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케이씨의 뉴욕인상기 3> – 공원,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1)

- 권용선(이본의 다락방 연구실)

맨해튼 지도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센트럴파크다. 그 크기도 크기지만 전혀 미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정직하고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 때문이다. 그 직사각형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면, 같은 크기의 공원 12개 정도로 도시의 전체 면적을 덮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건물 임대료가 가장 비싼 도시 중 하나인 뉴욕시에서 가장 커다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전혀 상품적 잉여를 창출하지 못하는 공원인 것이다.

센트럴파크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는 공원이 참 많다. 반드시 오래되고 유명한 공원이 아니더라도 맨해튼 시내를 걸어 다니다 보면, 어떤 동네 후미진 구석에도 공원 한 두 개쯤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맨해튼 땅의 절반은 사실상 공원(여기에는 공원으로 활용할 수 있지만 현재 방치되어 있는 공지와 해당관청과 지역 거주자가 따로 관리하는 공동 마당 같은 것도 포함된다)이 점령하고 있는 셈이다. 그 나머지의 절반은 교회가, 또 그 나머지의 절반을 학교와 도서관 그리고 공공기관이 차지하고 있다. 이쯤 되면, 맨해튼의 아파트 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이유도 납득이 된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공원에서 사람들은 자유롭다. 누군가를 연주하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또 누군가는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서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타인의 행동에 대해 너그럽다.

공원에서 사람들은 자유롭다. 누군가를 연주하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또 누군가는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서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타인의 행동에 대해 너그럽다.

한 도시가 이토록 많은 공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공원은 그 자체로는 어떤 잉여가치도 생산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공원은 대단히 비경제적이고 낭비적인 공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노동과 생산 그리고 소비의 공간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는 도시일수록 어쩌면 더 많은 공원, 녹지, 놀이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한 지인의 뼈 있는 농담처럼, 센트럴파크가 없었다면 맨해튼엔 그 정도 규모의 정신병원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도시에서 공원은 들끓는 용광로의 열기를 식혀주는 하나의 안전장치이며, 모든 것을 화폐로만 환산하는 도시의 시간과 속도에 대응하는 노련한 브레이크이다. 공원은 도시에만 있고, 인간을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까지 몰고 가는 도시가 아니라면, 공원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센트럴파크를 비롯해서 맨해튼에 있는 대부분의 공원들은 이 도시가 개발되기 시작하던 그 무렵부터, 도시 개발의 역사와 함께 ‘만들어져’ 왔다. 뉴욕 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뉴욕시 지도를 보면 센트럴파크에 대한 생각은 적어도 1850년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센트럴파크의 조성에는 영국의 하이드파크에 대한 경쟁심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고, 물질적 풍요와 개발이 야기한 각종 갈등과 문제들을 문화적 소비를 통한 과시로 봉합하려는 부르주아적 속물근성이 또 다른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실제로 센트럴 파크는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맨해튼 다운타운이 자리 잡기 시작한 하층이민자들을 피해 미드타운과 할렘지역으로 이주한 백인 부유층의 마차 산책로(이 흔적은 지금도 관광객을 상대로 한 코치 영업의 형태로 남아 있다)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인종과 계급,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너그러운 공간이 되고, 사람보다 잔디와 나무를 더 떠받드는 공간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센트럴 파크는 개인들에게 휴식과 오락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능과 더불어 정치적 집회의 공간으로 이용되면서 그 용법이 풍부해졌다.

하지만, 사실상 모든 공원이 그렇듯, 센트럴 파크의 다양한 용법과 그 잠재적 가능성은 그 공간의 관리 주체인 뉴욕시와 ‘센트럴파크보호협회’가 제공하고 제안하는 것에 한해 극단적으로 제한되고 있는 형편이다. 일단 현재 이곳에서 일체의 정치집회는 불허되고 있으며 이 장소를 채울 만큼의 대규모 집회는 지난 세기말의 반전, 인권운동 이후 다시 조직되지 않고 있다. 과거의 대규모 시위와는 다른 성격과 활동 방식을 보이는 최근의 ‘점거운동’은 센트럴파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거대하고 예의바른 공원이 99%에 의해 점거되고 그들에 의해 공원에 다양한 방식의 학교와 도서관과 식당이 만들어진다면, 그리고 밤마다 그곳에 색색의 텐트가 세워지고 온 세계의 민속음악들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진다면 얼마나 멋질까?

센트럴파크의 잔디는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이용’된다. 호수 왼편으로 고급아파트들이 보인다. 맨해튼에는 정원 딸린 주택이 없다. 그래서 센트럴파크나 허드슨 강변을 제 집 마당처럼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지어진 고급 아파트들의 렌트비는 깜짝 놀랄 만큼 비싸다.

센트럴파크의 잔디는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이용’된다. 호수 왼편으로 고급아파트들이 보인다. 맨해튼에는 정원 딸린 주택이 없다. 그래서 센트럴파크나 허드슨 강변을 제 집 마당처럼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지어진 고급 아파트들의 렌트비는 깜짝 놀랄 만큼 비싸다.

센트럴파크를 이용하는 예의바른 뉴욕시민들(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관광객들)을 보면, 관련 기관이 관리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공원의 설비나 동식물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센트럴 파크에 오면 누구나 자유롭게 산책하고 책을 읽고, 음식을 먹고 무료 공연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벤치를 이용하는 홈리스는 없다. 비싼 애완견과 백인 아이들을 돌보는 가난한 학생들과 소수민족 여인들은 있지만 흑인과 아시안 아이들을 돌보는 백인 보모는 없다. 조용히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은 허락되지만 다수가 모여 격렬한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는 모습은 볼 수 없고, 간단한 스낵을 먹는 것은 가능해도 고기를 구워먹거나 술 담배 마약류가 허락되지는 않는다. 프로수준의 연주를 선보이는 밴드가 일정한 장소에서 공연을 하는 것은 허락되지만 아무나 춤추고 노래하진 않는다. 이 공원의 규칙이 어떤 것인지 완벽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누구도 이 공원의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 공원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저 공원의 풍경일 뿐이다. 사람들은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감상하고 감시한다.

하지만, 풍경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 도시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경쟁과 차별, 인종과 계급과 성적인 문제들을 그곳에 있는 시간만큼은 은폐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공원은 몇 그루의 나무와 잔디, 그리고 벤치와 인간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붙는 비둘기 몇 마리만 있으면 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에서 잠깐 눈 돌리게 만드는 효과적인 장소인 셈이다.

응답 9개

  1. Beilang말하길

    은폐하는 풍경 그리고 감시하는 풍경 .. 이거 뭔가 재밌는 얘기를 더 할 수 있을 듯하군요. 근데 난 공원서 담배 엄청 피워댔는데 .. 풍경을 바라보는 감시의 시선은 “부화내동” 하지 않으면 상당 부분 극복 가능. 그나저나 어찌 사시오? 이 몸은 요즘 귀향인지 귀양살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나날들이오. 조만간 연락 한번 드리리다.

    • 케이말하길

      ‘부화뇌동’이옵니다. ㅎㅎ
      그러게, 빨리 서울 가세요~

  2. 조지훈말하길

    이본의 다락방 연구실 연구원이신 용선 누님, 절 잊진 않으셨겠죠? 꼭 뉴욕에 놀러가고 싶네요. 센트럴파크에 대한 멋드러진 글도 쓰시고 왠지 배가 아픕니다. ㅎㅎ

  3. 말하길

    ㅎㅎ. “센트럴파크가 없었다면 그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있었을 거다.”ㅋㅋ “예의바른 뉴욕시민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관광객”?? ㅋㅋ. 유머가 늘었어…전자는 뉴요커스러운데 후자는 한국스러운 유머..ㅋㅋ

    • 케이말하길

      댓글다는 솜씨가 늘었어 ㅎㅎ 고추장 귀국해서 마음이 좀 가벼워졌겠네. 더 부지런히 사고치고 다니셔 ^^

  4. 고추장말하길

    센츄럴파크, 이젠 완전히 봄빛이 묻어나네요. 불과 열흘 남짓의 시간인데, 낯선 이국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은… 뭔지… / 잘 지내시고… 글 열심히 보내주세요. ㅎㅎ

    • 케이말하길

      이 사진은 최근 것이 아니옵고, 조군이 한참 전에 찍어둔 거 빌린거여. ㅎㅎ 뉴욕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건 그만큼 서울 살림이 바쁘고 즐겁다는 거겠지. 힘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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