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사회는 인간을 고분고분한 노동자로도 만든단다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앞에서 자본이나 권력이나 명예는 서로 교환될 수 있으므로 모두 한사람에게 몰려들어 하나의 의도에 따라 하나의 힘으로 작용하기 쉽다고 했었어. 가장 상징적인 예가 삼성그룹인데 네 때도 삼성 그룹이 지금처럼 잘 나갈지 모르지만 지금은 한국을 삼성공화국이라는 이도 있단다. 삼성 왕국이 떡값(명절 때마다 선물이랍시고 뭉치돈을 안겨줌)으로 수많은 판검사와 정치인과 고위관료들을 사육하고 또 목줄을 움켜쥐고 있어서 못하는 일이 없단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암과 같은 존재가 광고를 지렛대로 이용하여 돈의 힘으로 언론을 움켜쥐고 찬양가를 부르게 하여 명예 즉 존경을 독차지하려 하고 있단다. 많은 사람들이 삼성이 쓰러지면 우리나라가 쓰러진다고 믿고 한국의 운명이 삼성의 운명과 하나로 묶여 있다고 여긴단다. 사회적인 자산을 삼위일체로 독점하고 독재하고 독선하고 있는 삼성왕국에 도전하였다가 오히려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이 자꾸 늘어나니까 이 암 덩어리 같은 이 존재를 이제 감시하거나 비판하는 일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어.

 

이 세 가지 자산들이 소수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또 기왕에 빼앗긴 것을 도루 찾아 원래의 주인에게 골고루 나눠주어 평등사회를 이루려면 어찌해야할까. 입법권과 사법권과 행정권 이 삼권을 분리시켜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하듯이 맨 먼저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그 사이에 특히 돈과 권력 사이에 빈틈없는 분리 장벽을 세워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게 해야지. 그래서 이 셋 중에 어느 하나가 독재하거나 독점하거나 독선하지 못하게 만들어 이 셋이 하나로 뭉치려는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흩어져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특히 돈으로 권력을 매수하지 못하도록 하고, 각종 정책을 입안하여 법을 제정하는 국회 위원들이나 법을 시행하는 고위 관료들이 부정한 돈을 받지 못하도록, 부정부패를 막는 법을 빈틈없이 만들고, 처벌도 엄격하게 해야 한단다.

 

예로부터 빈틈없는 분리 장벽을 세우려고 노력해왔지만 그 장벽이 제구실을 못하여 아직도 평등 사회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 셋이 하나로 뭉치려는 힘 즉 인간의 끝없는 소유욕이 얼마나 강한지 알만 하구나. 우리나라는 이 법이 허술할뿐더러,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긴 격으로 한통속이 된 부패한 경제인과 정치인들과 고위관료와 법조인들에게 돈과 권력과 명예를 너무 많이 맡겨 두었어.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맡긴 것이 아니라 빼앗긴 거지. 그 결과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에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의 하나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회적 가치를 많이 차지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지.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것이 무능함으로 비춰져서 무시당하는 부끄러운 나라지. 사이코패스와 같이 남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능력이라는 그래서 좀비같은 자가 성공하는 나라인데 학교라고 다겠니. 아이들조차 공부를 잘하거나, 돈이 많거나, 말발이 세거나, 힘이 세거나, 친구가 많은 아이들이 그런 것을 잘하지 못하거나 갖지 못한 힘없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장난이라며 괴롭히고 폭해하는 아이들은 스스로의 지배력을 자랑스러워하고, 당하는 아이들은 보복이 두렵기도 하지만 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숨기고 있어. 가진 놈이, 힘센 놈이 지배하는 세상과 학교, 거꾸로 된 짐승들의 세상과 학교, 사이코패스와 좀비들이 지배하는 세상과 학교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구나.

 

그런데도 학교는 당하는 아이들에게 분노와 저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복종만을 가리키려드는구나. 학교라는 곳은 언제나 다루기 쉬운 아이를 만들려고 아이들의 주장과 개성을 억누르는 곳이란다. 군대에서 사병이나 교도소에서 재소자에게 조직적인 폭력으로 저항 의지를 꺾어 버리려고 자기주장을 짓누르거나 개성을 깎아내어 다루기 쉽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학교도 다를 것이 없단다. 교복을 입히고 머리를 염색하거나 기르지 못하게 하며 색깔 있는 운동화도 안 된다고 해. 하기 싫은 것만 ‘된다’ 하고, 하고 싶은 것은 분명치 않은 이유로 ‘안 된다’ 또는 ‘못 한다’고 해. 선생님에게 자기주장을 내세우면 건방지고 버릇없다고 징벌방이나 상담실이나 교무실에 가 있으라 하잖아.

 

이 모든 ‘안 된다’의 이유는 오로지 하나, 저항 의지를 꺾어서 고분고분한 아이들을 만들려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고분고분하고 값싼 노동자로 만들려는 과정의 하나이기 때문이란다. ‘안 된다’가 그렇게 많은 것은 부모들과 교사들과 교육 관료 등 기성세대의 소유욕과 권력욕과 명예욕이 한데 뭉쳐 아이들을 그들이 추구하는 욕망의 대열로 몰아넣고 개성을 짓누르거나 깎아내어 돈과 권력과 명예의 노예인 기성세대를 닮게 만들려는 과정이기 때문이야.

 

어쩌면 군대에서 사병들끼리 그리고 교도소에서 재소자들끼리 고참이 신참을 제도적으로 괴롭힐 수 있게 만드는 것과 똑같은 목적으로 힘센 아이가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해. 군대나 교도소에서는 사병이나 재소자들이 연대하여 근원적인 조직폭력인 군대나 교도소에 또는 국가에 저항하는 것을 막으려면 먹이사슬처럼 폭력으로 지배할 수 있는 수많은 단계의 계급을 만들어 맨 위에서 맨 아래까지 일직선으로 복종하게 만들려 한다. 그래야만 국가에서 군대의 조직화된 폭력을 의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거나 교도소에서 개인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니까. 물론 학교에서 한 반을 목적의식적으로 군대나 교도소에서처럼 철저한 폭력의 위계적인 조직을 만들려는 것은 아닐 거야. 그러나 교실 안에서 장난처럼 보이는 폭력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교사가 많다는 것은 학급의 담임이 학년 초에 불안정이 빨리 위계적인 질서로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지. 학교 폭력은 언제나 있었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교사들도 있지 않을까.

 

고분고분하게 만들기는 엄마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엄마 말 잘 들어야 이쁘지.’ 엄마의 말대로 따라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대변하고 대신하는 그의 주장 또는 의견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그러니까 아이 의견이 잘못됐더라도 아이가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설득하면서 아이 의견을 엄마가 따라줘야 아이를 진짜로 사랑하는 거지. 그러나 대부분 엄마들은 자신의 경험이 만들어낸 착한 아이의 모습을 따르라고 강요하게 마련이야. 그렇게 되면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일 수는 있지만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야.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이처럼 비뚤어진 사랑이 나타나는데 하물며 남남끼리야.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대할 때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착한 사람, 즉 고분고분한 사람의 태도를 강요한다. 고분고분한 것과 착한 것이 다른데도 힘 있는 사람은 고분고분해야만 착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래서 자기주장과 개성을 버리지 않으면 건방지다(작은 힘으로 큰 힘에 함부로 대들다.)고 꾸짖고 그래도 안 들으면 너 지금 반항하는 거냐고 묻는다. 지배자나 사용자나 어른이나 주인은 힘이 없는 약자에게 자기가 가진 힘을 과시하여 결국은 위협으로 굴복시킨다.

 

자본이 자본주의 세상을 축조하기 위해 교육은 아이들을 비슷한 벽돌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아이들이 색다른 핸드폰으로 자신의 개성을 연출하여 존재감을 드러내려했지만 그 핸드폰은 누군가가 돈벌이로 만든 것이지 그 핸드폰이 아이 자신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그것이 그 아이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야. 그 아이가 또 하나의 유행을 사들인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야. 그래서 색깔만 다른 벽돌처럼 잘 팔리는 생산 노동자와 소비자 즉 인간의 자기완성보다는 잘 기획된 상품으로 만들어내려는 보이지 않는 손이 무얼까. 처음에는 소유에 대한 부모의 욕망의 손이었지만 이제 차츰 욕망에 물든 나의 손이 나를 노동시장에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고자 애쓴다. 사용자가 요구할 만한 스펙은 다 쌓아놓은 다음 저항의지와 개성과 자기주장을 다 제거해버리고 언제나 웃으며 ‘예’하고 대답할 마음가짐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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