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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피어 2012 : 노상냄비와 해방의 계기

- 와타나베 후토시(커먼즈대학 사회학)

1. 니트의 날

2월 10일 니트의 날 국경 없는 냄비의 모임

 2012년 2월 10일, 한큐전철 톤다역 앞에서 국경 없는 냄비단의 노상냄비(Street Nabe)가 출현했다. 국경 없는 냄비단은 최근 일본 각지에서 증식하는 네트워크다. 그 실체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도쿄, 오사카, 교토를 필두로 각지에서 게릴라적인 노상냄비가 등장하고 있다. 노상냄비란 문자 그대로 거리에서 냄비를 끓여서 먹는 걸 뜻한다.

노상냄비의 실천은 안전 강화로 자유를 상실해가는 거리에서 공공권을 회복하고, 동시에 집 안에서 가족이 모여 먹는 냄비 요리를 야외로 가져옴으로써 사적으로 닫혀가는 경향에서 개인화되는 사람들의 사회적 감성을 공공성을 향해 열어가는 의미도 지닌다(혹은 그저 즐거워서 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울러 톤다역 앞에서 노상냄비가 열린 데는 큰 의미가 있다. 톤다역은 오사카 시가지의 중심부로부터 전철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교외 주택지다. 오래된 마을이었지만 교외 주택지화가 진행되어 첨단 문화가 침투했고 그로 인해 구도시의 중심부에 비하면 문화적 활동이 약하다. 특히 마이너문화가 싹틀 여지는 줄어들고 있다. 그런 교외 주택지이기에 과격한 노상문화적 퍼포먼스인 노상냄비는, 교외 주택지에서 마이너문화를 재생시킨다는 큰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그날은 2월 10일이었다. 톤다역 근처에 가게를 둔 카페커먼즈에서는 2월 10일을 ‘니트의 날’(2월은 일본어 발음으로 니가츠, 10일은 토우카다. 발음의 유사성에서 정한 날이다)로서 니트에 대해 생각하는 이벤트 ‘니트피어’(니트+유토피아의 조어)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니트(NEET)란 영국의 청년 노동정책에서 발생한 용어로서 Not in Employment, Education and Training(일하지 않고, 학교에 가지 않고, 직업훈련 기간도 아닌 상태)의 약어다. 종래의 노동정책에서는 구제받을 수 없는 청년 실업자들을 향해 대책을 마련하려고 고안된 개념인데, 2004년 무렵 이 말이 일본 사회로 들어오면서는 의미가 바꿔 “일할 의지가 없는 게으름뱅이 젊은이”를 모멸조로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다.

 카페커먼즈는 니트, 히키코모리, 정신장애자들과 함께 사회적 관련을 갖는 장소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영리활동조직(NPO)이 운영하며, 니트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카페커먼즈에서는 니트로 불리는 젊은이들을 게으름뱅이라고 규탄하지 않으며, 또한 실은 일하고 싶은데 실업률이 높아 일하지 못할 뿐이라며 성실한 니트상을 날조하지도 않는다. 일하고 싶다는 욕망과 일하지 않고 싶다,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는 욕망을 함께 인정하며, 일하는 것과 사는 것의 관계를 생각하고자 니트라는 말을 다시 파악해 매년 2월 10일에 니트피어라는 이벤트를 개최해 왔다.

 이러한 카페커먼즈의 ‘니트의 날’ 이벤트에 (멋대로) 동조하여 국경 없는 냄비단이 2월 10일에 톤다역 앞에서 노상냄비를 시도했을 것이다. 노상냄비에는 카페커먼즈에 관여하는 사람도 다수 참가했지만 사전에 협의나 공모가 있지는 않았다. 몹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서 카페커먼즈와 국경 없는 냄비단이 합류했다.

 
2. 노상냄비의 경험

냄비와 술

  노상냄비는 낮부터 열렸지만, 나는 해가 지고 나서야 참가했다. 역의 지하개찰구를 나와 계단을 오르니 골판지를 깔아 버너로 냄비를 끓이며 술을 마시는 일군이 눈에 들어왔다. 골판지에 손으로 작성한 플래카드에는 “2월 10일은 니트의 날” “저소득자” “니트에 사랑을!” “돈은 꺼져라!” “냄비와 투쟁” 등 제각각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국경 없는 냄비단 카페커먼즈의 멤버 말고도 몇 명의 대학생이 함께 있었다. 거기서 놀랐는데 대학생 가운데 한 명은 전에 내가 어느 대학에서 비상근강사로서 있을 때 수강생이었다. 또다른 한 명은 다른 대학에서 비상근강사로 근무했을 때 대학 근처 카페에서 몇 번인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학생이었다. 그들이 국경 없는 냄비단과 관계가 있다니 놀라웠지만, 그들도 비상근강사였던 내가 노상냄비에 찾아온 것이 놀라웠을지 모른다. 나와 학생들은 노상냄비라는 장을 매개 삼아 놀랍게 재회했다. 이런 매개자로서의 역할 또한 국경 없는 냄비단이 지닌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교외 주택지의 역 앞의 노상냄비는 역 이용자의 의심과 호기심 어린 눈빛에 사로잡혔다. 개중에는 흥미를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노상냄비에 합류해 말을 붙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역 문화잡지의 저널리스트가 취재하러 오거나 근처 학생이 사진을 찍고 싶다며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어떤 아저씨는 처음에는 고함을 지르며 화를 냈지만 마지막에는 함께 술을 마시고 돌아갔다.

 경찰은 주의를 주러 한 차례 들렀을 뿐이다. 톤다역의 역무원은 친절해 “일단 주의를 해둡니다. 뒷정리는 꼭 부탁드려요”라고 말을 건넸을 뿐 나머지 일은 묵인해줬다. 역내 화장실도 사용하도록 허락해 줬다. 의외로 교외 주택지에서 노상문화는 이제부터 번창할지도 모른다.

 노상에서의 냄비는 지나는 길의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운동이며, 앞서 말했듯 한 번 만났지만 서로 잊고 있던 사람들이 재회하도록 매개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냄비가 지닌 힘이 거리에서 그 잠재력을 더욱 강하게 분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3. 관계성의 해방

역의 계단을 오르면 냄비 주위로 모인 사람들이 보인다

 
 니트나 히키코모리, 실업자는 사회적 역할이 박탈된 상태이고, 타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상처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노상냄비의 경험에서 그들은 낯선 타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거꾸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되돌려줄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직 대답은 얻지 못했지만 거리에 둘러앉아 음식 냄새를 물씬 풍기며 냄비 요리를 먹는다는 행위에 어떤 해방의 계기가 잠복해 있는 것이리라. 그건 자신을 자기에게 가둬두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며, 타인과의 사회적 관련으로의 개방일 것이다.

 노상냄비는 사적 공간으로의 폐색을 특징으로 하는 히키코모리 경험의 반대극에 있다. 사적공간과 공공공간을 혼란시키는 노상의 경험은 타인과의 관계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는 것일까. 실은 카페커먼즈의 협력 단체인 히키코모리 상담조직의 뉴스타트 사무국 칸사이에서는 매월 두 차례 모두 모여 냄비를 끊이는 모임을 10년 정도 이어오고 있다. 뉴스타트 사무국 칸사이의 모임은 히키코모리 상담의 맥락으로 한정되어 있기에 공개되지는 않지만, 거기서는 히키코모리 경험자와 히키코로리 생활을 하는 딸과 아들을 둔 부모, 스탭 외에 여러 낯선 사람들이 모여 냄비를 끓이고 있다.

 노상냄비도 모임도 냄비를 함께 끓임으로써 뭔가를 달성하려는 것은 아니다. 냄비가 뭔가의 수단은 아니지만, 함께 둘러싸여 냄비를 끓이면 결과적으로 어떤 변화가 생긴다. 하지만 그 변화는 부산물이지 목적은 아니다. 냄비를 공유하는 경험은, 말하자면 유전학적 돌연변이의 발생장치로서 어떤 변이를 끊임없이 낳고 있다. 그런 변이는 사회적 관계성을 열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현장에서 영위되어 온 경험 속에는 또렷하게 언어화되지 않지만, 분명히 어떤 이론(theory)이 있다. 그 이론을 파악하고, 식사를 공유하는 경험이 갖는 의미를 사고하는 것은 사회운동의 문화를 생각하는 데서도 중요할 작업일 것이다.

응답 3개

  1. 집없는달팽이말하길

    보통 데모가 있으면 행진 끝난 다음에 나베단이 출현해서; 나베를 끓이구요, 아닐 때는 ‘어디어디에서 나베 합니다!’라고 트위터에 올리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트윗 보고 찾아와서 같이 끓인다고 해요ㅎㅎ 멤버는 따로 없고, 나베 같이 먹으면 나베단!

  2. 탱탱말하길

    재밌어요. 국경 없는 냄비단!! (냄비에도 국경이 없으려나 –;)
    국경없는 냄비단이 모이는 것은 날짜를 정하고 모이는 것인지, 모일때는 어떻게 연락을 주고 모였는지가 더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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