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망해 아파트

- 홍진

전쟁 같은 사랑, 아니 진짜 전쟁처럼 터지던 폭죽들도 춘절 연휴와 함께 저물어 가고, 바야흐로 나는 이사 중이다. 짝꿍이 먼저 한국에 들어가게 되어 나는 좀 더 작고 많이 싼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물가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지만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비교적 비싼 상권 지역에도 틈새시장이 있었으니, 그 허름한 건물은 이름 하여 망해아파트. 바다가 보여서 망해望海다.

처음에는 고급 빌딩을 표방하여 지었을 것 같은 팔 층짜리 건물은 이미 낡은지 오래다. 전기, 가스, 수도가 끊긴 채 왠지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이 산다는 유치한 소문들을 뒤로 하고, 집을 구경하러 갔다. 콘크리트 속살을 시커멓게 드러낸 건물 일층의 빈 상가들은 춘절을 위한 폭죽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멈춘 지 오래된 엘리베이터 앞에는 낡은 자전거들이 줄지어 있다.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한 팔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왠지 등반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알고 보니 집들이 전부 복층 구조라 실제 높이는 십 이층 정도 된단다. 계단을 막 올라와 숨을 헐떡거리는 통통한 주인 양반은, 조금만 기다리면 엘리베이터가 고쳐질 거라고 수줍게 변명 하지만, 어딘가 민망한 듯 내 눈을 피하며 조그만 목소리로 한 얘기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전기세를 전기공사가 아닌 405호 아저씨에게 낸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달 정액제로.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본주의가 공식적으로 관리를 멈추고 전기와 가스가 끊긴 건물에, 주변 시세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사람들이 요령 있게 살고 있다.

누군가 반쯤 버린 물건을 주워 쓰는 데는 싸움이 필요 없다. 뉴욕이나 서울 같은 대도시에 비하면, 대련은 관리되지 않는 건물들이 많다. 심지어 바닷가 근처에 지어진 (당초의 목적이 불분명한) 소라 모양의 초록색 폐건물에도 바람을 막는 비닐이 꼼꼼히 붙어있고 생활의 상징인 빨래가 펄럭이곤 한다. 아직 적극적으로 막는 사람이 없다 보니, 점거나 스쾃이라는 단어는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이고 그저 삶에 자리를 내어준다. 하지만 망해 아파트에 엘리베이터라도 덜컥 다시 운행된다면 집세가 오를 것이며, 전기와 가스가 들어온다면 갈등이 시작될 것이다. 높은 굽을 신고 계단을 오르던 젊은 언니가 신세를 탓하며 한숨을 쉬게 만드는 어두컴컴하고 가파른 계단은, 그래서 내게는 사실 든든하고 아늑한 보호막 같다.

정치적인, 예술적인 점거 투쟁엔 종종 부랑자나 노숙인들이 함께 하지만, 다른 생각과 필요, 절박함의 양상으로 인해 갈등을 빚기도 한다. 거기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보다 과감하게, 자본과 권력에게 치명적인 시간과 장소를 빼앗는 적극적인 점거자들에겐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생활이 너무 피곤해서 규칙을 깨는데 에너지를 쏟을 수 없는 사람들은 그저 자본주의가 느슨해진 틈새의 빈자리에 궁둥이를 디밀고 조용히 살고자 한다. 그러다 모든 틈새를 갈고 닦아 살을 찌우고 외곽을 불려가는 부동산과 만나 전선이 생기고, 싸움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미리 걱정하진 말자. 점거는 그 의미와 가능성만큼 그 이후를 고민해야만 하지만, 소라 모양의 버려진 구조물이나 망해아파트에서의 삶은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묵묵히 계속된다. 만약, 그곳에서 떠나게 하더라도 어딘가에서 또 틈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버리는 게 있으면 많이 주워 둘수록 좋다. 반자본 넝마주의 선언.

낮에 길을 걷다가 피곤할 때는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든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저 수많은 (아마도 비어있을) 가정집 중에서, 내가 들어가 쉴 곳이 하나도 없다니. 좀 들어가서 조용히 쉬고 나오면 딱 좋겠구먼. 신앙이 없으니 교통정리를 못하는 절대자를 탓할 수도 없고, 결국 언젠가는 우리를 옮아 매는 여러 가지 규칙들과 싸우고 점거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부드럽게. 그런데 빈집에 들어가 쉬는 수준이 되려면 갈 길이 참 멀다. 우선 공적인 공간인 척 하면서도 뻣뻣하게 구는 공간들부터 자유롭게 빼앗아 오고 싶다.

쿵쾅거리는 이사 소음에 옆집 사는 왕여사가 허리에 레이스가 붙은 내복 차림으로 나와 인사를 한다. 왕이라는 성씨와 파마머리, 내복이 참 전형적으로 정겹다. 외국인 입주자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 둔 것 같은 중국 이웃이다.

“새로 왔냐? 필요 없는 물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누가 이 이웃들을 위험하다고 부를까? 대부분 동의할 이야기지만, 망해아파트 왕여사 보다는 비밀번호와 경비아저씨, 카드키로 운행되는 엘리베이터 속에 꽁꽁 숨어서 짜장면 배달원들을 귀찮게 하는 고급 아파트의 주민들이 훨씬 위험하고 이상하다. 하긴. 고작 관리가 안 되는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면, 뭐 그것도 괜찮다.

응답 2개

  1. 말하길

    아,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어요. 디디가 온다고? 꼭 연락하라고 해줘요. 왕여사,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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