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진시황(秦始皇)과 한고조(漢高祖)의 거리

- 오항녕

# 경연(經筵)하는 날

방학을 맞아 두 곳에서 경연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나라의 대학은 지역에 사는 동네 사람들과 거리가 있다. 요즘 지역주민과 함께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기는 하지만 그건 공원으로서의 대학, 산책로인 대학이다. 그것도 진전이긴 하다. 무엇보다 대학과 지역의 분리는 대학의 ‘학문’과 지역의 ‘삶’의 분리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별로 연관이 없는 것이다. 전에 있던 민족문화연구원에서 한때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강좌를 기획한 적이 있는데, 역시 기획으로 끝났다. 그래서 한 번 올해는 대학 밖으로 나와 보았다. 전주와 인천 두 곳에서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시즌1) – 항우와 유방’ 강좌를 열었다.

이런 강좌를 나는 경연이라고 부른다. 원래 경연은 조선시대 국왕과 신하들이 모여 세미나를 하던 제도, 장소를 말한다. 예를 들어 《논어》《맹자》《사기》 등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장관, 비서들이 모여 《자본론》《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토론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비교가 불가능한 이유는 요즘 이런 일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경사(經史)를 공부하는 자리’가 경연이니까, 내가 전주, 인천 시민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리도 경연이다. 거기에는 유가(儒家)의 오랜 문제의식이 유전하고 있다.

원래 유가는 문명(文明)에 대해 숙명적인 느낌이 깔린 비극적 정서와 인문학적 통찰에 입각한 낙관주의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왕정(王政)이든 근대 민주정이든 그것이 콘트롤되지 않을 경우 폭군과 폭민을 낳는다는 시각과, 교육을 통해 관리되고 나아질 수 있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반면 노자(老子)나 그 후배들은 유가의 이런 노력을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애당초 문명은 콘트롤이 안 된다는 것이다.

                                                                                                   

# 말 위에서 차지할 수는 있어도

그러나 유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공자는 천하를 주유했다. 말이 주유천하지, 생고생을 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젊은 사람들이나 가르치겠다고 했겠는가. 맹자도 마찬가지였다. 맹자가 양혜왕, 제선왕을 만나 설득하는 과정이 곧 경연이기도 하고, 경연의 필요성이기도 하다. 현자(賢者)에게, 혹은 현자가 전해주는 성인(聖人)의 저술을 읽고 배우는 것이 경연이다.

때는 한나라가 초나라를 누르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했던 BC200년쯤, 흥미로운 일화가 있었다. 한 고조 유방은 패현(沛縣) 풍읍(豊邑) 촌사람이다.(전주를 이씨, 이성계의 고향이라는 뜻에서 ‘풍패지향’이라고 부르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작은 마을 관리였다. 10여년 전장에서 구르다가 한나라를 세웠는데, 당시 육가(陸賈)라는 학자가 《시(詩)》《서(書)》를 주며 공부를 하라고 말했다. 한 고조 역시 스스로 느낀 바 있었으므로 육가에게 배우기로 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공부는 습관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달 쯤 하던 한 고조는 책을 탁 덮으며 말했다. “더 이상 힘들어 못하겠다! 나는 글을 모르고도 세 척 칼을 들고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이깟 학문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육가는 말했다. “말 위에 올라 천하를 얻었다고 해서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居馬上得之, 寧可以馬上治之乎]”

                                                                         

#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실제

이번 강의를 하면서 사람들이 진시황을 폭군(暴君)의 전형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럴 만도 했다. 점술을 믿고 운석이 떨어진 고을 하나를 박멸한 일이나, 무덤을 만들고 그 일에 사역되었던 기술자, 인부를 아예 묻어버린 일 등을 보면 이해가 간다. 특히 후대에는 이른바 분서갱유, 그러니까 책을 태우고 학자들을 묻어버린 일로 폭군 진시황의 이미지는 극에 달했다.

그 이미지는 약간(!) 수정하고 싶다. 분서는 승상 이사(李斯)의 작품이다. 그는 진(秦)나라 기록이 아니면 모두 태워버리도록 했다. 《시(詩)》《서(書)》 및 제자백가의 저술을 가지고 있으면 군수 책임 아래 다 태웠다. 특히 모임을 만들어 《시》《서》를 가지고 세미나를 하는 자들이 있으면 저자거리에서 죽이게 했다. 없애지 않아도 될 서적은 의약, 점복, 식물 재배에 관련된 서적이었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의약, 점복, 식물재배’에 대한 서적만 남겼다는 말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서적만 남겼다는 말이다.

제국(帝國)은 문명의 집적 속에서 탄생한 결과이다. 맹자가 2백 년 전에 제국의 탄생을 예고하면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천하를 얻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도덕주의적 언표가 아니라 지극히 정책적인 언표이다. 5-8인 가족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 거기에는 꼭 ‘배움’이 들어간다. 사람들끼리 어울려 살 수 있는 배움, 학교. 요즘으로 치면 인문, 사회과학에 대한 소양이 필수적이란 뜻이다. 결국 진시황은 제국의 토대를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폭군이다. 이것이 앞서 육가의 말을 듣고 한 고조가 공부를 시작했고, 그 결과 오경(五經)이라고 경학(經學), 사마천이 《사기》로 대표되는 제국문명의 비전을 가졌던 한나라와 다른 점이다.

진시황이 저질렀다는 갱유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다. 진시황은 오래 살고 싶어서, 아니 죽고 싶지 않아서 방사(方士 도사)를 불러 신선의 약을 구해오라고 보낸다. 이 틈에 브로커, 사기꾼들이 끼어들어 방사를 자처하며 엄청난 재물과 인력을 진시황에게 뜯어내어 사라졌다. 한중(韓衆), 서불(徐市) 같은 자들이 그들이다.

선약은커녕 이들이 돌아다니면 진시황은 바보라고 험담까지 하고 다녔다. 화가 난 진시황은 함양에 있던 유(儒 지식인)들을 심문했는데, 이들이 살려고 서로 고발하다보니 법을 어긴 자가 4백 6십여 명이었다. 진시황은 모두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알렸다. 당시 장자(莊子)를 소유(小儒)라고 불렀듯이, 진시황이 죽인 유(儒)는 유학자가 아니라 도사(道士)를 말한다.

                                                                                           

# 대리출석, 딴 짓 …

경연은 공부뿐아니라 이어서 국무회의, 관계장관회의 등이 이어지기 때문에 소통의 마당이기도 했다. 또 모든 제도는 서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견제하는 체계를 동시에 갖는다. 그래야 유지되는 것이다. 왕정이라는 조건에서 경연은 그런 견제와 균형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므로 경연은 당시 사회가 그런대로 룰이나 상식을 지켜가며[保守] 굴러갔는지 어떤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경연을 안 할 거라면, 뭔가 대안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비전을 담은 대안. 없다면? 경연의 거부, 파행은 곧 무책임과 난장(亂場)으로 귀결된다.

첫째, 세조. 아예 경연을 담당하던 집현전을 없앴다. 그리고 자기가 배우는 게 아니라 가르치려 들었다. 그러니 온 몸이 아팠고 종기가 났다. 그가 말년에 피부병 등으로 고생한 것은 애매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을 많이 죽여서 벌을 받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체력 약화에 따른 면역체계의 이상이라는 게 나의 진단이다.

둘째, 연산군. 전무후무한 대리출석의 시조이다. 연산군은 경연에 나와 공부하라고 하니까, 자기가 가지 않고 내시(內侍) 김순손(金舜孫)을 대신 보냈다. 홍문관(집현전 후신)에서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우리 직책이 환관을 가르치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랬더니 자기도 나가고 싶지만 발병이 나서 못 간다는 것이다. 이 연산군, 잔치에는 열심히 나갔다. 종종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을 때 입었던 피 묻은 적삼을 보고 연산군이 돌았다고, 그래서 폭군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니다. 피 묻은 적삼을 본 것은 연산군 9년, 대리출석을 시킨 것은 연산군 1년이다. 원래 싹수가 노랬던 자다.

셋째, 광해군. 요즘 세상에 어울리는 인물이라 그런지 상종가를 치고 있는 국왕이다. 조선시대와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사람, 재위 기간 중 경연에 나온 것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주로 추국청(推鞫廳 반역사건 심문하는 곳)에 나가 있다. 원래 사건이 생겨도 담당관이 조사하고 국왕에게 보고하는 게 상례이다. 그런데 광해군은 친국(親鞫), 자기가 직접 심문하기를 즐겼다. 오죽했으면 사관(史官)이 아프다고 경연에는 나오지 않으면서 어떻게 밤새 친국하는 데는 열중이었느냐고 비웃었을까.

그나저나 한 고조 이후 여태후(呂太后)를 중심으로 조정에서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진행된다. 그런데 한나라는 모처럼 평화를 맞고 농민들도 군대에 동원되는 일 없이 안정된 시대를 살아갔다. 진시황이 무덤, 순행, 축성, 원정에 수시로 동원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한 고조와 진시황의 거리가 원래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허나, 호리지차 천리지별(毫釐之差 千里之別), 터럭만큼의 차이가 천리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 틈을 구별하는 눈, 그것도 이 땅에 사는 남자의 자격, 이 아니라, 인민의 자격이다.

응답 2개

  1. […] | 수유칼럼 | 진시황(秦始皇)과 한고조(漢高祖)의 거리_오항녕 […]

  2. 말하길

    분석, 갱유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맥락이 있군요. 잘 배웠습니다. 경연에 대해서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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