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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 공간의 현재와 ‘조정’ - 로마, 코펜하겐 그리고 일본

- 하마니시 에이지

1. 시작하며

현재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사회운동의 공간 중 구체적인 장소성을 가진 공간의 의미는 무척 크다. 나는 이렇게 글로벌한 운동이 일어나는 장소에서 자율공간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보고하고자 한다.

국제정상회담(G8이나 G20, COR, WT○ 등)을 둘러싼 글로벌한 운동이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곳은 시애틀, 제노바, 제네바와 같은 개최지와 근린 도시다. 수만,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특정 지역의 공간에 일시적으로 모여 세상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일정 기간 거기서 체제하며 활동하려면 그걸 뒷받침하는 인프라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2001년 제노바 G8 정상회담 때는 이탈리아 각지의 사회센터가 네트워크를 만들어 대규모의 저항에 성공했다. 2008년 도야코 G8 정상회담 때도 전세계와 일본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장소가, 홋카이도 지역민을 중심이 되어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09년, 나는 라퀼라 G8 정상회담(7월)과 피츠버그 G20(9월), 코펜하겐 COP15(12월) 등의 개최지를 방문했다. 그때마다 나는 데모와 직접행동, 대항포럼과 같은 저항활동을 지원하는 여러 가지 인프라의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다.

거기서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사회센터와 아나키스트 하우스 등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곳도 있었는데, 그들은 정치제도와의 관계를 ‘조정’하며 유지되어 왔다. 일본에서도 당시에는 수많은 ‘커뮤니티’가 존재하며 국제적 교류를 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활동이 멈춰 있다.

이 글의 목적은 로마와 코펜하겐에서 자율공간의 현상황 – 국제정상회담시 관찰된 것들에 한해 – 및 정치제도와의 ‘조정’ 과정에 초점을 두고 그것들의 지속요인을 고찰하는 것이다. 그 이후 최근 일본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움직임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을 끄집어내도록 하겠다.

2. 로마의 사회센터

현재 이탈리아 국내에는 사회센터가 100개소 이상 존재하며, 수도 로마에만도 30개소가 있다. (그림 참조).

라퀼라 G8 정상회담 당시 해외 활동가를 받아들이기로 한 곳은 지하철 A선 부근에 위치한 ‘아크로박스’와 ‘L38’, 그리고 노면전차 부근의 ‘포르테 프레네스티노’, 이렇게 세 곳의 사회 센터였다. 우선 내가 실제로 방문한 두 곳을 소개하겠다.

(1) ‘포르테 프레네스티노’(Forte Prenestino)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사회센터로서 역사가 깊다. 아나키즘의 계통이며 19세기 군대의 요새를 1968년에 점거한 것이 그 유래다. 현재는 다양한 이벤트(음악라이브나 전시회 등)를 개최하는 것을 조건으로 지자체와 협정을 맺었다. 1년에 수만 엔이라는 상징적인 금액을 자치체에 지불하는 방식으로 합법화되어 있다.


정면


성벽과 중심부 사이


중정


중정

부지 전체는 도쿄돔의 약 두 배이며(400*200m), 해자로 둘러싸인 성벽(지하 1층, 지상 2층, 옥상) 내부에는 무수한 문으로 나뉘어 있으며,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성 벽 내부에는 레스토랑이 카페, 정보센터, 디자인 연구실이 있다. 드넓은 중정 두 곳은 야외무대나 바,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그림1 참조).

(2) ‘아크로박스(Acrobax)’는 제노바 G8 정상회담 이후 2002년 12월에 점거된 가장 최근의 사회센터 가운데 하나로서 원래는 테베레 강가의 폐관 경견장이었다. 반파시즘계의 사회센터로서 주거동 1층에는 파시즘에 관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민 지원 활동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주거동


관람석


내부


반파시즘 전시장


경견장 앞에는 주차장과 축구장, 농구장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도쿄돔과 거의 비슷한 넓이(200*200m)다. 건물 내부에는 미디어, 오디오 등의 실험실, 라이브 무대나 댄스 홀 등이 있다(그림 2).

포르테와 아크로박스는 지방의회, 자치의회, 좌파정당 등과 ‘협정’을 맺고, 문화이벤트를 실시한다는 조건으로 1년에 수만 엔 정도라는 상징적인 액수를 지불하며 ‘합법화’된 ‘자주관리사회센터(Centro Sociale Autogestito: CSA)’다. 또 하나는 ‘불법점거’를 그대로 계속하고 있는 ‘자주관리 점거형 사회센터(Centro Sociale Occupato Auto-gestito: CSO/CSOA)’로서, 현재는 아주 소수로 한정되어 있다. 예컨대 ‘L38/로렌티노 큐파토 (Lauren tinoccupato)’는 로마 남부의 로렌티나(지하철 종착역)의 세스토 폰테에 위치한 단지의 일각을 점거하는 CSO 사회센터다. 1990년대 점거한 이후 15년 이상 지났지만 그 사이에 ‘협정’은 맺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임금은 물론, 수도세와 전기세도 내지 않고 않다. 라퀼라 G8 정상회담 때는 해외 활동가들의 유일한 숙박 장소로 활약했다.

3. 코펜하겐의 자율공간


다음으로 코펜하겐의 자율공간이다. “1970-80년대에는 점거지가 덴마크 전체에 100개는 있었다”고 하며, 현재도 많은 자율공간이 존재하고 있다.

‘크리스차니아(Christiania: 1971년~)’는 코펜하겐의 교외, 크리스찬하운의 일각(도쿄돔의 열 개 크기 이상), 운하 양쪽으로 펼쳐져있는 유럽 최대 규모의 아나키스트 커뮤니티다. 크리스차니아는 원래 덴마크 운하의 병사(兵舍) 창고로 사용되었던 터(1960년대 후반에 폐기)를 1971년에 젊은이들이 점거하여 시작되었다. 내부에는 시장, 영화관, 재즈클럽, 라디오 방송국, 텔레비전 방송국, 공장, 자전거포, 레스토랑, 카페, 바가 있다. 모두 1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간호사, 복지관계, 아티스트, 음악가, 디자이너 등이 거주지 밖에서 일하고 있다. 600명 이상이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지금도 200여 명의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각 위원회가 철저하게 상의하고 결정하여 운영이 이뤄진다. 최근, 마약과 매춘이 문제가 되자 경찰이 자주 수색하고 있다. 티볼리 공원에 이은 대표적인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4. ‘조정’과 일본

(1) ‘조정’

현재 로마의 사회센터를 정치, 제도와의 관계성에 관해 크게 나눠본다면 ‘디스오비디언티(Disobedienti)’계와 그 이외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98년 결성된 온건파 네트워크 ‘하얀연결(白いつなぎ)은 정치제도, 정당(Greens나 공산주의 재건당[RC])과의 상호작용을 강화하고 ‘협정’을 맺어 상징적인 임대료를 지불하여 CSA로 ‘합법화’되었다. 정당의 선거운동이나 의원 추천 등의 활동도 하고 있었다. 한편, 급진파 사회센터는 제노바 정상회담 후 과거 ‘하얀 연결’이었던 사회센터와 함께 ‘디스오비디언티’를 결성했다. 이리하여 현재 로마의 사회센터는 ‘디스오비디언티’(거의 대부분이 CSA)와 그 밖의 사회센터(상당수가 CSA)로 나뉘었다.

전자는 정부와 자치체가 압력을 넣어 라퀼라 G8 정상회담 때 항의활동을 벌이거나 활동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아나키즘계와 안티파계의 포르테와 아크로박스와 L38만이 외국에서 들어온 활동가들의 활동에 협력했다. 이처럼 로마의 사회센터는 지금까지 상호작용을 하며 유지되어 왔다. 라퀼라 당시에 많은 사회센터가 항의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 외국에서 온 활동가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게다가 대량 체포 후에는 구원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 그런 사건들 하나하나에 관해 내부에서 철저히 상의한 후에 판단이 나오기 때문에 “제도화”나 “보수화”와 같은 말로 한 번에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코펜하겐의 사회센터나 아나키스트 하우스도 마찬가지다. 1971년에 청년들이 크리스차니아를 점거했을 때는 시의회의 두 의원이 지지를 표명했으며, 새로운 자치의 실험으로서 3년간 사용하는 것이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반환시기가 와도 반환하지 않아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고 1980년대에는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그 후 1990년대 이후에는 크리스차니아, 정부의 사법성, 방위성, 경찰기구, 크리스찬하운의 지역 주민,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미디어, 법률과의 논의가 벌어졌다. 건축물의 개축이나 마약 수사를 받아들이는 등 유연하게 대응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정부와 ‘가이드라인 협정’을 맺고, 1992년부터 1인당 700크로네(약 1만여 엔)를 정부에게 임대료로 지불하고 있다(현재는 1500 크로네). 무기 소지 금지, 하드 드럭(중독성 강한 마약) 금지, 폭주족과 갱의 출입 금지, 자동차의 출입 금지(도로상의 주차가 문제된 적이 있다), 그리고 인구를 더 이상 늘리지 않는다는 방침이 정해졌으며, 이런 방침을 기록한 간판이 크리스차니아의 곳곳에 세워져 있다. 여기서도 여전히 상호작용이 중요했다.

(2) 일본

로마나 코펜하겐의 자율공간은 정치, 제도와의 상호작용을 이어왔다. 그 배경에 있었던 것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높은 청년실업률이다. 1970, 80년대 이탈리아와 덴마크의 청년실업률은 일본보다 훨씬 높다. 청년들은 정말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점거를 시작했으며 주위의 반응도 다소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청년 실업률은 5% 이하였으며, 먹고 살기 위한 제도를 개혁하고 노동자협동조합과 정당을 세우자는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젊은이들도 그런 시도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코뮌은 굳이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에 선행하며, 모든 제도와 조직으로부터의 자율이라는 순화지향성이 강해졌다.

이탈리아와 덴마크에는 노동조합과 좌파정당의 강력한 네트워크가 존재하며 사회센터와 아나키스트 하우스는 그러한 네트워크를 전제로 지속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이 지원해줘 사무실을 공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당과 노조와 자율공간은 공존하고 있으며 서로가 도움을 주는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탈리아나 스페인처럼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좌파정당이 강력한 사회에서 사회센터가 발전하게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코뮌과 자율공간에서는 종종 ‘학생’, ‘시민’, ‘노동자’, ‘예술가’, ‘의원’, ‘신좌익’, ‘공산당’, ‘부모’ … 그들을 모두 규탄하고 그들과 모두 거리를 두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노조나 협동조합, 정당과 아나키즘이나 아우토노미아 등의 생각은 엄밀히 말해 다른 부분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왜 덴마크나 이탈리아 사이에서는 협력이 가능한 걸까?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양자가 타깃 대상으로 삼는 세대가 다르다는 것이다. 자율공간은 주로 젊은이가 운영하지만 노조와 정당, 자치체 의원 등은 연령대가 더 높은 세대가 맡고 있다. 그리고 30세 정도를 기점으로 전자에서 후자로 이동하는 사람이 많으며, 그 이후에는 젊은이를 지원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좌파’의 라이프코스, 재생산의 구조가 얼마간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사민주의가 농후한 코펜하겐의 주민 가운데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나키즘을 경계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활동’에 관해서는 충분히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COP15에서 젊은 직접 행동파를 중심으로 4천 명의 구금자가 발생한 일에 관해서도 “분명 부모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권단체, 엠네스티를 통해 움직일 것이다”라고 들었다. 세대적인 연대관계, 세대별 역할분담과 재생산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일본의 운동과 좌파들은 ‘세대’, ‘가족’, ‘부모자식’, ‘젊은이’, ‘어르신’과 같은 관계성을 여전히 기피하는 경향이다. 마치 ‘알레르기’를 앓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양립불가능한 것이 세대와 시간을 축으로 양립할 수도 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점차 일본적인 사회센터의 시도 –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고 청년들 자신의 손으로 개척하며, 불법점거가 아니며 합법적인 – 를 오사카와 도쿄, 삿포로 등의 도시에서 볼 수 있었다. 무한(武漢),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속 자율공간과의 제휴와 네트워크도 깊어지는 가운데 그들이 과거의 코뮌과 다른, 어떠한 길을 갈 것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청년실업률이 높아진다면, 오히려 사회센터적인 것들이 다시금 생겨날 토양이 마련될 수 있다.

그때 정치·제도와의 상호작용(조정)은 그 활동의 유지,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며, 또한 주위의 대응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협동조합과 노동조합, 정당, 모든 단체는 ‘어르신’ 세대로서, 예컨대 이데올로기적으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더라도 충분히 관용적인 자세를 취하고, 구체적 자원의 측면과 구원의 측면에서 젊은이들의 활동을 따뜻하게 지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코펜하겐과 로마의 자율공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상황과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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