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보일기

어쩌다가, 어쩌다보니

- 라훌라(장애인활동보조인)

나는 어쩌다 활동보조인이 되었을까? 생소하고 낮선 이름의 다섯 글자가 나를 밥 먹고 숨 쉬게 하는 현재의 직업이다. 몇 가지 돈벌이를 전전했다. 노래방 웨이터, 편의점알바나 피시방, 이자카야 서빙 등. 짧으면 2주 길면 한달. 전전이라는 말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누구나 밥을 먹어야 하고 때로는 담배도 피워야했다. 밥도 밥이지만 멍청이처럼 바코드를 찍어대거나 저녁에 나가 새벽에나 들어오기 일쑤인 일보다는 뭔가 만족감을 얻고 싶었다. 활동보조 초창기에 알바로 잠깐 했었는데 전화로 해고통지를 받은 안 좋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랴. 사대보험도 되고 알바보다는 전문적인 느낌도 들었다. 많이 받아야 시급 5000원과 이새끼 저새끼가 만연하는 세상보다는 조금 수월할 듯싶었다. 막연하고도 막연하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사뭇 진지하고 간절함도 있었겠지만.

우선은 주변에서 활동보조인 일을 하는 친구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이의 말로는 곧 인금도 인상(제도 시행 후 첫!!)이 될 거고 내년부터는 활동보조인교육 비용이 두 배가 될 거라며 지금 하는 게 참 좋다고 말했다. 장애인 활동보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만원의 교육비를 내고 하루 여덟 시간씩 5일간의 기본교육을 수료해야 한다. 교육비는 10만원이지만 50%를 국가에서 보조해준다.(2011년 기준)

교육을 받기 전에 센터의 소개로 이용자1가 될(?)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소개시켜주는 사람의 말로는 장애인판에서도 유명한 사람이고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센터로 향했다. 얼떨결에 코디분의 말만 듣고 계약서를 써내려 가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했고 간혹 주말에도 일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생활하는 집에서 너무 거리가 멀었다. (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용산이었고 그 분의 집은 노원이었다. ) 지금 생각해보면 코디분께서 그 분의 사정에 맞게 내 답변을 유도했던 것 같다. 이용자가 와 있으니 잠시 만나보겠냐고 물었고 어색하게 만남을 가졌다. 그가 질문했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아직 교육을 받기 전이었고, 이용자가 워낙 급하게 활동보조인을 구해서 그렇다는 설명도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기초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라 일단을 교육을 수료하고 일을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사실 이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부분이다. 활동보조인제도 초기에는 현장에 나간 후에 교육을 이수해도 됐지만, 많은 문제가 생겨 현재는 교육 이수 후 이용자와 맺어지도록 강제하고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영 찜찜했지만 무엇보다도 이용자분이 내게 반말을 쓰고 있었다. 그는 언어사용이 부자연스러운 뇌병변 1급 장애인이었고 내 편견의 시선이었을지도 모르나 영 내키지 않는것도 사실이었다. 교육 수료 후 나오라는 답변을 얼떨결에 듣고 나왔으나 그 다음날 장문의 문자로 거절의사를 밝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나, 다만 먼 곳까지 가서 토요일에도 일을 해주며 내가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1주일간의 교육, 하루 8시간씩 아현역 근처의 큰 교회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떤 교육은 지리했고 어떤 교육은 재미있었다. 교육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든 여자들이었다. 정말 교육받으러 온 사람처럼 교육을 받았고 밥 먹는 시간에는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었다. 당시 내 수중에는 화폐가 그다지 없었기에, 점심은 집에서 밥을 가져오고 편의점에서 라면 같은 것을 사서 말아먹었다. 밥을 꾸역꾸역 먹으면서도 막연히 이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겠지. 다짐인지 위안인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밥과 함께 밀어 넣었다. 2011년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던 7월이었다. 활동보조인 교육을 받는 동안의 화두는 두 가지.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과 ‘비장애인’ 이라는 두 개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비장애인이 아닌 일반인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활동보조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딱히 대상을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정도쯤이야.

활동보조인을 하겠다. 돈도 벌고 노동의 의미도 찾는 일을 하고 싶다. 라고 내 계획을 주변사람들에게 밝히자. 축하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짓궂게 놀리는 사람도 있었다. 장애인들이 이동권 투쟁을 하면 정말 빡세게 한다. 전경차 앞에서 체인 묶고 같이 서있어야 한다. 연행 될 수도 있다. 매일 매일이 투쟁의 날이다 라며 겁주는 이도 있었다. 나는 어쩐지 그 말을 듣고 도리어 기운이 났다. 당시 나는 인간의 삼대 의무는 ‘노동, 투쟁, 연애’ 다. 이 셋 중 둘은 해야지 그래도 인간 아니겠는가?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던 때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힘으로 밥을 벌고 구조의 모순과 싸우고 타자를 내 몸과 같이 생각하는 것들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필수요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지금도 변함없다. 실제로 이 세가지중 하나도 제대로 못하던 시기였다. 셋 중 둘만 제대로 해도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생각이다. 어쩐지 활동보조를 하게 되면 투쟁도 하고 노동도 하고 장애인- 타자이며 소수자-를 사랑하는 감수성도 생길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있었다. 아님 말고. 혹시 모를 일이다. 매우 부유한 집의 장애인 이용자와 일을 하다가 인생역전의 기회가 생기거나 아름답고 맑은 영혼의 여성장애인과(이용자의 누이나 동생이라도) 안타까운 로맨스가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러거나 말거나

첫 번째 이용자를 의기양양하게 물 먹이고 나서, 두 번째 이용자를 소개받을 일이 생겼다. 말하자면 첫 고용면접인 셈이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에 스쳤지만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마음이었다. 약속장소는 아현역. 공교롭게도 활동보조교육을 받던 곳 근처에 사신다고 했다. 아마 7월의 마지막 주였을 것이다. 덥고 차가 많이 막혔다. 시급 6000원과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는 조바심과, 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았고 버스에서 내려 시청에서 아현역으로 가는 2호선 지하철을 탔다. 무언가, 실업자나 놈팽이에서 사대보험과 노동으로 환승하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어떤 역량과 능력이 필요한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전에도 활동보조를 해보긴 했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고 일이란 늘 변수가 다양했다. 약속장소인 아현역에 도착했지만 장애인이라든가 휠체어 같은 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용자의 전화번호로 (전날 문자로 약속장소만 잡았다) 전화를 했다. 이용자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분이 받았다. 시야에 60대의 여자 분과 너무나 멀쩡한 한 남자가 들어왔다. 2011년 7월 26일 오후 두시 아현역. 그를 처음 만난 날이다.

  1. 활동보조를 하게 될 장애인을 통상적으로 부르는 말, 그들은 고용주도 자본가도 아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사용자와는 의미가 다르다. 국가에서는 그들에게 바우처를 주고 활동보조를 이용한 시간만큼 바우처를 결제한다. 그 결제액을 보건복지부에서 지급한다. 실 고용주는 보건복지부다. 바우처 한 시간은 8000원의 화폐가치가 있는데, 센터가 25%인 2000원 정도를 중계수수료와 유지비로 가져가고 75%인 6000원 정도가 노동자에게 지급된다. 2011년 말 제도 시행 후 최초로 300원 인상되었다. 225원이 오른 셈이다. []

응답 2개

  1. 탱탱말하길

    활동보조교육을 받으며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이 좋을까? (이용자의 자기결정권과 나의 감정노동에 관하여) 고민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앞으로 노동,투쟁,연애 생활자가 관계를 만들어나갔던 기록들이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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