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세인트 조호님을 위하여

- 달팽이 달팽이

# 1. 

처음 일본에 가서 가장 놀랐던 것은 동네에 시장이 없었다는 거다. “이 동네에는 시장이 어디에 있어?” 라고 묻자, 친구는 역 근처에 있는 두 군데의 대형 마트를 소개해줬다. “여기는 11시에 문을 닫으니까, 10시 쯤에 가면 삼각김밥 같은 걸 많이 세일해. 그리고 저기 있는 마트는 밤 12시 반까지…”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시장 말이야. 채소나 생선 같은 거 파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곳. 아니면 이 동네는 역 앞에 노점상 모여있는 데가 없어?” 그는 잠시 고민하다 관광 명소라면서, 지하철로 한 시간 반 떨어진 곳에 있는 츠키지 어시장이라는 데를 알려줬다. 서울로 치면 노량진 수산시장 같은 곳. 도쿄에 있으면서 나는 시장이라고 부를 만한, 그러니까 영천시장이나 인왕시장 같은 곳 뿐만 아니라, 홍제역 2번 출구 앞처럼 길가에 다라이를 놓고 생선이나 꽃, 과일을 파는 델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라는 나의 질문에 친구는 “그런 건 다 불법이니까. 아마 몇 십년 전에는 있었을 거야.” 라는 지극히 당연한 대답을 했다.   

지하철에서 커다란 카트를 끌고 10장짜리 클래식 씨디 셋트를 팔거나, 발열 타이즈, 돋보기 안경, 장갑, 우산 따위를 파는 풍경이 어떤 커다란 도시에서는 아주 드문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서울에서도 드문 풍경이 될 것은, 굳이 재래 시장과 작은 슈퍼들을 밀어내는 기업형 슈퍼마켓 SSM(Super Supermarket)을 들먹이지 않아도 뭐 뻔한 일이다. 더 큰 도시가 될수록, 더 잘 사는 도시가 될수록, 그런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공공장소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의 리스트가 점점 늘어나는 것.   

왜냐고, 왜 길에서 장사하면 안되냐고 묻는다면 돌아올 말은 뻔하다. “돈을 불법적으로 벌고 있잖아요. 정식으로 신고해서 가게 얻어 장사하는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잖아. 길 지나다니는 사람들한테도 불편하고, 냄새나고…” 그리고 흔히 그런 말들의 마지막은 ‘저 사람들 알고 보면 다 아파트가 몇 채씩 있는 부자들이예요. 정식으로 신고해서 가게 얻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벌 돈을, 저 사람들이 죄다 빼앗아가서…’ 류의 괴담 같은 거다. 길에서 기어 다니며 구걸하던 장애인을 따라가보니 어디선가 벤츠가 와서 아저씨를 실어가더라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장 내가 길에서 한 달에 30일 간 쉬지 않고 노점상 차려놓고 장사한다고 해서 아파트를 몇 채씩 장만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비단 ‘장사’의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합법적인 장사와, 불법적인 장사가 나뉘어져 있어야 하는 이유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필요보다, 그것을 통제해야 하는 사람들의 필요에서 온 것이니까. 이건 공공장소에서 장사하면 안돼, 라는 말은 소리 지르면 안돼, 데모하면 안돼, 술 마시면 안돼, 담배 피우면 안돼, 노래하면 안돼, 라는 말들과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어떤 것은 합법으로 보고, 어떤 것은 불법으로 보는, 뭐 그런 눈. 이를테면 정부의 통제라는 관점.   

 

오큐파이 여의도 벼룩시장

 

# 2.   

좀 엇나가는 이야기일지 몰라도,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FTA 집회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해야겠다. 그 즈음 있었던 다른 데모들과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별 특이점이 없는 집회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토요일이었고, 사람들이 이만 명쯤 있었다. 저녁 무렵 세종문화회관 부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경찰들이 광화문 역 지하보도를 통제한 상태였다. 역 안에서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역 바깥에서는 집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타야겠다는 사람들이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경찰 버스로 빈틈없이 봉쇄된 도로에는 버스만 드문드문 다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인도에만 몰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 순간엔가 사람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도로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한 군데가 열리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와아 도로로 쏟아졌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내 손을 잡고 뛰었다. “혁명이야. 광화문 광장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니!” 우리는 정말 기뻐했고, 그러는 도중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로로,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여기저기서 플라스틱으로 된 도로 통제용 블록들을 쓰러트렸고, 거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거리를 온통 적셨다.   

그리고 두어 시간 뒤 주최측에서 자진해산 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때가 토요일 밤 열 시. 다음날 집회는 계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순순히 집으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광장은 텅 비어버렸고, 도로에서는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다. “혁명은 밤 열 시에 끝났어.”   

이만 명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거리를 점거했지만,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몇 마디의 말에 모두 흩어져버린 사건을 나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우리에게는 알려주지 않았으나, 아마도 주최측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 있다가는 경찰의 진압이 들어온다든지, 뭐 그런. 그리고 다들 그런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주최측이라는 건 아무래도 우리편이니까. 그 때 너무도 쉽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반정부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FTA라는 국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쪽의 명령은 너무도 쉽게 따랐던 그 상황에서 이상한 인상을 받은 것은 나 뿐이었을까. 이만 명이 모였지만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옳은 일, 좋은 일, 이른바 ‘개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올바른 명령에 사람들이 따랐기 때문에. 차라리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였다면 좋았을 것을. 술 약속이 있어서, 너무 피곤해서, 집에 전기 장판을 켜두고 온 것 같아서, 뭐 그런 일 때문에 각자 집으로 돌아갔던 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개념 없는’ 나로서는 그런 생각이 들 밖에 없었다.   

   

# 3.   

교토 산조역 앞에서 만들었던 시장.

 지난 달, 교토의 산조역 앞에서 우리는 세인트 조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이상한 시장을 열었다.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소주와 커피, 뜨겁게 끓인 아마쟈케를 마시면서 비누와 과자를 팔았다. 때로 물물교환하기도 하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 과자를 건네기도 했다. 놀러 왔던 아이들은 자기 신발을 벗어 매대에 놓고 신발가게를 차렸다. 다행히 팔리지 않았다. ‘국경 없는 나베단’의 누군가가 끝도 없이 젬베를 치며 랩을 했다. 잡음이 많이 들리는 메가폰에서 거리가 쩌렁쩌렁 울리게 노래가 흘러나왔다. 옆에서는 숙주와 배추를 넣은 찌개가 끓고 있었고……. 시작한 지 삼십 분이 지났을까 경찰이 와서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말했어?”   

“응. 우리는 신흥 종교집단인데 세인트 조호님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했어.”   

“세인트 조호가 누군데?”   

“나도 몰라.”   

취한 눈으로 우리는 배시시 웃었다. 주변의 중국집 직원이 신고를 해서, 경찰이 한번 더 와서 주의를 주었지만 우리는 계속 장사하고, 찌개를 끓이면서, 노래를 불렀다. 경찰이 여섯 번 다녀가고 해가 저물 때까지. ‘평범한 시민’이라면 공공장소에서 절대로 하지 않을 일들—길에서 찌개를 끓이고, 노점상을 열고, 다리 난간에 비닐 시트로 텐트 같은 걸 치고, 술을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고, 확성기에다 대고 씨끄럽게 랩을 하는, 뭐 그런 것들을 했다. 왜? 세인트 조호님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면 안된다, 라고 누군가 말할 때. 예를 들어 서울역에서 박스를 깔고 잠드는 노숙자에게, 아니면 지하철에서 카트를 끌고 치약을 파는 이에게, 공원에서 술 마시는 이에게. 그렇게 말할 때에 우리는 ‘시민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시민’이고, 무엇이 ‘공공’인가?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보통의, 평범한, 아니면 ‘개념 있는’ 사람들? 올바른 의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답답하다고 광화문 네 거리에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지 않는다. 집이 없다고 서울역에서 박스 깔고 잠들지 않는다. 배고프다고 길에서 라면 끓여먹지 않는다. 라면 살 돈이 없다고 거리에서 장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종종 거리에서 그런 일을 하는 걸까? 답은 아마도 하나 밖에 없을 거다. 그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왜, 산조역 앞 대로변에서 우리는 왜 그런 일들을 벌였던 걸까? 식당 갈 돈도 있는 사람이 왜 길에서 찌개를 끓여먹나. 일자리가 있는 사람이 왜 거리에서 장사하나, 집도 있는 사람이 왜 거리에서 텐트를 치고 잠드나. 이렇게 되묻는다면, 우리도 똑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국경없는 나베단

 그러니까 이것은 능력과 무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집이 없어서 서울역에서 잠드는 사람들에게 살 곳을 제공하면 끝나는 그런 문제와는 별개인 것이다. 집이 있어도 거리에서 자고 싶어한다면? 돈이 필요하지 않아도 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싶어한다면? 그냥 길에서 찌개를 끓여먹고 싶다는데, 그게 왜 안될까? 문제는 하나다. 왜 거리에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지. 누가 사람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지. 누군가가, 거리에서 무언가 만들어지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것들을 경계하고 있다. 누군가, 서울역에서 홈리스를 모두 없애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그리고 그 누군가는 오사카에서 제일 가난하고 홈리스와 노가다들이 많은 가마가사키 지역을 새롭게 바꾸어놓겠다고 선언하고, 도쿄의 산야에서 노숙자들의 텐트를 철거하는 중이며, 베이징의 가난한 이주노동자 마을 피춘을 국제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다 열거할 수도 없이 허다한 일들을 매일 매일 계획하고 있다.   

긴즈버그였는지 커루악이었는지 기억나지 안나지만, 비트닉(Beatnik) 중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잘 관찰한 다음, 절대로 그걸 하지 말라고. 그래서 우리는 세인트 조호님을 기다린다. 우리에게 가장 정치적인 행동이란 이렇게 쓰잘데기 없고, 뭔지 모르게 이상하고, 잉여로워 보이는 일들 뿐이다. 우리는 길에서 크렘브륄레가 먹고 싶으면 만들고,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콩을 볶는다. 우동을 끓이고, 장사를 한다. 일하기 싫으면 쉬고, 하루 열여덟 시간도 잔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가 시킨다고 고분고분 말 듣지 않는다. 좋은 편이든 나쁜 편이든, ‘시키는 사람’이라면 누가 되었든지 말이다.

응답 3개

  1. 말하길

    재밌다. 그리고 통쾌하다. 마음 속에 웅얼거리고 있던 생각을 눈으로보고 귀로 듣는 느낌…

  2. ㄷㅍㅇㄷㅍㅇ말하길

    crawling NM~ 알면서~ㅎㅎ
    그나저나 글 맨 마지막에 ‘썅’이라고 붙이는 걸 깜빡.ㅋㅋ

  3. 기어가는 ㄴㅁ말하길

    아훙 러블리 ♥ 세인트 조호 님을 기다리면서 얼마나 깔깔거렸을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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