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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22 – 지하(Under-ground)의 운동: 가능한 깊게, 가능한 멀리(2)

- 고병권(수유너머R)

3. 가장 바깥에서 시작하라 

지금이 이 운동의 겨울이라는 걸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지난 리포트에서 말한 것처럼 지상의 점거 장소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 운동의 파장은 뱀처럼 여기저기로 흘러 다니고 때로는 두더지처럼 지상에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고 있다. 지금 곳곳에서 토론회와 워크숍이 열리고 있고 간헐적으로 기습적인 점거도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달 14일 저녁, 나는 맨하튼의 윈스턴 유니티 홀(Winston Unity Hall)에서 열린 활동가들의 워크숍(OWS Organizers Workshop)을 지켜보았다. 그 워크숍 주제는 ‘인종적 정의의 틀을 통해 운동을 조직해보기(Organizing Through A Racial Justice Framework)’였다. 강사는 ‘인종적 정의’라는 틀로 오랫동안 여러 인종들의 연대를 고민해온 링코 센(Rinku Sen)이었다. 그는 이번 점거 시위에 자신이 오랫동안 고민해온 전략들을 어떻게 끌어들이고 발전시킬까를 이야기했다. 

‘인종적 정의의 틀을 통해 운동을 조직해보기’라는 주제로 열린 워크숍(Winston Unity Hall, 2011. 12. 14)

그와 그의 동료는 먼저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적 불평등(항상적으로 존재해온 불평등 문제뿐만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위기의 순간에 그 고통이 소수 인종들에게 얼마나 더 혹독하게 전가되는지)을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운동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레스토랑을 예로 들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 식당에서의 일은 인종적으로 위계화 되어 있다. 매니저, 홀서빙, 주방, 청소, 배달 등이 대체로 인종적인 위계를 이루고 있다. 어디서 시작해야하는가. 그는 동심원을 보여주고는, 내부에서 시작해서 확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불안정하고 노동조건도 좋지 않은 사람들로 연대를 확대하는 건 어렵다는 것이다.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은 그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연대를 할수록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센에 따르면 반대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가장 바깥에서 조직하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 상황에 비추어 말하자면 비정규직을 조직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에서 정규직 쪽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나눠준 뒤 주변 사람들과 조를 이루어서 토론하게 했다. 설문지에는 이번 점거 시위의 배제적인 측면과 포함적인 측면을 적게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 

구체적인 실천 전략과는 별개로 내게 이 워크숍은 사회 운동의 중요한 지침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운동이 일어나는 순간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가능한 먼 곳으로, 가능한 빠르게 이동해야 한다는 것, 거기서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가능한 빨리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곳, 그래서 자신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곳, 기존의 분할 장벽들을 넘어, 조건이나 자격과 상관없이 연대를 구축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4. 두 개의 이야기 -가장 먼 곳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 

그런데 ‘가장 먼 곳’은 사실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지난주 나는 두 편의 짧지만 아주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Occupy! Scenes From Occupied America, Verso, 2011). 하나는 차이나타운에 대한 글이었고(“Chinatown is Nowhere”), 다른 하나는 리버티스퀘어의 ‘홈리스’에 대한 글(“The Homeless Question”)이었다. 

차이나타운 문제를 다룬 오드리아 림(Audrea Lim)은, 처음에 리버티스퀘어의 점거 시위에 필요한 음식을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차이나타운을 떠올렸다고 한다. 차이나타운은 리버티스퀘어에서 무척 가깝기도 했다. 그런데 문뜩 이번 점거 시위에 차이나타운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이나타운에는 저임금에 신분까지 불안한 노동자들이 많고 경제위기로 인한 피해도 큰데 왜 이번 점거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차이나타운의 활동가와의 대화 속에서, 미국의 많은 운동가들이 차이나타운의 역사(19세기 이래 중국이민자들이 미국에서 받은 끔찍한 차별과 냉대의 역사)는 물론이고 그들이 도시 개발 과정에서 어떤 고통을 겪었고 또 겪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또한 운동이 어떤 보편적인 이익들(가령 일자리나 의료보험 문제 같은 것들)을 요구하므로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니 지금 운동에 참여하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이 운동이 성공하면 모든 소수자들이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 같은 걸 누릴 것이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그러고보면 많은 사회운동론이 경제성장론과 닮았다). 

그러면서 림은 어떤 가능성을 지난 11월 12일에 있었던 차이나타운의 시위에서 찾았다. 앨런스트리트(Allen Street)의 어느 빌딩 주인이 세를 대폭 인상해서 수십 년간 살아온 세입자들을 내쫓으려 했을 때 몇몇 사람들이 “도시재개발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때 ‘픽쳐 더 홈리스(Picture the Homeless)’의 멤버였던 흑인 한 명이 (아마도 이번 금융위기로) 집을 빼앗긴 일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 모두는 집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외쳤고, 그것이 중국어로 통역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고 했다. 이 운동을 이끈 중국의 한 활동가는 림에게 그들이 이제 차이나타운에서 (월스트리트 점거시위가 일어난) 주코티공원까지 행진할 수도 있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림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이제 차이나타운의 저임금 노동자들과 거주자들은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차이타운에 대해서, 그리고 차이나타운의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주제들에 대해 알고 있는가.” 

또 하나의 이야기는 크리스토퍼 헤링(Christopher Herring)과 졸탄 글뤽(Zoltán Glück)이 제기한 리버티스퀘어 내의 소위 ‘직업적 홈리스들(professional homeless)’에 관한 것이다. 리버티스퀘어에서는 음식을 무상으로 얻을 수 있고, 경찰이나 건물 주인들의 방해 없이 비교적 안전하게 잠을 잘 수도 있기 때문에, 통상 ‘노숙인’이라고 불리던 홈리스들에게는 꽤나 괜찮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찰이나 언론은 이들 홈리스를 찍어서, 월스트리트 점거자들이 사실상 홈리스들이며 매우 불결하고 범죄 위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헤링 등은 소위 직업적 홈리스인 해리스(Harris)에 대해 월스트리트 점거자들이 보인 행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사람들은 해리스에게 ‘왜 여기 있느냐(Why are you here?)’고 물었다. 그에 따르면 맨하튼의 업타운에서 자고 있을 때 경찰이 이곳으로 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실제로 경찰은 리버티스퀘어의 이미지를 훼손할 목적으로 홈리스들을 이쪽으로 보내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고 있다). 그러자 몇몇 점거자들이 말했다. “그럼 다시 업타운으로 가세요.” 이 문제는 점거자들 사이에서 점거의 ‘무임탑승자(freeloader)’에 대한 논란으로 발전했다. 이번 점거에 뭔 가라도 기여(contribution)를 하면서 ‘자산(asset)’이 되는 사람과 무임탑승하면서 운동을 ‘위험(risk)’에 빠뜨리는 사람(직업적 홈리스들이 당국과 주류 언론의 먹잇감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의 구분이 생긴 것이다. 몇몇 점거자들은 계속해서, 이 운동에 ‘뭔가 기여할 뜻도 없으면서 왜 여기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직업적인 홈리스’처럼 보인 사람과 다툼을 벌였던, 리버티스퀘어의 주방 사람이 그의 차별 행동 때문에 비난을 받았던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면 그곳을 얼쩡거렸던 나 역시 ‘기여자’인지 ‘무임탑승자’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나에게는 왜 그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헤링은 여기서 ‘배제의 정치’가 작동할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는 ‘홈리스 문제’를 홈리스를 어떻게 추방할 것인가가 아니라, 음식과 안전한 잠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들을 어떤 시각에서 볼지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오클랜드와 필라델피아 등에서는 도시 홈리스들에게 주방을 개방했으며, 애틀란타에서는 폐쇄될 위험에 처했던 홈리스들의 피난처를 점거자들이 싸워서 지켜냈다고 한다. ‘왜 당신은 여기에 있는가’는 리버티스퀘어의 점거자들이 홈리스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점거자들 자신이 그들을 찾은 사람들이나 언론에게 자주 받는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예를 들어 설명한 차이나타운과 홈리스의 이야기는 이번 점거가 도달해야 할 가장 먼 곳이 또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이야기에서 우리는 ‘99%’라는 말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동일자의 이름으로서는 한없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동안 동일한 삶을 강요해온 ‘1%’의 이름과 대칭을 이루는 또다른 동일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99%’가 현재적 실존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실존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치 퀼트를 짤 때처럼 다양한 삶을 구체적으로 엮어서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 

뉴멕시코주에서 원주민들이 참여한 아큐파이 운동. 이들은 식민주의 문제를 제기하며 용어를 ‘(un)occupy’로 바꾸었다. (출처: http://www.truthout.org)

게다가 이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체제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은, 자기 안의 추방과 배제에 대해 싸우는 방식으로만, 체제로부터 탈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점거’ 혹은 ‘점령’이라는 뜻을 가진 ‘occupy’라는 단어는 한편으로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지배 세력에 대한 항거를 담고 있지만 곧바로 이 나라의 식민주의적 기초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지배자들에 대해 점거를 선언하는 순간 점거자들은 그 단어가 담고 있는 역사와 현실(과거 원주민에 대한 잔인한 폭력과 학살은 물론이고 현재 세계 여러 지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까지), 그리고 심지어 점거 운동 자체에서 생겨나는 배제와 추방(가령 홈리스들은 점거자들에게 노숙 장소를 빼앗겼다)의 문제와 대면하게 한다. 그들은 ‘점거’ 내지 ‘점령’을 위해서도 ‘점거 해제’ 내지 ‘해방’을 이루어야 한다. 즉 ‘아큐파이(occupy)’는 동시에 ‘언아큐파이(unoccupy)’여야 한다는 역설적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 운동이 가진 한계일 수 있지만, 또한 이 운동이 가진 가능성, 이 운동의 해방적 성격이 어디서 시작될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지점에 빨리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한 빨리 이 한계에 도달해야 하고 가능한 멀리, 가능한 깊이 이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 그만큼, 딱 그만큼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동시킬 것이다. 

*이상으로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에 대한 리포트 연재를 마칩니다. 제가 이제 한국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연재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응답 7개

  1. kyo말하길

    연재 글들을 쭈욱 읽으면서 불쑥 불쑥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곧 잘 들곤 했어요.
    뉴스와 보도에서는 나오지 않는 미묘한 뉘앙스까지
    살려주셔서 글을 읽는 내내 설레였습니다.
    좋은 글, 붸리 땡큐!

    • 고추장말하길

      설레기까지 하셨다니, 기분이 너무 좋은데요. ^^ 위클리 수유너머 계속 지켜봐주세요. 댓글도 많이 달아주시고…ㅎㅎ

  2. 고추장말하길

    여강 선생님, 고맙습니다. ^^ 참, 그런데 이번 수유너머 국제워크샵에 초대받은 사부 고소씨가 제게 막걸리 먹게 해달라고 졸라대길래, 선생님 막걸리를 떠올리며 제가 한 잔 대접하겠다고 했습니다. 괜찮겠지요? ^^;

  3. 여강말하길

    드디어 끝났군요. 그런데 아직도 한 달.

    어떻든 매일 기다리오.

    기왕 결심 잘 마무리하고,
    오이소.

    막걸리는 잘 익혀 놓겠으니…

  4. 고추장말하길

    강곤 선생님, 반갑습니다. 한달쯤 후에 들어갑니다.

  5. 말하길

    격월간 에 강곤입니다. 그동안 리포트 너무 잘 읽었습니다. 근데 고추장님은 언제 귀국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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