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살아있는 농담의 화신, 박정근을 석방하라!

- 황진미

<김일성 만세> (1960)

김수영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박정근은 1988년생이다. 88올림픽이 열렸던 던 해, 내가 대학에 들어갔던 해에 태어났다. 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후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몰락’ 했다, 고 다들 판에 박힌 듯 말한다. 90년대는 탈이념의 시대였고, 모두가 가벼워지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했다. 그래서였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이 많이 읽히기도 했었지. 문화의 시대, ‘벨 에포크’의 시대는 1997년 IMF외환위기를 반환점으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빈곤과 이념의 시대로 돌아섰지. 누구는 알고, 대부분은 몰랐던 일들. 해고와 파산과 철거와 추방이 다반사로 일어나도, 누구는 알고 대부분은 몰랐다. 정치가 민주화된 탈이념의 시대였으니까. 국가보안법은 있으나 없으나 아주 소수에게만 문제가 되고, 대부분에겐 문제가 안 되었으니까. 국가보안법이 문제가 되는 ‘종북 좌파’는 대단치도 않고, 심지어 너무 ‘구려서’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았으니까.

#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11년 9월 21일, 24세 박정근은 트윗 계정 @seouldecadence 으로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지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가게와 집이 압수수색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잠시 피시방으로 나왔고 가게 하드는 현재 복사중 입니다. 제방에 있는 몇몇 자료들은 압수되었습니다. 핸드폰도 압수되었습니다.” 라는 말이 타전되어 왔다.

대부분은 장난인줄 알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seouldecadence 라는 계정의 트윗을 위아래로 검색해본 사람들은 장난스러운 말이 많아서 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박정근이 올린 7만여 개의 트윗 중에서, 우리민족끼리 @uriminzok 계정의 트윗을 RT한 트윗이 여러 개 있다는 이유로, 경기 보안수사대에서 박정근의 집과 운영하던 사진관에 압수수색이 들이닥친 것이다.

박정근은 사진가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동네 사진관을 2007년부터 물려받아 운영하는 사진관 주인, 영세 자영업자 이다. 박정근 자신은 아버지의 사업체와 직업을 그대로 물려받은 자신을 김정일의 세습에 빗대 자신을 ‘청년대장 박정근 장군’이라 불렀다. 물론 이것은 김정일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자신에 대한 자조일 수도 있고,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박정근의 아버님은 통일부에 허가를 받아 북한의 사찰(寺刹)등을 사진 찍으러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 통일부에서 나온 입국허가증과 북한 관련 책자가 몇 권 있었다 한다.

# 영화 <北촌방향> CD와 ‘사회자’란 명찰을 압수수색?

집과 사진관에 들이닥친 경찰들은 ‘북’이라는 글자가 써진 CD는 다 가져갔다. 심지어 ‘북촌방향’ 플레이어까지 유심히 보고는 가져갔단다. 그래 그 홍상수 영화 <북촌 방향> 말이다. 조국교수의 책 <진보집권플랜>도 가져갔단다. 현상안한 필름과 메모리 카드도 가져가고, 휴대폰도 압수해갔다. 어떤 포럼에서 사회를 보면서 만들었던 ‘사회자 박정근’이란 종이로 만든 명패도 가져갔단다. 왜? ‘사회’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으니까. 박정근은 ‘사회’당 소속 활동가이기도 하니까. 사회당이라, 한국의 정치지형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은 다 안다. 군소정당인 사회당은 ‘반자본주의와 반조선노동당’을 표방한다. 즉 가장 원초적인 반북좌파이다.

박정근은 사회당 서울시 당 연대 사업국 비상근 당직자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뭐 거창해 보이지만, 사회당 친구들은 박정근을 전 ‘덕후’ 위원회 위원장이라고도 부른다. 오덕후(오타쿠)말이다. 혹시 집회현장에서 ‘혁육동’이란 깃발을 보셨는지? ‘혁명적 육식주의자 동맹’이라는 요해불가능한 이름의 이 단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원색적인 깃발이나, 종이박스를 찢어 ‘혁명적 육식주의자 동맹’ 올 한자로 쓴 피켓을 들고 다녔다. 지금은 해체된 이 괴조직과 인적 구성이 상당히 겹치는, 대단히 래디컬하면서도 아나키해 보이는, 스스로를 ‘잉여’라고 칭하기도 하는 일군의 사회당 소속 청년들이 박정근의 친구들이다. 물론 박정근의 친구들이 모두 사회당 소속인 것은 아니다. 이들 중엔 진보신당 소속도 있고, 아무 당에도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박정근의 친구들은 트윗에서 박정근의 수사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박정근이 찍은 ‘데까당스’한 느낌의 프로필 사진을 변형한 플픽을 사용한다.

박정근은 고등학생 때 ‘비싼 트로피’라는 인터넷레이블(음반사+기획사)을 운영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라…범상치 않은 젊은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일설에 의하면 중학생 때부터 집회에 나가고, 모 게임 펜카페를 운영하면서 사장님 소리를 들었다는 말도 있다. 고3학생 박정근이 운영한 ‘비싼트로피’라는 레이블은 주로 컴플레이션 앨범이나 재발매를 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인터넷에는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박정근은 악기는 다룰 줄 몰랐지만, 거의 대부분의 앨범 아트웍을 혼자서 다 할 정도로 재주가 많았고, 공연기획 등에도 상당한 재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박정근은 수능시험을 쳐서 서울 소재의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였지만 중퇴하고, 가업이자 어렸을 때부터 해오던 일인 사진가를 직업으로 삼는다. ‘비싼 트로피’의 활동 덕에 박정근의 친구들 중에는 음악 하는 친구들이 많다.

사진가가 된 이후에도 파렴치 악단 등 뮤지션의 사진 작업을 했다고 한다. 2010년 홍대 두리반은 박정근을 비롯한 재야 예술가(?) 혹은 ‘잉여’와 좌파 활동가들과 인디밴드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문화용광로가 된 곳이다. 박정근은 그곳에 연대하면서 ‘소비에트 사진사’ 등의 사진 강의를 하였고, ‘두리반 1주년 기념 행사’ 기획 등을 맡았다. 두리반에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지금 박정근을 후원하는 인터넷 카페, <박정근을 격하게 포옹하는, 박격포>를 운영하는 피코테라 역시 두리반에서 사귄 친구이다. 박정근은 명동 마리에도 왔었고, 강남구 포이동판자촌 주거복구 공대위 활동을 하였고, 반값등록금 집회와 홍대청소노동자 농성 투쟁에 연대하였다. 또한 희망버스에 오르기도 하고 각종 집회와 시위에 참석하였다. 뭐 특별할 건 없다. 그런 사람이 어디 박정근 뿐이랴.

# 하필이면 여친과 헤어진 날, 압수수색을 당하고…

문제는 블로거이자 트위터리안인 박정근의 온라인상의 활동이었다. 경찰은 9월 21일 압수수색에 이어 다섯 차례에 걸쳐 경기남부보안 수사대로 불러 조사를 벌였다. 암사동에서 수원까지 1시간 반이 걸렸고, 조사는 6시간씩 계속되었다. 조사를 받는 날은 가게 문을 닫아야 했고, 조사는 문제가 된 트윗 하나 하나를 지목하면서“네가 올린 트윗이 맞냐? 왜 이런 트윗을 올렸나?”라는 질문을 계속 받는 것이었다. 박정근은 조사에 충실히 응했다. 그러나 그 스트레스는 온몸으로 느껴졌다. 박정근은 9월에 압수수색을 당한 이후 경찰이 들이닥쳐 자신의 물건을 헤집은 자신의 방이 ‘정남이가 떨어져서’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한 달간 제 집을 놔두고 친구(피코테라)의 방에서 기식을 하였다고 한다. 경찰의 ‘손을 탄’ 물건에 대해서도 정남이가 떨어져서 자신의 대형 필름을 일부러 훼손하기도 하고, 기기를 바꾸기도 했다고 한다.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는 서양 속담처럼, 하필이면 1년간 사귀었던 한국계 미국인인 여자친구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돌아오는 날, 압수수색이 들이닥쳤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연인과의 이별과 경찰의 압수수색이라는 폭력을 동시에 겪은 예술가의 영혼은 깊은 내상을 입었다. 박정근은 신촌의 정신과의원에서 “급성스트레스 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박정근은 약기운에 정신이 나른해지는 것과 약에 의존되는 것이 싫다는 심정 등을 여기저기 글로 남기기도 했다. 머리가 현저하게 빠졌고 급격히 살이 쪘다.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박정근은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내용과 정부에 대한 조소가 섞인 트윗을 계속 했으며, 경찰조사의 표적이 된 행위인 북한계정을 리트윗하는 행위도 멈추지 않았다. 진보 매체들과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 행위도 하였고, <뉴타운 간첩파티>에 함께 했다. <뉴타운 간첩파티>(박정근 에디션)는 사회당 연대국장 김슷캇이 박정근 사건에 대한 항의차원에서 기획하여, 12월 3일 대한문 앞에서 연 공연이다. 행사명은 2010년 두리반에서 인디밴드 중심의 공연을 다룬 독립영화 <뉴타운컬쳐파티>를 패러디하였고, 포스터는 국정원이 만든 도안을 패러디하였다. 인터넷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볼 수 있다. 밤섬해적단은 “김정일 만세, 만세, 만만세”라는 노래를 불렀고, “혁명기도원”퍼포먼스에서는 모세와 예수를 혁명가로 명명하는 기도를 바쳤다. 박정근은 6m짜리 플랭카드를 걸고, 삐라를 만들어 뿌렸다.

# 청년대장 박정근, 구속됐습네다

2012년 1월 11일 검찰은 박정근의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다. 박정근에게 날아든 서류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수원지방검찰청 공안부검사 문현철, 부장검사 김영규, 적용법조 : 국가보안법 7조 1항, 5항

범죄요지 “피의자는 2010. 3. 21. 트위터에 ‘seouldecadence’ 라는 아이디로 계정을 개설하여 북한 조평통에서 체제 선전,선동을 위하여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 트위터, 유튜브 등에 접속, 이적표현물 384건을 취득,반포하고, 북한 주의,주장에 동조하는 글 200건을 작성 팔로워들에게 반포하였으며,학습을 위하여 이적표현물인 북한 원전 ‘사회주의문화건설리론’을 취득 보관함.”

박정근은 구속영장청구와 영장실질 심사 소식을 접하고, 분열증적으로 갈팡질팡하는 트윗을 여러 개 남겼다. “나는 검찰을 낚는 어부입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검찰 약이나 올리자, 김정일 만세다” 등등.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구속영장 신청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설마 하는 마음과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엇갈렸다. 실제로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급증하여서, 2007년에 39건이 수사되고 36건이 기소되었던 것에 비해 2010년에는 150명이 수사를 받고, 60명이 기소되었다. 2011년 8월에 취임한 한상대 검찰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종북 척결을 외쳤고 이른바 ‘왕재산’ 사건이라는 소설 같은 국가보안법 사건이 터지기도 했으니까. 그렇기는 해도 누가 봐도 박정근의 트윗이 장난인줄 알 텐데, 진짜로 구속시키기야 하겠어? 그러나…저녁 7시쯤 나온 영장실질심사 결과는 ‘진짜로 구속’이었다. 그렇다, 2012년 1월 11일 저녁 7시, 박정근은 세계최초로 트위터에서 리트윗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박정근의 행위는 트위터에 다 있으니, 증거인멸의 우려도 없고, 암사동 조광사진관이라는 주소지도 분명한데다 5차례의 조사에 성실히 출석하여 도주의 우려도 없는데, 왜 구속이 필요하단 말인가? 검찰은 재범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재범, 즉 또 우리민족끼리 계정의 글을 리트윗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대체 우리민족끼리라는 계정에 어떤 말들이 있기에 그것을 계속 리트윗 할까봐 구속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할까?

“리명박 역도는 그렇게도 집요하게 붙들고 놓지 않는 <대북정책>과 함께 머지않아 력사의 무덤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등등. 사실 북한계정의 저 말투는 흉내내기도 힘들 정도로 유니크한 ‘진맛’이 있다. 박정근은 저와 같은 북한 식 말투를 패러디하여, “평양 랭면” 운운하는 말들도 트윗 하였고, 이따금 심드렁하게 북한을 조롱하는 말들도 트윗한 바 있다.

# 농담을 변명하는 것은 농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구속 상태에서의 조사까지 총 6차례의 조사에서경찰은 박정근에게 NLPDR을 아느냐, 북한 계정을 리트윗 한 것은 그 주장에 동조해서이냐, 등을 집요하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근은 자신이 ‘반북’임을 주장하지 않았고, ‘반북’트윗 등을 증거로 제출하지 않았다. “왜?”라는 질문에는 “그냥 장난이었다”라고 답했다. 내가 친북인지 반북인지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정근은 1월 17일 구속상태에서 발표한 이명박 대통령 각하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그 이유를 “농담을 변명하는 건 농담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 아니라, 그렇게 하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내가 친북이든 반북이든 “나에겐 농담할 자유가 있으며, 사상검증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박정근은 수원남부경찰서에서 수원구치소로 이감되었다. 1월 20일 법원의 구속적부심사는 기각되었고, 총 4차례의 검찰조사 끝에 1월 31일 정식으로 기소되었다. 검찰은 4차례의 조사로 진짜 문제가 될 만한 것들만 가려내었다는 건지, 숫자를 좀 깎아주어 “96건의 게시물을 리트윗하고, 이적표현물 133건을 게시한 혐의”라고 한다. 그리고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뭘 반성해야 할까?)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앰네스티는 곧바로 성명을 내고, “한국 정부는 즉각 박정근을 석방해야 한다”고 밝혔다. 샘 자리피(Sam Zarifi) 국제앰네스티 아시아태평양국장은 “박정근 사건은 국가 안보에 관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정부가 풍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 따른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지적하며, “평화로이 의견을 표현하는 이들을 구속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게다가 박정근은 북한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온 사회당의 당원”이라며 기소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한국에서 이렇게 터무니없이 기소되는 사례는 박정근에 국한되지 않는다”며 “너무 오랫동안 한국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기본적 자유를 제한하고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시민사회에 재갈을 물려왔다”고 덧붙였다.

박정근 사건의 압수수색과 구속 당시부터 관심을 보여 오던 외신들도 잇달아 논평을 내놓고 있다. 오히려 국내 언론들은 거의 관심이 없다. 내가 참석했던 구속적부심사를 하루 앞두고 열린 박정근 석방촉구 및 기자회견에도 알자지라 통신원만이 취재를 왔었다.

그래도 2월 5일 새로 개점한 두리반에서 열린 박정근을 위한 바자회에는 트위터 등을 통해 알고 온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정동영 의원도 다녀갔다고 한다. 이날 바자회의 제목은 “농담도 못하는 바자회” 였다. 그곳에서 박정근의 옛날 여자 친구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친구들은 박정근을 각자 다르게 추억한다. 2010년 두리반에서 박정근을 알게 되었다는 밀사는 “으흐~으흐”하는 웃음소리로, 피코테라는 “사케, 회, 빅맥을 좋아하던 친구”로, 아이디를 밝힐 수 없는 누군가는 “가슴만지게 해 주세요”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졌다가, 썰렁하면 곧바로 분위기를 싹 바꾸었다는 말 등으로. 예민함과 찌질함과 단단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박정근.

여러분의 유일한 친구, 청년대장 박정근은 말한다. “…아직 저는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해야 할 사랑도 많고 각하께서 일자리를 잘 창출해주시면 회사에 입사할 능력과 의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한 성욕감퇴도 어떻게든 기필코 해결해야 합니다. 에리카 김 같은 멋진 여성을 만나 일생의 사랑을 해보고도 싶고, 내곡동 같은 천혜의 자연으로 둘러싸인 멋진 녹지 안에 집을 짓고 거스 히딩크에게 제 자식을 소개해 주고 싶기도 합니다….” 물론이다. 25살 청년은 당연히 그런 것을 꿈꿀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88년에 대학에 들어갔던 중년의 나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처럼 재미난 농담을 할 줄 아는 젊은 예술가와 농담 트윗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성욕증진을 꾀하고 싶을 뿐이다.

P.S 1. 2월 7일 보석을 신청했지만 보석허가는 판사의 재량이라 결과는 알 수 없다고 한다.

2. 3월 9일 첫 공판이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다.

3. 소셜펀치 등으로 박정근을 후원할 수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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