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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 메시지

- 최원형(한겨레 사회부 기자)

<위클리 수유너머>가 100회를 맞이한다는 기쁜 소식과 ‘혹시 축하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느냐’는 부담스러운 제안이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런 제안의 배경에 ‘젊은 기자인데 페이스북에서 <위클리 수유너머> 기사의 링크를 걸고 몇 자 적기도 하더라’는, 매우 단순한 이유가 있다는 걸 짐작하게 된 뒤론 그 부담이 더 커졌습니다. ‘열성’은커녕 ‘고정’ 독자라 하기에도 민망한 제가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이런 민망함을 이기기 위해 제가 택한 것은 ‘역공’이었습니다. 일간지 기자라는 직업을 이용해서 <위클리 수유너머>를 취재한 뒤,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한겨레> 지면에 기사도 쓰고 <위클리 수유너머>에 보낼 메시지도 쓰자. 그래서 지난 12일 편집진 가운데 한 분인 박정수씨를 찾아가 만났고, 한 시간 가량의 두서없는 대화를 통해 ‘쓸 거리’를 축적했습니다. 어차피 분량이 제한되어 있는 <한겨레> 지면에 풀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는 정해져 있으니, 여기서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머리를 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판을 두드리다보니 그런 계산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멋쩍은 감상을 늘어놓고 싶어지네요.

제가 언제부터 <위클리 수유너머>의 존재를 알았는지는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하게 머리 속에 그 존재를 박아넣게 된 계기는 뚜렷이 기억합니다. 그건 2011년초 우연히 보게 된 ‘반올림’ 공유정옥씨와의 인터뷰 기사였습니다. 몇 년 전 노동분야를 담당할 때 일천하게나마 삼성반도체 백혈병과 관련된 취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산업안전보건공단이 발표한 역학조사 결과에 대한 문제 제기와 보완 요구 등이 주요 쟁점이었는데, 공유정옥씨와 서너차례 통화를 하면서 이것저것 여쭤본 적도 있었죠. 그러던 가운데 부서를 옮기게 됐고 반올림 관련 소식은 다른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들을 통해서 접해야 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공유정옥씨와 관련된 소식들도 있었습니다. 그의 삶의 궤적을 다 되짚어볼 수 있도록 분량이 꽤 긴 인터뷰도 있었고, 반올림과 관련된 쟁점을 핵심적으로 정리하거나 산업재해와 관련된 전반적이면서도 고질적인 병폐들이 무엇인지 확 찔러주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보게 된 <위클리 수유너머>의 인터뷰 기사에는 다른 매체의 기사에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고, 그것이 제 머리를 탁 쳤습니다. 지금도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건 아마도 ‘존재 자체에 대한 발견’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편안한 삶 마다하고 험하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나 ‘삼성반도체 백혈병이나 여타 산업재해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도움주는 사람’처럼, 우리가 쉽고 편하게 규정해버리는 모습에 머물지 않고 존재를 더 탐구해 들어가 건져내오는 새로운 발견. “(나는) 응급실에서 알바 뛰면 수십만원 버는 기득권 세력”, “의사는 망해도 집 있고 차 있다” 등의 냉철한 자기 인식이나, 삶의 여백을 갖기 위해 바이올린을 배우고 연습하는 공유정옥씨의 모습은, 적어도 제겐 그런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때의 느낌은 최근 <위클리 수유너머>를 보면서 다시 고스란히 되돌아 오기도 했습니다. ‘용산 며느리’ 정영신씨의 인터뷰였습니다. 저는 정영신씨에 대해서도 언론 보도를 통해서 알았습니다만, 그 어느 보도에서도 ‘용산 며느리’로서 함부로 웃을 수도 없는 그의 굴레를, 반개발 활동가로서 그의 마음가짐을 말해준 바 없었습니다.

일간지 기자로서 끊임없이 취재하고 보도하는 과정 속에, 그렇게 어떤 존재를 새롭게 발견해내는 기쁨과 즐거움이 과연 있기는 한 건지 되묻게 됩니다. 비참한 일을 겪은 사람은 눈물을 떨궈야 하고 머리띠를 두른 사람들은 구호만 외쳐야 하듯, 그렇게 이미 디자인된 세상을 그대로 오려서 남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건 아닌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기보단 보일 법한 것들을 찾아서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지? 만약 조금이라도 그렇다면, 도대체 제게는 있어야 할 무엇이 빠져버린 걸까요?

이번 취재차 만난 박정수씨는 “독자들을 신경쓰면 ‘다수·상식·평균’으로 가게 되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지 않도록 ‘소수성’에 주목하고 집중하는 것이 <위클리 수유너머>의 기본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다수·상식·평균을 금과옥조로 삼기 마련인 일간지 기자로서, 소수성에 주목하고 집중하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아마도 제게 빠져 있는 그것은 다수·상식·평균을 넘어 구체적인 존재 속으로 파고들기 위해 필요한 ‘더 깊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00회를 맞이한 <위클리 수유너머>에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씀을 전해드리며, 100회를 넘겨도 이 ‘더 깊은 사랑’이 늘 글 곳곳에 스며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다수·상식·평균에 꺾이지 않는 생각들을 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언제까지나 이럴 수 있다는 것이, 독자들이 늘어나거나 영향력이 커지는 것보다 더 큰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응답 2개

  1. 비포선셋말하길

    정성어린 글, 위클리수유너머 존재의 발견이네요 ^^ 감사드려요.

  2. […] 축하 메시지 _ 최원형(한겨레 사회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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