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3월 11일 후의 일본사회 -커먼즈대학에서 고찰하다

- 와타나베 후토시(커먼즈대학 사회학)

*번역 : 오하나

1 불신

2011년 12월 16일,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사고가 냉온 정지상태가 되어 원자로의 안정 상태를 달성했다고 하며 사고의 ‘수습’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에 안심한 사람들은 도대체 몇이나 될까? 해외 언론도 ‘수습’이라는 견해를 수상히 여겼고 일본 내 전문가도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사고가 ‘수습’됐다는 수상의 견해는 솔직히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억지 ‘수습’선언은 오히려 정부가 원자력 발전 사고에 관한 정보를 은폐한다는 인상을 풍겨 정부의 의도에 반하는 사람들 사이에 불안과 불신이 만연했다. 이와 같은 불신감의 만연은 2011년 3월 11일의 지진 재해 이후 일본 사회에 공통된 사회적 기분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진과 해일로 인해 전기 공급이 중단된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멜트다운[원자로의 냉각장치가 정지되어 내부의 열이 이상 상승하여 연료인 우라늄을 용해함으로써 원자로의 노심부가 녹아버리는 일]이라는 대사고가 발생하고 그 후에도 긴급사태가 계속되어 방사성 물질이 확산되었다. 이 가운데 정부와 전문가(어용학자)들은 사태를 낙관이라도 하는 듯 애매한 발표만 하여 일본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방대한 불안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부추겨 왔다. 원자력 발전 정책을 추진해 온 전력회사, 경제 산업성(구 통상산업성), 도쿄대학 원자력 공학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자 그리고 원자력 발전 추진파의 의원들로 구성된 집단은 그 폐쇄성, 배타성과 이익 추구적 자세 때문에 ‘원자력 동네[原子力ムラ, 일본정부와 전력회사, 지방자치정부가 한통속이라는 뜻]’라는 역설적 표현을 얻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방사선의 불안에 그치지 않고 정부의 대응 역시 신용할 수 없을 때 불안은 더욱 더 증폭된다. 당황스러움과 불안이 사람들을 갈라 놓았다.

2 공개강좌 <지진 재해 후의 사회를 생각한다>

나는 오사카에 있는 카페 커먼즈(café commons)라는 카페에서 매주 금요일 밤 ‘커먼즈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밥을 먹으며 얘기하는 모임을 함께 하고 있다. 카페커먼즈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와 관계되는 NPO(비영리 조직)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협동조합 운동이라든지 지역 통화, 대안 경제에 관심 갖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다. 현재는 장애자 자립 지원법의 복지 사업소로 (주로) 지적장애자로 인정된 사람들이 일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커먼즈대학에서는 동일본 대지진과 그 안에서 일어난 원자력 발전 사고를 계기로 2011년 4월부터 <지진 재해 후의 사회를 생각한다>라는 공개강좌를 시작했다. 오사카는 재해지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약간의 지진이 있었을 뿐 직접적 피해는 거의 없었으며, 재해지가 정신없는 상황일 때도 일상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더욱 재해지에서 떨어진 지역에서 지진 재해를 둘러싼 사유와 이야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했고 지진 재해를 주제로 한 공개강좌를 준비했다.

지진 재해 후 텔레비전에서는 해일이 거리를 덮치는 영상을 연일 내보냈다. 9.11 테러 때 그랬던 것처럼, 충격적인 뉴스 영상은 흡사 소비를 위한 스펙타클과 구별 불가능해졌다. 반복 강박적으로 방영되는 영상의 자극에 마비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군가와 이야기 하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 또한 원자력 발전 사고 후 방사성 물질이 확산되는 가운데 원자력 발전을 둘러싼 여러 ‘전문가’들의 해설이 뉴스 프로그램과 신문보도에 넘쳐나 방사성 물질의 피해가 염려되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일본 사회 전체가 불안, 공포, 혼미 상태에 빠졌다. 지진 재해와 원자력 발전 사고의 피해 규모조차 모르고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모르더라도 일단 모이자, 이야기 할 장소를 만들자고 생각한 것이다.

제1회 <원자력과 사회>(2011년 4월 23일)에서는 고바야시 케이지(小林圭二, 전 교토대 원자로 실험소 강사), 우츠미 히로후미(内海博文, 오테몬가쿠인대학 교원), 하마니시 에이지(濱西栄司, 노트르담세이신 여자대학 교원)를 불러 원자력 연구자와 사회학자의 대화를 통해 이번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사고에 대해 논의했다. 제2회 <지진 재해의 내셔널리즘>(2011년 6월 5일)에서는 도미야마 이치로(冨山一郎, 오사카 대학 교원), 이시다 미도리(石田みどり, 다문화 시민 네트워크 타카츠키)를 불러 지진 재해 직후 만연한 ‘힘내자 일본!’류의 담론과 재해지에 있었을 외국인의 상황, 원자력 발전 사고 속에서 도망칠 수 없었던 불가능한 선택의 문제 등을 논의했다. 제3회 <원자력 발전 문제와 프리타>(2011년 7월 10일)에서는 히라이 겐(平井玄, 평론가)을 불러 원자력 발전 사고로 만천하에 드러난 자본, 국가, 학문의 관계와 잠재적으로 이미 피폭 중인 프리타 노동자들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제4회 <동북지방으로부터 생각하는 일본>(2011년 8월 7일)에서는 아오모리 출신의 오노 료타로(小野遼太朗, 오사카 대학 학생)를 게스트로 지진 재해 직후부터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터져난 담론을 소재로 하여 지진 재해 이전부터 동북지방이 처해온 사회경제적 조건을 돌아보고 동북 지방과 도쿄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제5회 <히키코모리 후의 사회>(2011년 11월 6일)에서는 1995년 한신 대지진을 고베에서 체험하고 히키코모리와 관계되는 활동을 계속해 온 우에야마 카즈키(上山和樹)를 불러 지진 재해 직후 재해지에서 서로의 그저 살아 있음을 긍정할 수 있었던 관계성이 [고베]부흥 과정에서 사라진 일과 일본 사회의 제도적인 경직 문제를 거듭 논의했다.(http://www.ustream.tv/channel/cafe-commons)

또 공개강좌 <지진 재해 후의 사회를 생각한다>와 별도로 특별 강좌 7월 1일 마에다 토시아키(前田年昭, 잡지 <한(悍)>편집인)를 불러 <원자력 발전 집시>(일본 각지의 원자력 발전을 떠돌아 다니는 유동적 노동자층을 호칭함)을 소재로 한 영화 <살아있을 때가 꽃인 거야 죽으면 그만이라니까당 선언(生きてるうちが花なのよ死んだらそれまでよ党宣言)>(모리사키 아즈마(森崎東) 감독)을 보고 논의하였다. 7월 9일에는 도쿄 신주쿠에서 독특한 인포메이션 숍 Irregular Rhythm Asylum를 운영하는 나리타 케이스케(활동가)를 불러 <공간×운동의 스타일>이라는 이름의 특별 강좌를 하였다.

이처럼 2011년의 커먼즈대학은 이전처럼 그저 모여 맥주를 마시고 잡담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실히 공개강좌를 하는 장소로 분주히 활동을 구성해 왔다. 참가자 수는 시의 적절했던 제1회 공개강좌가 가장 많아 약 100명을 기록하고, 그 외는 10~30명 정도에 그쳤지만 지금까지 커먼즈대학의 규모를 생각하면 모두 충분히 성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감정

공개강좌의 경우 논점을 정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보통의 커먼즈대학(금요일의 밤)에서는 대부분 잡담으로 번졌기에 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도 수시로 다른 화제가 되곤 했다. 잡담도 잡담만의 맛이 있지만 역시 특정 주제에 집중해 이야기 하는 장소도 소중하다고 느꼈다.

공개강좌에서는 특히 원자력 발전 사고를 중심으로 참가자들이 불안, 불만, 두려움, 당황, 분노 등 여러 감정들을 말과 함께 표현했다. [이렇다 할]사태가 드러나지 않는 원자력 발전 사고에 대해 안전하다고 확증하는 ‘어용 학자’의 담론도 위기적인 사태에 경종을 울리는 대항적 담론도 둘 모두 ‘무슨 무슨 시버트[sievert, 인체가 방사선을 쐬었을 때 받는 영향의 정도를 나타내는 국제 단위]’라는 전문 용어의 과학적 정확성을 둘러싸고 논의를 벌였다. 그러나 도미야마 이치로가 지적하듯 올바른 지식은 확실히 절실하며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압도적으로 불충분”한 것이다.(도미야마 이치로 ‘한한의 염’ <살아있을 때가 꽃인 거야 죽으면 그만이라니까당 선언>(모리사키 아즈마 감독)(「恨恨の焔—『生きてるうちが花なのよ死んだらそれまでよ党宣言』(森崎東監督) 『임팩션(インパクション)』 181호, 2011년, 158쪽)

과학적인 올바름을 추구하는 언어에서 넘쳐나는 원한, 분노, 절망과 그 밖의 다양한 휘말림의 감정이 있었다. 그러한 감정은 공적 장소에서 발화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사적 공간에서도 감각의 미세한 차이가 관계에 균열을 낼 수밖에 없어 오히려 표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느 참가자는 원자력 발전 사고가 애당초 불안했지만 그 불안을 직장에서도 꺼내지 못하고 가족 간에도 꺼내기 어려웠던 경험을 토로했다. 내부 피폭에 대한 불안 때문에 식품 산지를 신경 쓰자니 지나치다는 소리를 듣고, 원자력 에너지에 의존하는 것이 불안하다고 하면 전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한 소리 듣는다. 실제로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 해도 그런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하다보면 불안을 입에 담는 것이 어려워진다. 또 탈원자력 발전, 원자력 발전 반대의 생각을 공유한다 해도 아직 후쿠시마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들의] 도망치려도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을 살피지 못하고 정부와 전력회사를 비판하는 것에 대한 위화감 때문에 말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혹은 ‘오염’이라고 하는 표현에 대한 위화감도 [있었다].

아마 똑같이 자신의 불안을 말하더라도 불특정의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사적인 관계 속에서 ‘푸념’,‘불평’이라 정서적으로 치부되는 것도 미지의 타자와 함께 있는 장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얼마간의 공공적 성질을 띤다. 다만 공식화 된 공공의 장소에서는 원래 감정적 커뮤니케이션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문제가 있다. 필요한 것은 공공의 성질을 띠면서도 비공식적(informal)인 모임의 장이다. 거기서 표현된 감정은 상대가 듣고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각자 듣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다고 해도) 공통의 경험이 된다. 자타의 감각도 다시금 그곳에서 변용되어, 미지의 타자와 엮이는 사회적 관계성으로 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커먼즈대학의 공개강좌는 ‘강좌’라는 명칭과 함께 실로 대학과 같은 장이기도 했지만, 제도화된 대학과는 달리 감정을 배제해 과학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논의가 아니라 반대로 감정적 커뮤니케이션이 흘러넘치는 장을 만든 듯 했다. 참가자 몇 사람에게서 원자력 발전 사고를 둘러싼 불안과 두려움에 대해 일상생활에서는 입에 담지 못한 채 누군가와 감정을 표현 해 공유할 장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위기적인 사태 속에서 감정을 공유할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채 고립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다.

4 지진 재해와 사회

일본 사회에서는 1970년대 이후 사회운동이 후퇴해 대규모 데모 행진이나 대중집회가 좀처럼 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사고의 피해가 명확해지는 가운데 ‘탈원자력 발전’, ‘원자력발전반대’를 외치는 수천에서 수만 명 규모의 큰 시위들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사고를 계기로 원자력 발전에 대해 공부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말하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일본 사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원자력 발전에 대해 생각하기를 피해 살아가는 일이 가능했다.

공개강좌의 논의를 통해 알게 된 것은 현재 일본 사회의 위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지진 재해 이후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하여] 지진 재해 전부터 계속되어 온 위기가 지진 재해 후에 간신히 가시화 된(혹은 표면화한) 것은 아닐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 또한 원자력 발전 사고가 상징적이지만, 원자력 발전소가 아무리 사고를 내지 않고 안전하게 운전되었다 해도 현장에서 일하는 작업원들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피폭돼 왔다. 1970년대 하청 노동자로 원자력 발전소 정기 점검 작업에 잠입 취재한 호리에 쿠니오(堀江邦夫)의 르포르타주에 의하면, 안전하게 운행되고 있는 평상시의 원자력 발전소에서도 현장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은 거의 보호되지 못하고, 사고가 일어날 경우 은폐 되는 등 사원과 하청 노동자 사이에는 명확한 차별적 대우가 있었다(호리에 쿠니오 『원자력 발전 노동기』 고단샤, 2011년[1979년]). 원자력 발전에 의한 방사능 노출의 피해는 사고 후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운전될 때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위험을 특정한 지역과 계급에 밀어 넣은 채, 이 사실을 은폐 한 곳에서 풍부하고 쾌적한 도시적 생활이 영위돼 온 것이다.

수만 명 규모의 데모가 일어나는 한편 일본 정부는 원자력 발전 사고 ‘수습’을 선언하고, 전력회사는 정지중의 원자력 발전의 ‘재가동’을 요구해 산업계 역시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 이 괴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아마도 이 또한 지진 재해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일본 사회의 문제이리라. 누구나 이상하다 여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운데 개선이 미뤄져, 정신을 차려보면 사태는 한층 더 악화돼 있다.

위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사회 본연의 자세 그 자체를 다시 질문해야만 한다. 전후 사회사의 문제로서 되물을지 혹은 보다 크게 근대사회의 문제로서 되물을지 혹은 더 크게 문명의 문제로 되물을지. 어쨌든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 스스로의 발자국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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