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지역아동센터의 ‘코뮨주의 선언’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아이, 새해라 서리…….

새해가 밝았으니 새 결심을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누구의 말마따나 엄청 지루할 수도 있는 우리네 삶에 시간이라는 장치를 들여 시작과 종결, 그리고 말끔히 reset을 누를 수 있는 뚜렷한 체계가 구축되어 있는데 따른 매력을 진정으로 맛볼 수 있는 딱 제철에 와있다. 참으로 거듭 생각해도 훌륭하기 짝이 없는 장치다. 누덕누덕 낡을 대로 낡은 일정한 습속들을 한 꺼풀 벗어 던질 수도 있는 적당한 변명을 마련하기도 쉽고 혹은 이만한 겹의 시간에 걸쳐 반들반들 윤나게 닦여진 분자들이 경쾌하게 맞물려서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부드럽게 문턱을 넘어가 버렸음을 새삼 느껴볼 수도 있는 딱 그런 때를 의식 속에 확연히 불러일으키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특히 늙어가면서는 지혜를 더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지역아동센터라는 매우 정치적 삶을 살고 있으므로,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한데 실은 ‘버럭’이 더 많은 것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는 책을 좀 읽어볼 참이다. 물론 어느 해라고 그러지 않았던 해가 있었더냐마는 올해를 시작하게 했던 한 권의 책이 확실히 나를 감응시켰기에 그 감응을 연말까지 쭉 끌어가볼 참이다.

아무튼 이런 짓을 하는 까닭은 지난 해 낮 간지러운 말을 시시콜콜 많이 했기 때문도 있다. 시시콜콜 털어놓고 보니 시원한 맛도 없지는 않았다. 말마따나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슬슬 밑천도 떨어져가기 시작하고, 무엇보다 그 밥에 그 나물은 먼저 싫은 까닭이다.

더 솔직한 속내를 이야기하자면 두렵긴 하지만 ‘그런 것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했는데….’라는 식으로 감응을 확대하는 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한 줄을 잡은 느낌이 있는데 그것의 끝을 파보고 싶다. 그리고 왜 혹은 어떻게 책을 읽는가하는 점을 늘 한 번 살펴보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뜬금없이 그 책을 읽고 뜬금없는 그런 소리를 하는 짓이 속속들이 드러난다는데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친은 언제나 ‘미친년이 미친 짓만 골라서 한다’고 명쾌한 해석을 내려주고 계시지 않았던가? 필시 그래서 그럴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새해까지 되어 버려가지고……그러니 모두들 참을 수밖에 없다. 참 할 수 없는 일이다.

누가 다니라고 했다고, 참…….

간혹 지역아동센터를 때려 치고 싶다. 지역아동센터는 스스로의 노동으로 삶을 꾸려 나갈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갈 아이들을 위한 지역의 작은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런 곳을 위해 노력하고 또 함께 애를 쓰는 과정은 쉽지 않은 것이어서, 그야말로 무언가와 불꽃 튀게 부딪히는 순간이나 혹은 제도적 장치 속에 깊숙이 들어가 길들이기에 저항할 힘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가 원하고 구현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희미한 기억 속을 더듬으며 흐느껴야 했다.

우리는 분명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가 싫다. 특히 지난 시기 맹위를 떨쳤던 신자유주의와 같은 자본주의의 행태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부당하고, 불리하며, 전망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아동센터의 작은 실존들 앞에서 감히 무엇을 향해 축복의 말을 던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지우기 어렵다.

이 시대에서 우리 아이들이 갖는 상징성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반드시 인간의 성장에는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마련하지 못한데 따른 책임을 불가피하게 사회가 부담할 수밖에 없음이라고 하는 오래된 신화의 재현인 것이다. 그래서 간혹 지역아동센터들은 쉽게 가족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곤 한다. 실제로 진짜 가족들보다 오랜 시간과 사건들을 함께 겪기도 하고, 여러 감정을 함께 나누며 성장의 매순간을 서로 지켜주다 보면 결국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탓에 쉽게 진짜와 가짜의 기준을 혼란스러워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말 그대로 ‘우리 아이들’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히고 그 속에서 그 ‘우리 아이들’의 개인적 약진에만 어느 새 목을 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일도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다. 언제나 어느 개그 프로그램의 개그맨의 대사처럼 ‘아니야, 엄마 아니야….’하고 결정적 순간에 파국을 불러 들인다. 무언가의 결핍이나 부재로 인한 비정상성이 발생하고 이를 보충하거나 대체함으로써 정상으로의 회복을 꾀할 수 있다고 하는 도식적인 과정을 한마디로 깨버리는 것이다.

지역아동센터와 그 인근의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은 정상에서의 이탈된 모습들이다. 그것이 전적으로 소수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학교와 대중매체 및 종교와 문화와 윤리는 우리의 모습에 수치를 느끼도록 강요하고 있고, 아이들은 조용히 동정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하고 있다. 그러니 원래 이 아이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모습들대로 거리를 활보하고, 마음껏 하고 싶은 일들을 저지를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렇게 지역아동센터를 만들고 이들을 그 속에 가두고 중산층의 예의와 문화를 숭상하게 하며, 수치와 염치를 통해 자존감의 바로미터를 설치하도록 유도하고, 때맞춰 제공하는 음식으로 이들을 길들이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죄책감을 떨쳐 버리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이런 사태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시 모여야 한다. 무언가의 형식 혹은 절차 그도 아니면 약속이나 의식 등을 통해 우리는 다시 모여야 한다. 아니 모였다는 인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절박한 요청은 때로 매우 광폭한 과정을 빚기도 해서 가끔 의지하지 않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게도 한다.

그런데 지역아동센터는 제도적으로 혹은 겉으로는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 2012년 보건복지부에서 내놓은 지역아동센터의 운영지침을 보면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아동들의 등록에 관한 사항들이 기재되어 있다. 지역아동센터는 복지부의 ‘지역사회 요보호 아동의 방과후 돌봄사업’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사업이어서 ‘요보호 아동’의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다. 그 제1순위가 기초생활수급가정의 아동이다. 그 다음 2순위가 한부모, 조손가정, 다문화, 장애 등 저소득과 지역사회의 집중적 돌봄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가정의 아동들이다. 제3순위가 일반 저소득 가정의 아동들로서 올해는 전국가구들의 평균 소득 170%이내에 해당하는 가정들의 아동들이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지역사회에서 기타 돌봄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아동들이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우선순위 아동들이 센터 아동들의 60%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도 붙어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4,000여개소의 지역아동센터들에서 만 명이 넘는 아동과 청소년들을 돌보고 있는 상황이어서 지역아동센터들은 점점 보편적 방과후 시설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제도권의 언어일 뿐이다. 이를 아이들의 말로 다시 하면 이렇게 된다. “엄마가 다니라고 해서 다니는 거예요, 안 다닌다고 하면 혼나니까 할 수 없이 다니는 거예요” 혹은 “몰라요, 그냥 선생님이 다니라고 해서 알았다고 하고 다니는 거예요” 정도가 사실에 가깝다.

실은 아이들은 어른들이 필요하다고 보는 밥도, 보호도, 교육도 모두 귀찮은 탓에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학교를 탈출해 나왔을 때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영유하며, 내가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리운 공간을 자유롭게 나다니는 것이며, 무엇보다 스스로의 리듬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아동센터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들의 허울 좋은 감옥이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거듭 다시 모이는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모두가 모여 촛불을 들고 선서를 하는 식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개개인의 결심과정을 거쳐 다시 모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 고민하는 꼬뮨을 구성하는 첫 번째 과제인 것이다.

이곳을 나의 꼬뮨으로 선택하는 것은 모두 각자의 몫이다. 따라서 그 입문 과정은 모두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것을 짚고 넘어가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것만이 공통적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아이들의 보호자들은 소수를 제외하고 별 보호를 실제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상황에 기인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오래 전부터 직감적으로 자신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자신의 성장을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매우 독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결정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입문 방식-이것은 전적으로 입문을 주재하는 사람의 무능력에 기인한다-은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가끔 초대를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선택을 하게 한다. 이 때 특별한 점은 아이들 대부분 일정한 시간이 흘러 파랑새에 대한 일정한 경험층이 쌓이고 난 뒤, 이런 선택을 제안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은 파랑새가 덧쓰고 있는 외부적 형식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함 때문이다. 피상적인 만남이 끝나고 결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주로 개개인의 리듬이 전체 속으로 제대로 어울려 들어오지 못하게 될 때. 특히 주로 그의 삶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관계가 성립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게 될 때 묻게 된다. 그리고 그 동안의 시간과 경험들은 우리가 누구인지와 우리는 어떻게 함께 하고 싶은가와 자신이 우리와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까를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강렬한 인식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설명 대신 주어진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그 순간 그는 진정한 파랑새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선택 후에도 역시 그가 적극적으로 우리의 리듬에 함께 하길 어려워할 때 그는 또 다시 선택을 제안 받게 되기도 한다. 다만 이 때 어려운 점은 그들의 처지이다. 아이들이 어리고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하는 객관적 현실들이 이 아이들의 선택의 진정성을 덜어내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점은 늘 마음에 걸리는 점이긴 하다. 하지만 꼬뮨의 구성원으로 함께 하겠다는 선택을 한 사람씩 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누구라도 끝까지 파랑새를 지켜갈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담지하고 있으므로 이 공동체가 필요한 만큼 지속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를 찾는 노력과 그 속에서 우리의 터를 가꿀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짜증나게 ‘파랑새를 계속 다닐 것인지 선택을 하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그런 질문에 아이들의 첫 반응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다니라고 해서 다니는 건데 뭘 어쩌라구’ 정도로 나온다. 하지만 질문이 떨어진 순간 그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아버지나 어머니는 파랑새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는 냉정한 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필요하다면 우리가 나서서라도 그만 다닐 수 있도록 보호자들을 함께 설득해주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것은 결코 우리를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랑새를 선택하라는 말로 무언가를 협박하고 두렵게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하지만 자주 이런 식으로 오해된다-이다. 다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너의 선택으로 ‘네가 파랑새가 진정으로 필요한 곳으로 여기고 스스로 다니려고 하는지를 결정하라’고 거듭 설득한다.

또한 왜 지금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희들과 함께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도 우리는 중요하게 확인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남을 보살피고 함께 하는 것은 인간적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그 중에서 우리는 모두 특히 가난하고 힘겨운 아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소망을 품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염원하기 때문에 지금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 즉, ‘너희들이 훌륭히 자라서 다음의 가난한 아이들을 돌볼 것이란 약속을 하였다고 믿기에 우리는 지금 먼저 너희들을 돌보는 것’이라는 말을 함께 확인하는 것으로 그것은 끝이 난다. 물론 한 마디의 다짐은 시작일 뿐임을 잘 안다. 그 후 그렇게 이야기한 그는 또 다시 우리를 뒤흔들고 우리는 그를 뒤흔드는 길고 긴 여정이 남아 있음도 잘 안다.

이런 간단한 입문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꼬뮨이므로 혹은 꼬뮨이고 싶어하는 곳이므로 우리에게는 우여곡절이 많다. 아이들이야 이 곡절들을 그들에게 가득 찬 활기와 직관력과 생생한 감정들로 감당해 낼 수 있지만, 교사들은-최근 개인적으로 ‘늙고 병든 몸’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그것이 쉽지 않아 책이라도 보며 더듬거리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그래서 아이들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쌤은 파랑새에 왜 다녀요? 누가 다니라고 했다고, 참……”

선물 같은 인생

그래도 그것은 나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생의 모습이었다.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등등의 말로 겸양을 떨 줄 잘 알고 있지만, 난 정말 선물이 좋다. 그래서 선물같은 이 인생이 참으로 고맙다. 겁 많은 사람이 한 발쯤 비켜서서도 아직 싸움터를 떠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자리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 늙어가며 늘길 바랄 것은 지혜가 아니라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의 보호는 좀 과감히 사양할 수 있는 용기가 이제는 좀 생겨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더 많이 늙어 가면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자주 오면 더욱 모두를 위한 일에 자신을 선물처럼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때는 제발 이 지겨운 부끄러움을 좀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자주 옛 사람들의 말에 귀가 기울여진다. 이때까지 살다니 이 또한 참으로 선물 같은 인생이다. 늙어보니 나쁘지 않고 좋다. 흰 머리카락도 햇빛에는 반짝거린다.

* 꼬뮨주의 선언,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 고병권 이진경 외 지음, 교양인, 2007

응답 2개

  1. 규섭말하길

    위클리에 맛을 들여서인지 좋은 글이 눈에 보여요.
    생생한 말들로 글을 풀어주셔서 글이 술술 읽힙니다.

    꼬뮨을 이뤄가는 과정… 참 어렵다는 걸 실감하고 있던 차에 일말의 가르침 얻고 갑니다. 선물같은 인생…

  2. 고추장말하길

    파랑새의 코뮨 선언이랄까, 다짐이랄까 하는 걸 제 스스로에게도 물어보게 되네요. 나는 무엇을 약속하고 무엇을 선언했던 것일까. 무엇을 약속하고 또 선언할 수 있을까… 선물같은 인생…. 당분간 자꾸 떠오를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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