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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배우 시리즈 1 – 아베 히로시

- AA

보통 사람들은 영화를 말할 때 감독을 먼저 언급한다. 하지만 TV는 연기자가 중심이다. 요즘은 드라마 분야에도 스타 PD나 작가가 생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TV 영상물에 관심이 있는 일부고 김수현 작가 정도 되지 않는 이상은 어떠한 드라마를 언급할 때는 배우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국내도 그럴 진데 해외 드라마는 스크롤에 글자로 다가오는 감독이나 작가의 이름보다는 얼굴을 보여주는 배우가 먼저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TV드라마 속에서 꾸준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지키고 있는 배우 4인을 차례로 소개하기로 한다.

허당 캐릭터에 적임자, 아베 히로시

아베 히로시는 1964년생, 우리 나이로 올해 49세다. 190cm가 넘는 신장 덕에 사람들 속에 서 있기만 해도 눈에 띄는 그의 얼굴은 동양인이라고 하기에 다소 이국적인 외모다. 십이지장쯤에서부터 발성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깊고 낮은 목소리까지 더하면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멀쩡하다. 그런데 외모만으로는 뉴욕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캔디 여주인공을 구출해주는 매너 좋은 실장님에 어울릴 것 같은 이 배우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은 건 2000년도에 제작된 드라마 <트릭>이었다. (이전 츠츠미 유키히코 감독 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가 연기한 주인공 우에다 지로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물리학과 교수인데 늘어놓는 말이 지적인 것 같지만 가만히 듣다 보면 반 이상은 자기 자랑이고,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그만 일에도 기절할 정도로 겁이 많은 ‘허당’이다. 매번 보기 좋게 당하고 허둥지둥 대다가 퍼뜩 다시 각을 잡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우에다의 캐릭터는 아베 히로시가 가지고 있던 외모의 한계를 깨끗하게 날려 버렸다.

저토록 멀쩡하고 완벽해 보이는 외향적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 저런 구멍이, 그것도 몹시 큰 구멍이 있다는 갭이 주는 쾌감에 시청자들은 그에게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트릭>은 시즌 3까지 제작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지며 지금까지도 매니아층을 거느릴 만큼 큰 인기를 얻었고 아베 히로시는 자신이 획득한 장점을 정직하게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오늘 조금 자세히 소개할 드라마 두 편이 있다.

먼저 첫 번째 작품 <웃는 얼굴의 법칙>은 2003년 TBS에서 제작, 아베 히로시를 포함해 다케우치 유코, 진나이 타카노리, 노기와 요코 등의 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드라마다. 이 작품에서 아베 히로시가 연기하는 주인공 사쿠라이 레이지로는 인기 만화가이지만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 탓에 여기저기 겹치기 연재를 하여 출판사에서는 ‘요주의 작가선생’으로 분류되어 있다. 출판사는 사쿠라이가 새로 시작하는 만화 <월하의 길>의 창작활동에만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로 그를 지방의 한 여관에 모셔두기로 한다. 사쿠라이는 출판사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기 위해 온 쿠라사와 유미를 지목하며 그녀와 함께라면 출판사의 요청대로 연재 3달간 여관에 간다고 선포한다.

쿠라사와 유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회사원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여사원 정리해고로 실직을 당해 일을 찾던 중이었다. 그저 자신이 쓰다 버리면 쉽게 대체되는 부속품 같다고 느껴 속상했던 쿠라사와는 유명 만화가 사쿠라이가 자신을 특별히 지목했다는 점에 마음이 움직여 3개월짜리 만화가 비서직을 수락한다. 사쿠라이와 쿠라사와가 향한 곳은 쿠라사와의 오빠 코이치가 주방장으로 있는 ‘유즈하라’라는 온천 여관. 여관의 여주인 유즈하라 미사코를 비롯해 여러 종업원들이 사쿠라이, 쿠라사와와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겪으며 조금씩 성장해간다는 것이 줄거리다. 일본 드라마의 특징을 몹시 모범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대작, 명작, 졸작의 카테고리가 아닌 평범하게 잘 짜여진 일본 드라마를 경험하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 열정을 잃은 사쿠라이가 다시 일에 매진하게 되는 과정이나 특별해지고 싶다는 마음만 앞선 쿠라사와가 자아를 확립하는 계기 등에 매번 여관 주인 미사코가 교훈이 될 만한 가르침을 말한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일본 드라마는 좋게 받아들이면 교훈이지만 자칫 훈계라고 느낄 수 있을 만한 대사가 꽤 많은 편이고 다소 지루할 수 있는 훈계의 시간을 다른 요소들과 적당히 배치하는 것에 작품의 흥망이 달려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여관 주인 미사코가 교훈 역할을 충실히 하는 동안 쿠라사와의 오빠역을 맡은 원맨쇼 연기의 달인 진나이 타카노리, 팔불출 종업원 요시다를 맡은 시바타 리에 등의 조연이 끊임없는 잔재미를 주는 감초 역할을 하여 완급을 조절했다. 그리고 주인공 역할의 아베 히로시는 조연들의 파워에 밀리거나 일부러 돋보이려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밸런스를 잡아 조연진들과 어우러진다. 또한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여주인공과의 대면에서도 자신만의 페이스를 놓치지 않는다. 마치 키우는 금붕어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폼을 잡다가도, 때로는 금붕어의 안위가 걱정되어 해줄 수 있는 게 없는지 허둥대다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어항 곁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귀여운 남자를 보는 느낌이다. 상큼한 미소로 언제나 씩씩한 여주인공을 연기한 다케우치 유코의 미모도 볼 거리다. 두 사람은 2008년 영화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에서 다시 콤비를 이루기도 했다.

<결혼 못하는 남자>는 우리나라에서 지진희, 엄정화 주연으로 방송되었던 드라마의 원작으로 2006년 후지TV에서 제작되어 평균 20% 가량의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아베 히로시가 연기하는 주인공 쿠와노 신스케는 자신의 세계가 심하게 뚜렷하여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괴짜 건축설계가다. 쿠와노는 역시나 언뜻 보기엔 완벽한 남자다. 왜 마흔이 되도록 결혼을 안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외모도 훌륭하고 일에서도 인정받고 있고 좋은 집을 가지고 있으며 요리도 잘 한다. 하지만 그와 몇 마디만 나누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 남자, 평생 결혼 못 하겠구나! 하고 말이다. 오코노미야키를 맛있게 굽는 방법, 불꽃놀이에 쓰이는 불꽃의 명칭과 성분 같은 것을 줄줄 읊을 정도로 쓸데없이 해박하지만 누군가 그것에 대해 칭찬하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라며 칭찬한 사람을 단박에 머쓱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자신의 집에는 누구도 들이지 않고, 결혼은 책임과 의무만 늘어나는 번잡한 행위일 뿐이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연애네 결혼이네 애를 쓰지만 그건 다 자신처럼 ‘혼자인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바보들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일관적인 주장이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항상 발견하고, 이죽거리며 돌려 말하는 법을 전혀 모르는 듯한 쿠와노는 그래서 늘 혼자다. 혼자인 게 좋고 혼자인 것이 편하다. 그러던 그가 40세가 되는 생일날 늘 그렇듯 모친의 축하 메시지뿐인 집에 돌아와 혼자 스테이크를 구워 먹다가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쿠와노가 응급실에 실려 가서 생일날 여의사에게 항문 관련 수술을 받는 일련의 소동에서 그는 가족, 직장 외의 인물들과 얽히게 된다. 그를 응급실에 데려온 옆집 사람 타무라 미치루, 그를 치료한 의사 하야사카 나츠미, 두 여자다. 두 사람 다 쿠와노와 대화한 후 쿠와노는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지만 두 여자도 결혼을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귀여운 외모를 가진 20대 직장인 미치루는 연봉 1억에 적당한 외모, 괜찮은 직업, 자상한 성격을 가진 현실에 있을 수 없는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다 못해 외로움을 달래고자 애완견을 키우고 있다.

30대 후반의 나츠미는 의사로서 일도 잘 하고 성격도 원만해 주변 사람들을 늘 보살피지만 연애 결혼을 하고 싶다고 바라는 마음과 달리 맞선도 소개팅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일이 끝나면 혼자 라면집에서 라면 한 그릇 먹고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보거나 파칭코가게에서 파칭코를 하는 게 여가 생활의 전부다. 각기 다른 이유지만 짝이 없다는 공통점을 가진 이 세 사람은 티격태격 서로 왜 짝이 없는지를 지적하지만 그러는 동안 자신의 문제점을 서서히 깨닫는다. 꼭 결혼이 전부는 아니고, 조건이 전부는 아니고, 혼자인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곁에서 일상의 일정 부분을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게 꽤 괜찮은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쿠와노는 자신도 모르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츠미에게 진료를 핑계로 찾아가 은근슬쩍 의견을 묻기도 하고, 나츠미는 쿠와노가 못 이기는 척 미치루의 애완견을 보살피지만 사실 다른 생물체에게 따뜻한 애정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에 대한 이해도를 조금씩 높여간다.

사실 쿠와노와 같은 괴짜 캐릭터는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현실에서도 평소에 전혀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지만 마음을 열고 유심히 지켜보면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서 소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음을 살짝 알려주는 팁이기도 하다. 드라마 속 쿠와노는 연애나 결혼을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모두가 말할 정도로 괴팍한 성격이지만 알고 보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이마에 붙은 반창고나 비디오대여점 아르바이트생의 손가락에 반지 같은 것을 눈치 챌 정도로 예민하며 다만 사람에게 다정한 말을 하는 훈련이 되지 않은 것 뿐, 일부러 누군가를 상처주기 위해 못된 말을 골라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름대로는 위로, 혹은 대화를 하기 위해 하는 말인데 그것이 몹시 서툴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저렇게 괴팍한 사람도 알고 보면 나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하나의 인간이므로 내 주변의 싫었던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누군가, 대화할 때마다 싸움으로 끝나는 누군가도 내가 조금만 마음을 열고 대하면 사실 눈치 채지 못했던 본심, 몰랐던 장점 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드라마가 성공한 요인은 확실한 캐릭터들을 잘 조합하여 짜임새 있게 극을 꾸려갔다는 것과 10년, 20년 전과 비교해 연령대만 늘어나고 삶이 풍족해졌을 뿐 똑같이 연애와 결혼에 고민하고 있는 미혼, 비혼 남녀들의 본심을 잘 표현했다는 점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를 위해 태어난 듯한 아베 히로시의 캐스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를 찍을 당시 40대의 미혼남이었던 (방송 2년 뒤 열 몇 살 연하의 여성과 결혼하지만) 아베 히로시는 쓱 보면 멀쩡한데 알고 보면 허당인 자신의 장기 캐릭터에 ‘극도의 괴팍함’을 더해 완전한 극의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유이자 원동력이 된다. 이는 아베 히로시가 영리하게도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조금씩 끊임없는 캐릭터의 변주를 시도해왔기에 나타난 결과다.

<히어로>에서는 사내 불륜을 계속하고 있음에도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검사 시바야마, <속도위반결혼>에서는 몇 년째 슬렁슬렁 사법고시를 치르고 있는 백수 카와구치 에이타로, <서양골동과자점 안티크>에서는 보기엔 위협적이지만 하는 행동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보디가드 코바야카와 치카게, 어느날 갑자기 정리해고 당하여 가부장적인 가장에서 전업주부로 인생이 바뀌는 남편 야마무라 카즈유키로 나오는 <앳 홈 대드> 등 그는 시청자들의 기대치를 충분히 채우면서도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캐릭터의 영역을 키워왔다. 마치 무채색의 옷이 잘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무채색의 상하의를 입으면서도 다양한 색상의 머플러나 가방 등의 매치를 시도하는 것 같이 말이다. <결혼 못하는 남자>로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얻은 듯 아베 히로시는 그 이후 조심스럽게 다른 캐릭터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특유의 허당 캐릭터를 완전히 지우고 그저 평범한 남편, 아들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으며 (이 작품으로 처음 영화제의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파랑새>에서는 말더듬이 임시 교사역을 맡기도 했다. NHK 대하사극 <천지인>에서는 진중하고 무서운 무사를 연기하고 영화 <자학의 시>나 드라마 <하얀 봄>에서는 야쿠자의 역을 맡았다. 2010년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을 드라마화한 <신참자>는 사건 해결보다 사건에 얽혀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치유되어야 진짜 사건이 해결된 것이라 생각하는 형사 카가 교이치로를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올해 4월에는 일본 연극계의 거장 니나가와 유키오가 연출하는 셰익스피어에 도전하여 영국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다.

아베 히로시는 허당 캐릭터가 특기지만 시청자에게 조금 친절하고, 일에는 몹시 영리한 배우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을 알고 있고, 잘 활용할 수 있는 작품을 택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길 원하는 캐릭터를 꾸준히 갈고 닦으면서 만족감을 안기는 동시에 해보고 싶은 다른 역할도 도전하길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베 히로시가 나온 드라마는 평균 이상, 이라는 평은 단순히 한 두 작품의 히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10년 넘게 꾸준히 캐릭터의 변주와 발견을 멈추지 않은 배우에게 붙은 소소한 칭찬일 것이다.

덧붙여, 아베 히로시는 우리나라에서 <공부의 신>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어 방송된 드라마의 원작 <드래곤 사쿠라>에서 문제아들에게 동경대에 합격하는 비법을 알려주는 선생님역을 맡기도 했다. 일본과 우리나라 방송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하면 이른바 ‘직접 광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부의 신>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인 ‘천하대’라고 칭하지만 <드래곤 사쿠라>에서는 그냥 대놓고 ‘동경대’라고 말한다. CF나 상품명을 이야기하는 것도 종종 쓰인다. 예를 들어 드라마 대사에서도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개그콘서트>에서 하듯 상품명을 흐리듯 말하거나 하는 개그가 나올 일이 없다. 연예인에 대해 얘기할 때도 그가 나온 CF를 돌려 말하지 않는다. 간접 광고 때문에 드라마의 흐름이 깨지거나 거슬리는 부분이 자꾸 눈에 띄는 요즘, 의외로 스트레이트하게 말하는 일본의 방송에서 묘한 쾌감을 얻기도 한다. 물론 직접 광고가 좋은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응답 1개

  1. 선희말하길

    눈이 깊어 느낌이 좋은 배우네요. 친절함과 영리함이 묻어나요. 연기하는 사람에게는 작품 보는 안목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는 성공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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