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노동잔혹사

사교육

- 김민수(청년유니온)

#1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20~25조 수준이다. GDP만 놓고 무식하게 비교해 보면, 한국에서 생산되는 가치의 2~3% 정도는 사교육 시장에서 발생한다. 사교육과 같은 규모의 산업이 50개라면, 대한민국의 인류는 50가지 산업에서 발생하는 상품과 가치만을 소비 해야한다. 아이패드와 소셜 네트워크, 포스트 모던을 논하는 오늘날에 부합하는 경제 시스템은 아니겠지만…

가계 소비 지출 중 사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은 15%에 근접한다. 350만원을 벌면 4~50만 원을 학원에 쓴다. 이 돈 아껴서 가족들끼리 외식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그래도 남으면 세금을 좀 더 내서 ‘무상의료’도 누려 볼 법 한데, 역시 말이 쉬운거다.

아이러니 한 것은 사교육 시장의 소비자였던 청소년들은, 19세 딱지를 벗자마자 사교육 시장의 공급자로 전환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재력으로 ‘사교육 은총’을 입은 청소년들은, 청년이 되어 다른 부모의 재력을 수혈 받는다. 상속을 제외하고, 세대 간의 부가 이전되는 거의 유일한 산업이 아닐까 싶다. (커피숍 파트타이머가 죽어라 일해 봤자, 도시근로자의 평균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점에서, 부모세대(사장)의 부가 자식세대(파트타이머)에게 이전했다고 평가할 순 없을 것이다. 어쨌든 돈을 더 많이 버는 건 부모세대이므로.)

인문계열 출신 대학생과 대졸자의 상당수가 첫 직장으로 ‘학원 강사’의 라벨링을 획득하고, 과외시장의 규모가 3조 원 수준이니, 이 쯤이면 장난이 아니다. 20대 사교육 종사자의 평균적인 시급은 1~2만원으로 결정 되는 데, 문제는 동년배 파트타이머의 시급이 4580원이라는 데에 있다. 후자보다 전자의 청년이, 청소년 시절에 더 많은 양의 사교육을 받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0대 초,중반의 청년이 느끼는 양극화의 깊이는, 과외와 바코드의 간극 만큼이나 절망스럽다.

물론, 더 많은 청년들이 사교육 시장에 종사하여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 시키자는 결론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양성을 전제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시급 8000원’의 산업과 경제 시스템, 첫 직장을 설계하지 못한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실패라 할 것이다.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이 숙제는 새로운 세대의 몫이기도 하다.

#2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이며, 이 단어의 철학을 반영한다면, 경제 시스템은 수요자의 요구(needs)를 바탕으로 설계하는 것이 맞다. ‘옳음’이 아닌 ‘이윤’으로 작동하는 시장이 잘못 된 방향을 잡았다면, 국가가 보이는 손으로 제어해야 하고.

사교육 시장의 수요자인 청소년의 요구는 무엇일까? 현재의 시장은 청소년의 Needs가 정확히 반영 되어 있을까?

공교육 과정 따라잡기, 수학능력 향상을 ‘청소년’의 needs로 분석하는 것은 대단히 나이브하다. 사교육의 상당 부분이 ‘선행학습’이라는 점에서, 학업 성취도가 높을 수록 더 많은 사교육을 섭취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사교육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과잉 소비되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명문) 대학교 진학을 needs로 분석하여도, 변별력은 마땅치 않다. 학력 간 임금 격차는 입증 되었으나(고졸 – 대졸), 학벌 간 임금 격차를 입증한 자료는, 문외한 탓인지 접하지 못했다. 대학 입학 정원이 고교 졸업자의 숫자를 뛰어 넘는 조건에서, 명문대 진학을 위해 사교육에 베팅하는 것은, 별로 효과적인 투자가 아니다. (지금의 조건에선, 사교육의 도움 없이 대학에 들어가고 남은 차액을 ‘현금화’해서 장롱에 보관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새로운 사회를 설계할 정치와 운동에 환원하시는 것 또한, 장기적으로는 나쁘지 않다. (응?))

‘명문대 진학 = 성공적인 사회진출’이 성립하던 시절, 막강한 재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사교육 시장이 성립 되었고, 이를 지켜 보던 개미 투자자들은 줄줄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는 형국이다. 앞선 투자에서 재미를 봤던 이들은, 이제 ‘유학 시장’을 개척하여 조중동을 끼고 주가를 조작하고 있으니, 개미들 다리가 찢어진다.

헛소리가 길었지만, 현재의 사교육 시장은 청소년들의 요구와 상관 없이, 일부 특권층과 공급자에 의해 설계 되어 있다. 살인적인 학습노동으로 월드클래스의 학업성취도를 확보하고 있는 대한민국 청소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사교육에 대한 요구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0.1점의 변별력을 위해 GDP의 2%를 소진하다니.

미친 학습과 미친 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학생들에게, 굳이 ‘사교육’이 필요하다면, 이는 ‘학업’의 영역이 아닌 ‘치유’의 영역일 것이다.

#3

확언컨대, 지금 청소년들의 요구는 ‘교육을 통한 학업성취’가 아닌, ‘대화를 통한 치유’이다. 부모 세대가 읊어주는, 자고 일어나면 까먹을 죽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선배 혹은 친구 세대와의 교감과 소통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치유 되어야 한다.

폭력과 상처, 그리고 죽음을, 얼마나 더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정당화 한 채. 청년들은 ‘안철수’와 ‘김난도’를 통해 치유 받고, 결국엔 역사의 광장에 모였다. 청소년에게도 위의 알고리즘을 적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청년들이 후배들의 ‘안철수’가, 멘토가 되어준다면 어떨까.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느니, 대학 가서 놀라느니 하는 꼰대의 음성을 내리는 대신, 동시대의 고통을 공유하는 선배와의 소통을 주선하는 것은 어떨까. 틴탑과 비스트의 멤버 구성을 알고 있는, 스타크래프트를 더 잘하는 선배와의 교감이, 미래 세대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몇몇 지역아동센터에서 자체적으로, 혹은 장학금을 필요로 하는 대학생을 동원하여 지자체 별로 ‘멘토링 사업’이 진행 되고 있다. 한 쪽은 재원과 인력이 부족하여 난항을 겪고 있고, 다른 한 쪽은 ‘멘토 교육 시스템’과 연속성을 갖추지 못해 부실함을 드러내고 있다. 시행착오려니 생각하고, 제대로 해보자.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청년 멘토들에게 과외비 수준의 임금을 책정할, 국가 권력의 의지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다. 과외에 사용하던 사교육비를 ‘세금’이라는 사회적 비용으로 용인할 수 있는 부모세대와의 합의가 더해지면, 완성 된다.

(주 1회 만남을 기본으로 하는 멘토링단(교사 1인당, 월 30만원)을 설계하고, 청소년 1000명을 대상으로 집행한다면 연 4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 1000개의 지역아동센터에 ‘멘토링 담당 교사’(월 120만 원)를 추가 배치한다면 연 13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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