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말할 수 없는 우리들에 대하여

- 달팽이 달팽이

1.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는, 달팽이 공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 곧 상대방은 이렇게 묻는다. “무슨 일을 하는 곳이죠?”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보자. 베이킹을 한다, 요리를 한다, 술을 만든다, 화장품과 비누를 만든다, 바느질을 한다, 뜨개질을 한다. 세미나, DIY워크샵, 벼룩시장, 카페, 요가, 영화 배급, 상영, 돌잔치, 연극, 퍼포먼스, 강좌 기획…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대부분 거리에서, 공원에서, 투쟁 농성장에서 이루어진다. “멤버들은 주로 뭘 하는 사람들인가요?” 라고 물으면 또 할 말이 없어진다. 우리가 누구였더라? 그때그때 달랐다. 무슨 이유로 이런 활동들을 했었나?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활동을 설명해줄 만한 하나의 목적이나 이유는 없다. 희미한 기억으로는 4년 전인가 5년 전인가, 연구자 공동체 수유+너머의 주방에서 몇몇이 함께 빵을 구웠던 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오븐에서 케이크가 구워지는 동안, 식탁에 앉아 바느질 같은 것을 하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사람들이 와서 모였다가 흩어지곤 했다. 거기에 시간과 우연이 더해져서,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1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가 납득할 만큼 꽤 괜찮은, 그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진 집단이 아니다.

달팽이 공방의 활동은 내부의 의사결정기구를 통한 합의 과정을 거쳐서 진행되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서로가 각자 ‘달팽이 공방’의 이름으로 하는 일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어느 날 불쑥, ‘팔당 두물머리에서 벼룩시장을 합니다’라는 공지가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면 누군가 그걸 보고 함께 하기 위해서 간다. 물론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잦다. 커다란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두셋이 모여 미리 준비를 하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떠한 합의도 강제되지 않는다.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설득하거나 동의를 구하는 과정 또한 생략된다. 우리는 단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해.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너를 응원할 거야.” 마치 연인들처럼 우리는 이렇게 말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었다. 달팽이 공방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응원하고 동의할 수는 없다는 것, 그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 우리는 용케 여기까지 왔지만 언제 깨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집단이라는 것.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네가 우리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것을 환영해, 라고.

그렇다면 활동을 조직할 때에, 멤버들 사이의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멤버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생각나는 대로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메일을 쓰는 식이다. “언제 어디에서 이런 일이 하고 싶어. 시간되면 놀러 와. 같이 하자” 라고. 혼자 빨리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혼자 움직인다. 그리고 나중에 웹 게시판에 이러이러한 일을 달팽이 공방의 이름으로 했었노라고 후기를 올린다. 물론 이 또한 약속되어 있는 사항이 아니므로, 바쁘거나 하면 잊는다. 아주 나중에야 아, 누군가 이런 일을 했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번 국제 연구 워크숍 <공간과 거버넌스> 발표를 위해 우리는 각자의 활동을 기록한 사진과 영상을 달팽이 공방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한데 모았다. 우리는 PPT를 만들어 우리의 활동에 대해 설명하기로 했다. 그러나 곧 우리 중 한 명이 달팽이 공방을 대표해서 그간 진행되었던 모든 활동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중 누구도, 그 모든 것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 센다이에 머물고 있을 때에 나는 소문으로 달팽이 공방이 수유너머N에서 카페 별꼴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는 카페 별꼴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너는 달팽이 공방이면서 왜 이런 중요한 일에 대해 모르는 거야?” 라고 누군가 놀라워했을 때에도, 정말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서울에 돌아가면 명동 마리 점거 투쟁을 함께 할 예정이었으므로, 그럼 나는 달팽이 공방을 그리로 옮겨야지,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또한 ‘우리는 여기저기 있어도 괜찮으니까’ 라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혼자 한 결정이었다. 명동 마리가 사라지는 바람에 달팽이 공방이 둘이 되는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어떠한 합의과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공동체라 부르는 곳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거점을 옮기는 정도의 안건이라면, 적어도 10여 차례 이상의 크고 작은 논쟁을 포함한 엄청나게 피곤한 합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애써 이루어낸 하나의 합의를 거부하는 멤버가 있을 경우, 보통은 (자의로든 타의로든)그가 그곳을 떠난다. 그러면 일은 간단하다. 단 한 명이 전체의 합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전체가 사라지거나, 둘로 나뉘거나, 심지어 그 둘이 같은 이름을 써도 상관없는 상황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예 합의 과정 자체를 생략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이것은 물론 아주 특별한 상황으로, 우리가 만들어지지 않고 그냥 생겨나버린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는 여기에 어떠한 합의과정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는 일치된 합의와 계획 아래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였다면, 이런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조차 단 한번도 서로 나누어 본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과 거버넌스> 참여는 우리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작업임에 틀림없다. ‘달팽이 공방’이라는 익명이 아니라, 그 중 몇몇의 이름으로 대학에서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그간의 활동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하고, 우리가 어떤 집단인지에 대한 글을 써야만 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 설명하는 모든 것들—달팽이 공방이라는 공동체가 움직이는 원리, 그 원리 없는 원리—또한 사실 달팽이 공방의 정체성과 별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대로 썼으니까. 물론 이러한 생각은 지금 이 글에서 달팽이 공방이라는 익명을 통해 이야기되지만, 그러한 익명의 목소리는 다행히도 여럿이다.

그렇다면, 각자가 각자의 하고 싶은 일을 그저 할 뿐이라면, 우리는 왜 굳이 개인의 이름이 아닌 ‘달팽이 공방’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함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이름 아래 어떠한 공통적인 것을 나누고 있는가?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 다시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달팽이 공방은 무엇인가? 달팽이 공방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하나의 ‘우리’로 존재하는가?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달팽이 공방을 달팽이 공방이라고 부를 만한 어떠한 공통적인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달팽이 공방에 대해 설명하면 할수록, 질문을 던진 상대방은 결국 이곳이 뭔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이상한 집단이라는 느낌만을 받게 된다.

이 비밀, 결국 우리가 나누어가진 것은 비밀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부에 감추어 놓은 어떤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말해질 수 없고, 폭로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우리 중 이것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냥 저절로, 우연히, 하다 보니, 어느 날인가 생겨난 것, 우리는 서로가 알지 못하는 이 비밀을 나누어 가지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라고 명확히 말하기도 전에, 이미 주어진 것과도 같다. 달팽이 공방이 이름 붙여지기도 전에 이미 있었던 것처럼. 이상한 말이지만, 조금 더 확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누구이든 간에 우리는 이미 서로와의 관계 안에서 우리인 것이다.

이 이상한 우리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공동의 실체가 없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

2.

지난달 오사카 성 공원에서 Café Anti-birthday라는 이름의 공원 카페를 연 적이 있었다. 이름은 카페였지만 우리는 비 오는 공원에서 음악을 들으며 낯선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그때 같이 마시던 홈리스 아저씨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과는 왠지 아주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 같단 말이야. 친구. 그래, 오늘 우리는 친구야. 내일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아저씨가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2 그러한 순간들이 있었다. 낯선 이와 나를 엮어주는 어떠한 것,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있었다. 어째서 낯선 우리들은 그 순간 서로를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았던 친구로 느꼈던 것일까? 술 때문이었을까? 구워간 초콜렛 머핀 때문에? 그와 나 사이에 공통된 것이라고는 그 날 한 자리에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왜인지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그러한 ‘우리’가 가능해지는 공간/순간을 경험한 바 있다. 이를테면 거리나 광장에서, 혁명의 순간에.

“마치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바람직할 것이라 여겨진 형식들을 뒤집어엎는 축제와 같은 급작스런 만남 속에서, 68년 5월은 아무 계획 없이,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급진적 소통에 대한 긍정(긍정의 일반적 형태를 넘어선 긍정)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급진적 소통, 다시 말해 계급, 나이, 성, 문화의 차이에 대한 구별 없이 처음 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했던 열림. 그때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마치 이미 사랑받았던 자와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가까운 자였기 때문이다.”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거리에서, 공원에서, 투쟁 농성장에서 달팽이 공방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끝도 없이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토록 낯선 이들과 나를 ‘우리’로 만드는 순간/공간이 열렸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

그 순간에, 네가 당신이 되고 당신이 내가 되는 경지까지는 불가능해도, 당신과 내가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가능해진다. 지난 여름, 친구의 전시회에서 a-kitchen이라는 이름으로 부엌을 차리고 밤마다 요리를 했던 적이 있었다. 혼자였지만 나는 달팽이 공방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리고 함께 요리를 했던 이에게 “우리는 지금 이거 함께 하고 있으니까, 너도 이제 달팽이 공방이야” 라고 말했다. 그는 마카마라는 이름의 그룹에 속해있었는데, “그래. 그렇다면 너도 이제 마카마 멤버야” 라고 나에게 말했다.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는 일은 굉장히 즐겁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그룹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그 순간에는 우리였다. 그리고 함께 무언가를 만들었다. 이러한 비상식적이고 틀에서 벗어난, 급진적인 소통으로써만 만들어지는 ‘우리’. 우리는 늘 이런 것들을 좋아했다. 아마도 ‘달팽이 공방’이라는 이름, 여럿이 쓰는 하나의 익명 아래에서 우리가 나누고 있는 것 또한 이런 것일 것이다.

달팽이 공방이라는 하나의 익명으로 활동할 때, 우리는 이렇게 서로 ‘이어져 있다’라는 감각을 갖는다. 누구와? 불분명하다. 무엇이 이 감각을 가능케 하는가? 모른다.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말, ‘네가 우리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것을 환영해’라는 불가능한 말이 이 메커니즘에 크게 작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혼자 활동할 때에조차, ‘달팽이 공방’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여럿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활동을 하며 어떠한 공간/순간을 만들 때, “여기에서 지금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이 생기든 다 괜찮아” 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완벽하게 연합된 무언가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온다. 우리가 ‘달팽이 공방’이라는 이름으로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뿔뿔이 흩어져있고, 하나의 결론에 다다른다거나 좀 더 괜찮은 ‘우리’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기에, 되찾아야 할 대상도 이루어야 할 목표도 없다.

내가 나의 이름으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라는 전체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달팽이 공방이라는 이름 또한 그러한 위험을 똑같이 안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몹시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우리’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서 고유한 ‘우리의 것’이 생기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더욱 강화되고, ‘우리’에 속하지 않는 타인을 비난하거나 공격하고, 동시에 ‘우리’라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그러한 패턴을 우리는 너무도 자주 목격했다. 때문에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에서의 합일과 같은 것은 뭐랄까, 구역질 나는 것들 중 하나다. 우리는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달팽이 공방의 ‘우리’들이 공유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여기에 강력하게 저항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달팽이 공방이 뭐냐고 물어보면 몇 마디 설명하려는 시도 끝에 결국에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아직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정해지지 않은 대상이 언제나 ‘우리’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분열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깨어지더라도 언제고 다른 이름으로 다시 만나서 무언가 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달팽이 공방이라는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작년 봄 즈음에, 다른 일로 너무 바빠졌기 때문에 달팽이 공방의 활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나는 다른 이들의 일을 돕지 못해’라는 이유로 미안한 감정을 갖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달팽이 공방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지만…… 곧 나간다는 것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관두어버렸다. ‘함께 한다’와 ‘함께 하지 않는다’의 차이가 우리 안에서는 모호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언제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누군가 함께 해주지 않는다고 비난하거나, 함께 하지 못한다고 미안해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감정이 든다고 해도 곧 별 것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구체적인 활동을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어져 있다’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가 ‘우리’이기도 하다. 여기에 다른 조건들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모든 활동이 하나의 익명으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좋아한다. 이것은 네가 했다고 해서 네 일이 아닌 것이고, 내가 했다고 해서 내 일이 아닌 것이다. 네가 뭘 해도, 그것을 나의 일—우리의 일로 받아들이는 어떤 불가능한 순간이, 가능해진다.3 이것은 어떠한 외부로의 소통도 불가능한 ‘개인주의’와도 다르고, 동일한 어떤 것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의 ‘공동체 주의’와도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이기는 하나 공동의 실체를 가지려 하지 않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느슨한 경계를 가진 공동체 중 하나에 속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힘이 우리들을 ‘이어져 있다’고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지, 여럿이 함께 있을 때 조차도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을 가르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 낯선 이와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것이 왜 어려워졌는지, 여럿이 거리에 나가서 데모를 하는 일이 왜 힘든지, 도시에서 사람들이 서로 끌어안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명백한 의식만이, 우리에게 ‘이어져 있다’라는 감각을 준다. 비밀과 같은 어둠 속에서 홀연히 누군가 내민 손처럼, 그 모르는 손을 잡고 다시 어둠 속으로 손을 내미는 일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들의 맞잡은 손이 하염없이 이어져 있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고립을 공통의 체험으로 만들기를, 이 고립만이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되기를, 때문에 고립된 개체라면 누구든 무엇이든 우리가 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그러한 순간/공간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달팽이 공방은 끊임없이 사라지고, 이름을 바꾸고, 여러 개로 해체되었다가, 다시 만들어지고, 또 다시 사라질 예정이다.

  1. ‘어떻게 하다 보니成り行き’라는 표현을 나는 작년 수유너머N에서 열린 국제 워크샵의 발표문 <카페와 문화의 실천>(와타나베 후토시)에서도 발견했다. 우연, 의도하지 않음, 의도해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영역, 때문에 불가능한 순간들.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고 앞으로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둘 것이다, 닥쳐오는 상황을 받아들일 것이다—라는 수동적인 열림의 차원. []
  2. 그렇게 말하면서 동시에 그는 우리를 걱정했다. “아무에게나 이렇게 마음을 열어버리는 건 위험해. 낯선 사람에게 잘해주면 안된다구. 세상에는 위험한 사람이 아주 많아, 이 공원에도 이상한 사람들이 정말 많아.”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강하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잖아요.”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 순간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이것은 아주 드문 경우일지도 모른다. 낯선 이에게 마음을 열었다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가방을 빼앗긴다거나, 강간이나 살해 당하고 버려지는 일도 상상해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든, 몇십 년간 함께 살아온 사람에게서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언제나 나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을 열 밖에 도리가 없다. 닫고서는 살 수 없으니까. []
  3. 다시 작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워크샵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 궁중 떡볶이를 만드는 것 외에는 별다른 참여를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카페 커먼즈의 발표는 듣지 않았었다. 밤에 사람들이 빠져나간 강의실에서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쇼파에 굴러다니던 발표문을 주워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다. “우리는 이 고립을 공통의 체험으로 만들기 위해…”(와타나베 후토시) []

응답 2개

  1. […] 구설할 때 ‘달팽이공방’의 사례는 참고할만 할 것 같다. (참고: ‘말 할 수 없는 우리들에 대하여’  http://suyunomo.jinbo.net/?p=9433 […]

  2. […] 동시대반시대 | 말할 수 없는 우리들에 대하여 _ 달팽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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