, 등이 땅을 향해 한없이 굽은 채 죽고 만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도그빌>은 이와 약간 다르지만 역시 이웃사람들에 의해 행사되는 끔찍한 권력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그레이스는 끔찍한 착취와 폭력에 의해 노예화되지만, 그것 역시 경찰이나 갱 같은 권력자가 아니라, 한 때는 마음을 터놓는 것 같았던 이웃사람들에 의해서였다. 누군가에게 쫓기며 숨어들어온 그레이스에 대해 도그빌 사람들은 경계하고 내치려하지만, ‘수용의 도덕’을 설교하는 톰의 제안에 의해,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한 그레이스의 진심어린 노력에 의해 그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경찰의 수배전단이 붙게 되면서, 사람들은 ‘위험’을 이유로 좀 더 많은 노동을, 좀 더 싼 값에 하도록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경찰이 들어오는 것을 이용해 척은 그레이스를 겁탈하고, 그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그의 처는 그레이스의 삶과 마음이 담긴 일곱 개의 인형을 하나하나 부수어버린다. 그의 싸가지 없는 아들놈은 협박으로 그레이스의 손을 자신의 엉덩이로 끌어들이려하고. 처음엔 일을 시키려 하지 않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레이스를 일로 몰아치고 구박한다. 급기야 탈출하고자 하지만, 톰마저 포함된 모든 마을사람들의 공모에 의해 다시 잡혀오고, 결국 목에 쇠사슬을 찬 채 노동과 성적 겁탈에 의해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경찰은 수배전단을 붙이고, 가끔 찾아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경우와 다르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의 폭력적인 착취와 억압은 경찰의 권력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한다. 착취와 폭력의 강도는 경찰이 행했을 것을 크게 초과하며, 최소한의 형식이나 양심, 예의도 없이 노골적으로 행사된다. 그렇기에 마지막의 극단적인 반전조차 과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 영화를 두고 소수자나 외부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문제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처럼 행사되는 권력을 들어 푸코처럼 ‘아래로부터 행사되는 권력’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데리다처럼 환대과 적대가 사실은 하나의 경계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히 내게 인상적인 것은 ‘위선’과 ‘뻔뻔함’ 간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차이 같은 것이었다. 혹은 위선의 사회나 뻔뻔함의 사회가 박정희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 같은 정치적 체제와 다른 차원에서, 즉 대중의 차원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그빌은 위선의 마을이었다. 눈이 멀어 앞이 안보이지만, 그리고 그것을 모두들 알고 있지만, 그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외출을 삼간 채 눈이 보이는 양 말하는 잭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위선적인 방식으로 산다. 이는 도덕적 설교를 즐기는 톰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에 갱에게 쫓기는 외부인 그레이스에 대해 취한 태도도 그러했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면서도 ‘수용의 도덕’에 대해 말하는 톰의 눈치를 보며, 일을 시켜달라는 부탁에도 시큰둥하다. 모두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의 눈치를 보느라 마지 못해 하는 체 한다. 이렇듯 ‘위선’이란 타인의 눈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고 싶지 않지만 도덕이고 의무이기에 따르는 그런 성실함이나 고지식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오직 남에게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 남의 눈이 보는 한에서 하는 체 하는 어설픈 연기 같은 것이다.

이 위선적인 대중의 사회에서 그레이스의 진솔한 열정과 맑은 마음은 마지못해 일을 준 그들을 차츰 감동시켜 마침내 마음을 열게 한다. 이는, 잭이 사실은 눈이 안보인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이제는 보이는 체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면서 그레이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때, 모든 이들이 동감하는 것이었다. 이걸 보면, 위선의 사회는 끔찍한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추구되는 뻔뻔함이 사회보다는 확실히 나은 것 같다. 속내가 어떠하든 자신을 향한 시선 속에서 사람들이 변화될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처럼 타인을 감동케하는 어떤 촉발능력이 있다면, 진심과 애정, 열정이 있다면, 규범화를 넘어선 변화조차 가능한 것 같다.

그러나 경찰이 수배포스터를 갖다 붙이면서 상황은 급전된다. 이전에는 남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서, 그 시선의 장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연기를 했다면, 이제는 경찰의 눈으로 그레이스를 보면서, 그 시선으로 그레이스의 몸을 탐하고 착취를 한다. 그들은 이제 경찰의 시선을 핑계로 자신이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위선을 대신해 노골적인 뻔뻔함이 그들의 삶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뻔뻔함이란 자신을 향한 어떤 시선도 개의치 않는 시선이고, 오로지 자신이 겨냥하는 것만을 보는 시선이며, 자신이 욕망하는 바에 따라 타자를 이용하고 공격하려는 시선만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진심이나 열정 어린 행동에서도 촉발받는 경로를 갖고 있지 못하며, 그렇기에 사건이나 상황 속에서 자신을 바꾸어갈 계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 뻔뻔함의 사회, 거기에는 오직 뻔뻔한 이해관계의 대립과 충돌만이, 뻔뻔한 욕망과 그것이 돌파하거나 우회해야 할 법적 제약만이 존재할 뿐이다.

무엇이 위선적인 대중을 뻔뻔한 대중으로 바꾸어 놓은 것일까? 수배포스터로 끼어들어온 경찰의 시선?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그것이 변화의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감추어둔 욕심이 드러나는 계기었지, 그 자체가 뻔뻔스레 쫓기는 자를 착취하고 겁탈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경찰의 시선에 노출되어선 안된다는 그레이스의 약점을 이용해, 그 시선이 만드는 그늘에서, 그림자 같은 음지에서 그레이스를 착취하고 겁탈했다. 본질적인 것은 이전에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며 감추어야 했던 욕심이, 경찰의 시선을 이용하여 타자를 공격하면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들을 위선의 장에서 뻔뻔함의 장으로 이동하게 한다. 또한 이웃의 다른 동료들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려 함을 알게 되었을 때, 위선의 기술을 요구하던 시선은, 뻔뻔한 노출을 증폭시키는 동조와 방임의 시선으로 바뀌게 된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안 그런 사람이 없는데, 나만 굳이 위선적 제스춰를 취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사적인 이익의 추구가 은폐할 필요없이 그대로 노출되어도 좋게 되었을 때, 그런 태도들이 이웃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될 때, 그리고 그러한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권력이나 수단이 그런 욕망과 결합되게 될 때, 사람들은 뻔뻔함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이명박이 자기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뻔뻔함의 세계 속으로 끌고 들어간 계기이기도 할 것이다. 이른바 ‘CEO형 대통령’이란 컨셉 아래 대통령의 지위를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가의 그것으로 오인하고, 항상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열망을 대통령의 욕망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런 욕망을 실현시켜줄 거대한 권력과 수단을 갖게 되었을 때, 거기서 출현할 뻔뻔함의 강도란 도그빌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뻔뻔함이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인근에 있는 권력자 모두에게 급속히 전염된다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뻔뻔함이 하나의 ‘체제’로 수립되게 된다는 점일 게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난감한 것은 이런 뻔뻔함이 권력 없는 대중들의 수준으로 확산되고 번져가면서 사회 전체가 뻔뻔함의 사회로 변화되는 것일 게다. 그들은 이를 위한 방법 또한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정치적 사안을 관련된 사람들의 이해관계의 문제로 바꾸어 놓을 때, 그리하여 그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에서 모든 ‘대의’나 이유를 지우고 이익을 얻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간의 문제로, 이익의 당사자의 문제로 바꾸어버릴 때, 대중적인 차원에서 뻔뻔함의 사회가 조성된다는 것을! 4대강 사업을 강 주변 사람들의 이익을 둘러싼 문제로 바꾸어 그들로 하여금 반대자에 대항하여 싸우게 하는 것도, 제주도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문제를 마을 사람들이 이해관계 때문에 싸우는 문제로 슬쩍 바꿔치기 한 것도 모두 이런 뻔뻔함의 기술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역주민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가 되어버리는 순간, 어떤 대의도, 어떤 공동성이나 공공성도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뻔뻔함의 체제가 지속되는 것을 용인해선 안되는 것은 무엇보다 이 때문이다. 대중 자신이 뻔뻔함의 기술에 말려들어가, 뻔뻔함의 사회를 대중적인 차원에서 조성하게 되는 최악의 사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대중들은, 권력자들로부터 확산되어 오는 뻔뻔함의 물결에 휩쓸려 따라가기 보다는 거꾸로 그것에 거스르며 거센 저항의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4년간 우리가 계속 목도해 온 것은 이 상반되는 방향의 물결이 부딪치고 밀고 밀리는 충돌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뻔뻔함의 전염성을 과소평가해선 안된다는 것, 그렇기에 뻔뻔함의 요소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리지 않는다면 어느새 다시 우리의 신체와 욕망을 파고드는 바이러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한다.

응답 2개

  1. 윤재용말하길

    이사람은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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